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 순천에서 만난 다섯 개의 ‘순’順

트래비기자     작성일제299호(2017.01) 댓글0건
 
말해서 무엇 하랴. 어지러운 시절이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차마 쉽게 믿을 수 없고, 들어보면, 그러나 믿지 않을 도리도 없다. 온통 엉망이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한참 동안 포털 사이트의 뉴스들을 보다가, 카톡으로 시국을 이야기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짐을 꾸렸다. 여행이 치유이고 처방이라면, 내가 가장 시급한 환자였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서 달래 줘야 하는가. 나는 순한 것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 목적지는 순천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다섯 개의 순順과 만났다. 
 

●첫 번째 만남  
순천(順天)의 순. 

순천을 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순한 하늘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늘이 순하다니, 나는 그것을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역’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순천 지역 곳곳마다 청동기 유적들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수백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하는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1,228m 백운산과 조계산이 있고, 600만톤의 물을 담고 있는 주암호와 상사호가 있는 도시.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두 팔로 감싸 안은 듯 은밀하고 온화한 바다, 순천만이 있는 도시. 여수를 지나 순천에 처음 닿았을 때, 나는 말했다. 여기 참 부드럽다. 무언가 따뜻하다. 벌써 마음이 위로된다. 오길 잘했다.
 
●두 번째 만남  
온순(溫順)의 순.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관광을 위한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정말 사람이 그대로 살고 있는 마을. 그 낮은 초가지붕들 아래 되도록 천천히 걸으며 오래된 시간들과 만나고 싶었다. 현대의 시간들을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가지붕 위에서 옛 방식 그대로 지붕을 고치고 있는 사람들. 마당에 널린 빨래와 서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표정. 순한 얼굴의 강아지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붉은 감들. 어디선가 까치의 울음소리들. 내가 살았던 집인 양 모든 집들에 눈길 주며 걷다가 마을 뒷편 언덕에 올랐다. 와. 마을이 다 내려다보인다. 마을이 아니라 둥근 빵들이 서로 기대며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서울과 대도시만 대한민국은 아니다. 아파트와 에스컬레이터와 첨탑만이 현대의 풍경은 아니다. 저기 그저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들의 마을을 보라. 누가 더 높지도 않고, 누가 더 넓지도 않다. 그런 것들이 좋아서 그곳에 오래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남도의 민요 한자락이 흘러나왔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의 노래. 누가 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달래며 부르는 노래. 앉아서 듣는다. 
 
 
●세 번째 만남  
귀순(歸順)의 순.

순천만에 닿으니 그곳은 이미 새들의 하늘이다. 귀순하듯 다시 모두 돌아온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새들만 1만5,000여 마리. 그곳에 사는 새들은 숫자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내가 갔을 때 개꿩, 민물도요 등이 왔었고, 한겨울 추위와 함께 흑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등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새의 군무에 따라 저절로 시선이 옮겨가거나, 가만히 앉아서 바다 위에 조용히 떠 있는 새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듯한 어린 중학생들과 칠순 잔치 겸 함께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줄지어 걷고, 그 위로 새들이 함께 또는 홀로, 그러나 하늘 가득 날고 있었다. 여기는 무엇이어서 새들이 알고 날아오는가. 순한 하늘이어서 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순천에 온 이유와 새들이 돌아온 이유는 같은 것. 혹여 철새로 와서 텃새로 머무는 새들도 있으려나. 그때 잠시 일었던 내 마음처럼.
 
 
●네 번째 만남  
순응(順應)의 순.

갈대를 바라보고 서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무엇인가에 순응하게 된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 쪽으로 서걱이며 눕고, 바람이 돌아가면 한참 후에 다시 일어나 마른 잎을 흔드는 그 갈대의 순응. 순천만 안쪽 530만 평방미터에 가득한 갈대들이, 북슬북슬한 씨앗 뭉치를 흔들며 한 번은 금빛으로, 한 번은 투명함으로 흔들리며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바람에 순응할 수 있는 것은, 이 갯벌 아래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 그러니 너도 삶에 깊이 뿌리 내린 후, 그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순응하라. 손님처럼 다녀가는 바람에게는 순응하고, 생의 근간을 침범하며 오는 밀물과 썰물에게는 저항하라.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곳에 내가 있었고, 530만 평방미터의 노을이 있었고, 넓디넓은 잎의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온통 은빛. 온통 샤샤샥 서걱임.
 
●다섯 번째 만남  
순서(順序)의 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 서울로 올라간다면 나는 무엇을 더 먼저하고, 무엇을 미룰 것인가. 순천의 순한 하늘 아래 걸으며 나는 나의 순서를 재배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여행 아니던가. 마음의 순서를 바꾸는 일. 휩쓸리는 일부터 하지 말고 잔잔한 일 먼저 하는 것. 밀리면서 가지 말고 단 한 걸음이어도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때론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서는 일. 가능하면 카톡보다 음성통화를 하고, 가능하면 가십 연예기사보다는 시집 한 권을, 가능하면 주말의 허비가 아니라 짧은 여행을. 1박 2일 동안의 순천은 내게 그렇게 알려 줬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하지 않는 것. 즉시의 쾌감보다 은근한 풍성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 온다고. 그것이 삶이라고. 삶의 순서라고.   
 
글 Travie writer 최성규  사진 트래비CB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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