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300자로 쓰는 백일장

트래비기자     작성일제300호(2017.02) 댓글0건
 
<트래비> 300호 특집 이벤트
300일장 : 300자로 쓰는 백일장
주제 白흰백
 
<트래비>가 300호를 맞이했습니다. 
꾹꾹 눌러 만든 300권의 여행 이야기. 
그 한 권 한 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300자 여행에세이 콘테스트를 열었습니다. 
많은 응모작 중 선별된 순도 높은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백치미白癡美
나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용기로 홀로 유럽을 갈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여행 중 가장 큰 이벤트는 ‘스카이다이빙’이었다. 안전요원과 함께 경비행기에 올라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 몸은 허공으로 던져졌다. 잔뜩 겁에 질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무언가 따가운 것이 내 볼에 닿았다. 눈 결정이었다. 누가 붙여 놓은 것같이 공중에 떠 있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다가 문득 뒤에 있는 안전요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Look! Snow! Snow white!” 안전요원은 웃으며 “Where?” 하며 물었고 나는 해맑게 “Here!”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내려온 후 눈 결정은 비가 되어 내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Snow white는 백설공주를 뜻한다고 한다.
오해인
 
그 도시의 하얀 구름 ⓒ김명범 | 기대와 달리 허전하기만 했던 시애틀 여행을 채워 준 것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쾌청한 구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얀 소원
하필, 그런 날이었다.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야 하는데 늦어 버렸다. 급하게 열차에 오르니 하얀 눈총이 쏟아졌다. 어두운 살결을 가진 이들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리아 난민들이었다. 복도부터 화장실까지 모든 공간이 이들로 가득 찼다. 열차는 얼마 가지 않아 멈췄고 난민이 아닌 사람은 내려야 했다. 몸집만 한 캐리어를 들고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다. 울상을 지으니 한 난민이 캐리어를 들어 넘겨주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뻗는 하얀 손바닥 위로 캐리어는 옮겨졌고 다행히 열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씩 웃는 그의 눈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이웃의 친절함이 묻어 있을 뿐. 고마운 이들을 위해 하얀 소원을 빌어 본다.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항상 웃을 수 있기를.
문지연
 

순백의 평원, 한라산
겨울 제주의 날씨는 유별나다. 전갱이떼처럼 뭉쳤다가 흩어지는 구름 탓에 몇 시간 뒤의 날씨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눈 덮인 한라산에 올라 보겠다고 없는 시간을 쪼개 제주까지 내려갔건만, 전날 아침부터 내려진 대설주의보 탓에 숙소에서 발이 꽁꽁 묶인 채 하루를 통째로 흘려보냈다. 이튿날 새벽 5시. 용케 통제가 풀렸고 부리나케 배낭을 꾸려 ?얼어붙은 1100도로를 달렸다. 어리목에서 시작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2시간여 올라 도착한 윗세오름. 선작지왓으로 향하면서 문득 눈꺼풀에 매달린 한 컷의 풍경이 하루 온종일 나를 옭아맸다. 눈밭을 헤치며 윗세족은오름 전망대로 오르던 사람들의 느릿한 발걸음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했는지. 순백의 풍경 속에 박제된 그날의 겨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전규일
 
눈부시게 하얀 산토리니 ⓒ서지훈 | 청량감을 주었던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마을의 오래된 성곽에 걸터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을 때 처음으로 내직업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상고대를 기다리며
고향이 부산인 나는 눈 구경을 많이 못해 눈이 오는 날이면 아무런 생각 없이 카메라를 들고 뛰어나간다. 오랫동안 설경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데 요즈음 나의 관심은 눈에서 상고대로 바뀌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가에 새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는 나무 사진을 볼 때마다 나의 앨범에 이런 사진을 추가하고 싶어진다. 여하튼 요즈음 나의 관심은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중기예보에 온통 빠져 있다. 그리고 조건만 맞는다고 판단되면 새벽에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그러나 나갈 때마다 항상 기상청의 예리한 오보에 찬사를 보내며 허탈한 기분으로 돌아온다. 왜 나가는 날마다 따뜻한 걸까? 그러나 포기는 아직 이르다고 스스로 달래며 또 카메라를 점검하고 있다. 상고대가 피고 안 피고는 오로지 하늘의 뜻이거늘. 인샬라!  
유병용 
 

순백(純白)의 유대
새벽 2시. 회사동료들과 태백산 일출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산 속, 하얀 별이 7명의 머리 위로 깜빡인다. 눈밭의 적막을 깨는 것은 내 거친 숨소리와 동료의 발소리뿐. 별 다른 말이 없어도 서로의 존재가 느껴진다. 한 발 한 발, 우리는 깊은 유대를 리드미컬하게 눈밭에 심으며 걸었다. 세상의 하얀 것들은 다 무언가의 바탕이 된다지.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훌륭한,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는 그 담백한 포옹. 설원 위, 새해의 경건한 풍경은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하얀 입김, 하얀 별과 우리의 하이파이브! 간밤의 고요했던 순백의 유대가 잠에서 깨어날 즈음, 붉은 해가 떠올랐다.
박세아
 

