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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 이스탄불과 에페수스 : 아시아와 유럽, 그 사이에 서다"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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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떠난 배는 유유히 보스포러스 해협을 돌아다닌다. 별 하나, 달 하나 사이좋게 어울리는 붉은 터키 국기를 펄럭이며. 이 배는 지금, 유럽에 있는 걸까, 아시아에 있는 걸까? 이스탄불(Istanbul)은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뉜다. 그리 멀지도 않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이 그 멀고도 먼 ´아시아´와 ´유럽´이다.

 바람이 쌀쌀하지만 배 옆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따사롭다. 둥근 돔 지붕을 머리 위에 틀어올린 화려한 모스크들과 수십 톤의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는 돌마바흐체 궁전, 수영장이 딸린 호텔들, 언덕을 타고 층층이 올라간 별장들. 터키 전체에 6만 개나 된다는 모스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제국의 수도였던 이곳 이스탄불에 몰려 있다. 공화정 수립과 함께 앙카라(Ankara)에 수도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제국의 영광은 여전하다.

평일 오전인데도 부두에 늘어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경제가 나빠지자 실업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란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출퇴근을 하다 보면 남보다 서너 배 고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보스포러스에서 낚싯대만 드리우면 ´호구지책´이 마련되는 터키 실업자들의 처지는 또 얼마나 고상한가.

 
과거의 영광이 지금도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블루 모스크와 성소피아는 이슬람과 기독교, 양대 종교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400년이란 세월 동안 전쟁과 지진을 함께 견뎌 온 두 성전은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서로 닮아 있다. 오늘도 다가서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그 자리에 따뜻한 눈빛만을 나눈다.

뾰족뾰족, 있는 자존심 없는 자존심을 다 세우는 교회의 탑들은 때론 우울하다. 그 위에 날카롭게 서 있는 빨간불, 네온싸인 십자가는 그 우울함만을 더한다. 그러나 그리스정교회의 본산이라는 터키에서 바라본 교회의 지붕은 볼록볼록 ´엠보싱´이다. 푹신푹신한 지붕 위를 뛰어다녀도 하나도 힘들지 않게 생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양식은 장방형의 방과 길 회랑을 갖춘 ´바실리카´라고 불린다.

바실리카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인 성소피아는 하느님의 지혜로 지어졌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돔 양식의 지붕을 이고 있다.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한 이슬람측에서도 이를 허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의 모든 회교사원을 돔 양식으로 건축하도록 했을 정도다.

이슬람교 사원의 걸작으로 불리는 블루 모스크도 돔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절묘하게도 성소피아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출신 성분이 다른 두 성전이지만 세월의 옷을 덧입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된 듯하다.

 
성소피아(The Hagia Sophia)

나이가 들 만큼 든 거구의 성소피아(하기야 소피아)는 대부분의 노인이 그렇듯 노쇠하다. 중앙 돔을 받치는 거대한 철근 구조물이 55.6m 높이의 천장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그래도 20차례 지진의 피해를 견디며 1,500년 동안이나 끄덕없이 서 있었으니 ´백전노장´의 의지는 알아줘야 한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는 제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교회가 필요했다. 그러나 첫 번째 목조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두 번째 건물은 반란으로 무너졌으며, 그렇게 세 번째 건축된 것이 지금의 성소피아다.

최초의 돔양식 건물인 성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 바로 하느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기원후 532년에 짓기 시작해서 537년에 완공됐으니 완공까지 5년 10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만리장성, 앙코르왓 등과 함께 세계 8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이유도 높이가 무려 55.6m나 되는 돔을 그토록 단기간에 완성한 것이 현대의 기술로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소피아 성당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운명의 전환기는 1453년 비잔틴제국의 함락이었다. 새로운 주인이 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성소피아 성당을 3일 만에 회교사원으로 개조했고 제단과 벽을 장식했던 각종 성화들은 5cm의 두꺼운 회칠 아래 감추어졌다. 이후 복원공사를 통해 회벽이 제거되고 예수, 마리아의 벽화들은 다시 빛을 찾았으나 ´회춘´이란 게 쉽지 않아서 많이 훼손된 상태다. 현재는 박물관의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

성소피아 성당보다 1100년이나 후인 1616년에 완공된 블루 모스크은 아직 청년의 모습이다. 성소피아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원을 짓겠다는 승부욕으로 탄생한 블루 모스크는 건물 주위에 6개의 첨탑을 세웠다. 그리고 이 첨탑에 들어선 총16개의 발코니는 블루 모스크의 건축을 명령한 술탄 아흐멧이 오스만투르크의 16번째 왕임을 상징한다.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원의 내부가 이즈닉(니케아)에서 만든 파란색 타일 2만2,000장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이다. 녹색, 파란색, 청록색 등 따지고 들면 10가지가 넘는 색이 어우러져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푸르스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모든 회교사원에는 문처럼 생긴 ´미흐라브´가 있어서 정확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확하게 설계된 블루 모스크에 비해 성소피아 성당의 ´미흐라브´는 원래 교회의 용도로 지어졌기 때문에 메카 방향에서 약간 어긋나 있다.

블루 모스크는 지금도 사용되기 때문에 입장할 때는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무릎이 드러나는 반바지도 금물이요, 신발을 벗어 봉지에 담아야 한다. 나오는 출구에는 모금함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모금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금요일에는 예배를 보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입장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고대 도시 에페수스

지금 발밑에 2000년 전의 코스모폴리탄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으니 에게해에 면해 있는 터키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쿠사다시(Kusadasi)의 에페수스(Efhesus)다. 이스탄불이 터키의 관문으로서 대표적인 관광도시라면 에페수스는 에게해를 대표하는 터키의 목적지다. 

