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채지형의 여행유전자] 일기장에서 발견한 네잎 클로버

트래비기자     작성일제300호(2017.02) 댓글0건
 
모든 것은 유전자 탓이었다. 매일 일기를 끄적거리고 매달 기차표를 정리하고 매해 책을 만들고 있는 것이. 전에는 몰랐다. 아니, 수긍할 수 없었다. 나는 아빠든 엄마든 누구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달랐다.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살아 왔고 내 판단대로 행동했다. TV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나 <오! 마이 베이비>에서 부모와 아이의 닮은 얼굴을 보여 줄 때면 눈이 똥그래지기도 했다. 어쩜 그리 판박이인지.

나는 아빠와 달랐다. 티끌 하나 참지 못하는 아빠와 먼지가 수북이 쌓여도 아무렇지 않은 딸. 저녁에 라면을 드셔도 아침에 붓기 하나 없는 얼굴의 아빠와 물만 먹어도 허리사이즈가 늘어나는 딸. 약속 시간 1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 아빠와 헐레벌떡 달려서 겨우 시간 맞추는 딸. 어쩜 이리도 다른지.

물론 비슷한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했다. 별 생각 없이 “아빠, 보성에 가서 회 무침 한 그릇 먹고 올까?”, “영광에서 드라이브나 한 판 하고 올까?”라고 던지면, 0.1초 만에 “그래, 가자!”라는 화끈한 답이 돌아오곤 했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여름방학마다 어깨에 커다란 튜브를 끼고 바닷가로 향했다. 대학생이 된 오빠들은 가족여행보다 친구들과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때 아빠는 큰오빠에게 “막내를 생각해서라도 가족여행은 가야 하지 않겠니?”라고 설득했고, 며칠 후 우리는 마니산의 한 민박집에서 ‘곰발바닥, 소발바닥’을 외치며 놀았다. 돌아보면, 막내를 핑계로 아빠가 가족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부터 움직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퇴화한 근육 때문이었다. 설상가상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아빠는 함께하기로 한 제주여행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더 먼 곳으로 떠나셨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공간에 아빠가 함께 있는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여행 가자고 손을 내밀 것만 같았다. 

그의 흔적을 하나씩 더듬기 시작한 것은 100일이 훌쩍 흐른 후였다. 무심코 열어 본 아빠의 서랍장. 비슷한 크기의 노트들이 나란히 줄서 있었다. ‘참된 생활은 현재밖에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1950년대 일기장이었다. 노트 안에는 단기 4287년 4월25일 민중서관에서 발행된 사전의 흔적도 붙어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필사한 페이지, 매일 시간대별로 일정을 정리한 페이지, 하루의 감상을 적은 페이지까지 청년시절 아빠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간간이 네잎 클로버도 꽂혀 있었다. 글씨체는 달랐지만 어쩜 내 일기장과 그리도 흡사하던지.

한 장씩 슬슬 넘겨 보다, 한 페이지에 멈췄다. 내가 모르던 젊은 아빠의 투병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빠는 한쪽 폐가 없었다. 30대에 앓은 결핵 때문이었다. 일기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빠의 병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었다. 그저 힘드셨을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일기장에는 아픔의 고통이 세세히 기록돼 있었다. 만년필로 적힌 아빠의 하루하루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각하면 아내는 고마운 사람이다. 결혼 후, 피치 못할 큰일을 겪게 했으니 난 누구보다 그를 기쁘게 해줄 의무가 있다’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 육체의 고통,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막함이 다 들어 있는 아빠의 일기. 그 시간을 더듬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다음 일기장 속에서 무엇인가 툭하니 떨어졌다. 봉투였다. 그 안에는 2002년 6월24일 오후 8시 오타와 그린 푸드에서 드신 햄버거 영수증을 비롯해, 캐나다 여행에서 썼던 카드 영수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접혀 있던 A4 용지를 펼치니, 여행 일정과 여행지에서의 느낌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기록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고 내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아빠의 유전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세상에 무엇 하나 뿌리가 없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을 더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부모님과 함께하기로 한 겨울 제주여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제주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엄마와 둘만 떠나게 됐지만, 여행길에 아빠도 함께할 거라 믿고 있다.  www.traveldesign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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