아이슬란드, 하얀 우주 속을 유영하다
아마 눈을 떠 다시 몸을 누이기 전 가장 고아한 행위이자 날것의 시간은 목욕하는 시간이 아닐까? 잠시 순하고 말랑한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시간, 발가벗은 발 한쪽을 들어 어쩌면 얼큰하기까지 한 목욕물에 발을 담근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가 있다. 누군가의 꿈이 녹은 듯 뽀얗고 달 것만 같은 블루라군의 우윳빛 목욕물은 아지랑이처럼 따끈하고 나른한 숨결을 피워 올린다. 게다가 순간 나를 안으며 흘러내리는 순백의 머드라니! 아, 가장 황홀한 사치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몸에 말캉하게 엉겨 오는 새하얀 진흙과 희고 곱다래진 얼굴로 목만 내민 채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 환히 번지는 은하수 같은 물결과 마음대로 놓인 화산석들. 따뜻한 숨소리들과 차가운 공기가 엉기듯 붙고 떼어진다.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하얀 우주다.
이한나
 
자작나무숲의 겨울 ⓒ강성일 | 자작나무숲은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조지 윈스턴 <디셈 December> 앨범의 커버사진이었다. 그 장면을 찾아 떠난 인제의 자작나무 숲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복기하는 여행이었다.
 

흰 머리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때로 선명하게 부각되어 보이곤 한다. 기약 없는 세계여행을 떠난 딸 얼굴 한 번 보자며 열흘짜리 패키지여행을 예약해 오신, 우리 부모님의 흰머리도 그랬다. 밥벌이라는 변명으로 애써 외면해 왔던 그 ‘白色’은 동유럽의 화려한 색채와 대비되어 더욱 극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보스니아의 투명한 푸른 빛 앞에서도, 프라하의 타오르는 붉은 빛 앞에서도, 난 자주 마음이 서걱서걱거렸다.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못 가게 말리지 않고, 참 대단하시네요.”
“말린다고 안 갈 애도 아니고요, 허허. 자식 이기는 부모 없죠.” 
그 말 한마디에 담긴 수많은 고민과 걱정의 무게를, 또 늘었을 흰 머리 몇 가닥을, 차마 헤아릴 수도 없어 난 또 그만 울컥해졌다.
심주용
 
雪레임 ⓒ조정현 | 3월에 내린 폭설. 출근길에 빨간 옷, 빨간 우산의 여자를 발견했다. 출근도 잊은 채 찍은 이 사진은 어느 공모전에서 입상도 했고,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다. 제목은 雪레임, 그렇게 내게 눈은 설렘이 되었다

하얀 수첩 
누군가 타이완 여행을 간다고 하면 나는 하얀 수첩을 꼭 챙기라고 말한다. 이미 ‘스탬프투어’로 유명한 타이완의 기차역과 관광지, 심지어는 기프트숍에서 만나게 되는 예쁜 기념스탬프들을 찍어 모으는 재미란!! 동화 같은 핑시선이 데려다 준 쓰펀에서는 소원을 적어 하늘로 띄운 천등의 낭만이, 대나무 형상의 101타워 전망대에서는 가족과 사랑, 우정의 소중함이 백지 위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저마다 모양도, 색깔도 다양한 스탬프가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지면 세계지도 한 구석에 내 발도장도 쿵하고 찍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 온 추억들은 사진첩 속에서 멋진 액세서리가 되어 다시 빛을 발한다. 새해, 리셋된 내 하얀 수첩 위에는 또 어떤 여행 이야기가 담겨질지 기대하며 지구본을 이리저리 굴려 본다.  
최민경

새하얀 밤의 절규 
내가 일 년 동안 머물렀던 그곳은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았다. 이케아에서 사온 검은색 커튼이 무색하게 햇빛은 자꾸만 방으로 흘러들었다. 노르웨이의 백야가 어둠 속에 숨은 나를 자꾸만 불러냈다. 한국에서 주어진 무거운 현실에서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멀고 먼 오슬로까지 왔다.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밤은 점점 새하얘졌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면 조금 잘 수 있을까. 부엌으로 나갔다. 보드카를 홀짝이고 있던 룸메이트가 안쓰럽게 물었다. 밤을 괴롭히고 있는 게 저 태양이냐고. 새벽 두 시에 그녀는 날 끌고 나왔다. 고요하지만 잠들지 않은 오슬로 시내를 하염없이 거닐다 사람들이 깨어날 때쯤 그곳에 도착했다. 뭉크미술관이었다. 버거웠던 내 젊음이 죽음의 그림 앞에서 비로소 사무치게 소중해졌다.
이민영 
 
 
300일장, 이렇게 심사했습니다. 
원고부문 | 주제인 ‘백白’의 의미를 잘 살리면서도 참신하고 유쾌한 원고를 선별했습니다. 
사진부문 | 원고부문에서는 안타깝게 탈락했지만 함께 보고 싶은 사진들은 따로 선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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