기원전 10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에는 그리스 이오니아 왕조의 부속도시였고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지배했었다. 또한 기원전 3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 소아시아의 수도 역할을 했으며 그 후 비잔틴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과거의 도시 문명은 수백 번 거듭된 지진으로 땅속에 묻히게 됐고 다시 그 위에 새로운 도시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지역은 여러 제국들이 노리던 황금의 땅이었다. 언덕 위에 올라서면 얼마나 이 도시가 천혜의 항구 입지 조건을 갖추었으며 비옥한 땅인지 알 수 있다.

로마시대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이자 정치, 경제, 문화, 상업, 종교의 중심지였던 에페수스가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이다. 지금도 당시의 꽤나 화려했던 도시의 면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인데 28년 전에 한 오스트리아 학자는 앞으로 전체 도시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35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발굴된 규모는 전체 중 10% 정도에 불과하니 ´에게해의 로마´라는 수식어가 괜한 얘기가 아님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에페수스에 살고 있었던 인구는 유동 인구(노예)를 포함해 20만 명. 현대의 웬만한 도시 못지않다. 도시는 더운 여름에도 해풍을 받아 시원하라고 부채살처럼 펴진 형태로 지어졌다.

남쪽 출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부채살 모양의 소형 극장이 눈에 띈다. 수용 인원 1,400명 규모의 원형 극장인 오데온. 오페라와 음악 공연을 했던 곳으로 실내극장이다. 바로 앞쪽으로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토론했던 아고라 광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2세기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를 받들어 지어진 하드리아누스 신전, 화려한 외관을 간직하고 있는 당시 최대의 도서관인 셀시우스 도서관, 로마 황제와 신들의 동상이 세워졌던 대리석 거리, 병원과 창녀촌, 공중화장실의 자취, 마지막 바다로 향하는 길 위로 장엄하게 서 있는 노천 대극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도시는 훌륭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과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 상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들. 많은 돈과 물건들이 이곳을 통해 서쪽으로 또는 동쪽으로 흘러 들어갔으니 이곳 시민들 또한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겠는가.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노천 대극장에서는 지금도 무대 아래에서 말하는 소리가 윗쪽 끝에서도 잘 들릴 정도로 당시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기독교 문화가 전파될 당시 사도 바울과 요한이 복음을 전파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음이 상심한 사람들은 창녀촌으로 오라´는 인류 최초의 광고판의 흔적이 지금도 대리석 바닥에 남아 있다. 

에페수스에서 가까운 곳에 두 개의 명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하나는 세계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초월해 성지순례의 대표적인 장소가 된 성모 마리아의 집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거대한 기둥이 127개나 되는 첫 번째 도시 건축 유적으로 현재는 주춧돌의 위치로만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건설시 이곳의 기둥을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성모마리아의 집은 로마 교황청이 1961년 공식적으로 성지임을 인정한 곳으로 성모마리아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조그만 교회와 세례를 주던 우물가 등이 남아있다. 방문객들의 소망이 적힌 하얀 종이들이 애처롭게 나부끼고 있다.  

 #다채로운 터키 관광: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덕분에 더욱 가까워진 터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문화, 역사적인 매력 등으로 조금씩 인기를 얻더니 이제는 지중해 여행의 중심국가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대표적인 지중해 상품이었던 이집트-그리스-터키 연계 상품 가운데 가장 먼저 단독 상품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만큼 터키에서 가볼 만한 곳은 많다. 앞서 소개했던 이스탄불과 에페수스 외에도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터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원형극장이 있는 페르가마, 하얀 석회수로 층층이 겹을 이룬 온천지역 파묵칼레, 중부의 기암괴석과 중세 기독교 순례 흔적을 볼 수 있는 카파도키아와 현대 터키의 상징인 수도 앙카라, 지중해변의 대표적인 휴양지 안탈야 등을 들 수 있다.

 #항공편: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터키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공동으로 주2회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터키항공은 오는 6월27일부터 9월10일까지는 주1회 증편, 매주 월, 목, 토요일 주3회 직항편을 운항할 예정이다. 지난 6월초부터는 대한항공도 합류했다. 전세기로 약 3개월간 매주 화, 금요일 주2회 직항편을 운항할 예정이다. 인천공항-이스탄불간의 비행시간은 약 10시간이다.

 #환전: 1YTL이 약 1,000원이다. YTL은 예니 터키쉬 리라(Yeni Turkish Lira)의 줄임말로 최근 새로 개혁한 화폐단위다. 기존 화폐는 TL(Turkish Lira)라고 부른다. TL은 미화 1달러가 약 100만TL로 세계에서 1달러당 화폐 단위가 가장 높아 화폐 개혁을 하게 됐지만 여행객 입장에서는 마음껏(?) 돈을 써볼 수 있었던 즐거움(?)을 잃게 됐다. 생각해 보라, 커피 한잔에 100만 리라 한 장을 내고 사 먹는 재미를. 터키에 가기 위해서 별도의 비자는 필요하지 않다.

 #여행시간: 카파도키아의 관문인 카이세리까지 항공편으로 1시간, 에페수스의 관문인 이즈밀까지는 약 50분, 남부 지중해 휴양지 안탈야는 약 1시간 정도 이동한다.

 #날씨: 터키 6~8월은 날씨가 건조하고 더워 썬크림과 썬글라스, 모자 등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덥다고 하지만 저녁에는 기온이 내려가기도 하므로 얇은 긴 남방이나 티셔츠도 1~2개 반드시 챙겨간다.

자료협조 = (주) 꿈꾸는 여행 www.nicetrip.co.kr  ,터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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