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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보낸 사흘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5.0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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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여행을 준비한 적이 있다. 헤밍웨이 흉내를 내 보고 싶었다. 그의 단골 술집이었다는 라 보네기타에 앉아 모히토를 잔뜩 마신 뒤 그처럼 취해 보고 싶었다(물론 가지 못했다). 케냐에도 가 보고 싶었다. 중국 펀드에 가입했다. 2년만 잘 굴리면 케냐로 한동안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펀드는 바닥을 탕탕 쳤다(그래서 케냐도 가지 못했다). 나는 자메이카가 아프리카인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야 카리브해에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온통 초록과 빨강일 것만 같은 자메이카에 가 보고 싶었지만 그곳도 결국 가지 못했다). 

하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만큼은 타고 싶다는 생각도, 타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도 숱한 젊은이들이 배낭을 둘러메고 올라탈 것이니. 하지만 쿠바도, 케냐도, 자메이카도 가 보지 못한 내가 얼떨결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탈 일이 생겨 버렸다. 러시아 예술인협회의 초청으로 바이칼 호수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김 작가님, 200달러 잘 챙겼죠?”
통역이 다시 물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아유, 농담 아니라니까요. 진짜예요. 빨리 주머니에 200달러 넣어 두세요.”

통역은 일행들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설 때마다 승객들은 매점에서 담배도 사고 보드카도 사고 빵도 산단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떠날 시간이 되면 안내방송도 없이 홀랑 출발을 하기 때문에 잠깐 어리바리하는 사이에 꼭 열차를 놓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거였다. 에이, 일행들은 통역의 말을 무시했다. 

“진짜라니까요. 열차를 놓치면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야 해요. 그리곤 다음 역으로 무조건 달리세요. 열차보다 빨리 가야 해요. 200달러면 돼요. 그러니까 주머니에 200달러 꼭 넣어 두셔야 해요.”
통역이 하도 잔소리를 해서 결국 10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꼬깃꼬깃 접어 청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4인 1실 객실의 문을 여는 순간 한숨이 삐져나왔다. 베트남 여행길에서 산 실크 침대시트를 가져간 참이었지만 그 더러운 침대 위에 내 곱디고운 실크 시트를 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치에 개어진 이불을 펼치면 십년은 묵은 먼지들이 다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무창은 너무 빡빡해 닫히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찬바람이 객실 안을 휘돌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그저 웃다가 “그냥 보르시치 수프나 먹고 다음 일을 생각하죠”라는 누군가의 말에 식당칸으로 옮겨 갔다.

역시나 보르시치 수프는 기가 막히게 맛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내가 순식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반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일층 침대에 자리 잡은 나는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실크 시트를 깐 다음 수건으로 돌돌 만 베개를 두 개 겹쳐 놓고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여름은 여름이어서 바람은 금세 익숙해졌다. 나는 누운 채로 두 발을 나무창틀 밖으로 내밀었다. 바람에 발가락이 간질간질했다. 책은 두 장도 읽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참말로 기분 좋은 단잠이었다. 먼지가 날릴까 걱정했던 일이 마치 전생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치의 이불을 당겨 덮었다. 포근했다. 옆 객실의 다섯 살짜리 꼬마가 자꾸 고개를 들이밀어서 성가셨지만 그래도 몇 번은 웃어 주었다. 졸다가 눈을 뜨면 백야였다. 밤 10시가 넘어도 캄캄해질 줄 모르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이 하얗게 빛났다. 이편 세상에서 저편 세상으로 혼자 건너뛴 듯한 기분이었다. 애인과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쩐지 이곳에선 무엇이건 고백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비밀이 저절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야릇한 밤이 세 번이나 지나갔다.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했다는 통역의 말을 들었을 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을 다 먹어 버린 열차가 희한하게도 애잔해 나는 내리기 싫었다. 이대로 모스크바까지 그냥 달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직 열차를 놓치지도 않았는데. 주머니 속 200달러는 그냥 남아 있는데.  
 
소설가 김서령
늘 외진 방에서 혼자 일하는 것에 익숙했다. 소설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행도 그런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혼자 걸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조금 걷다가 마주보고 웃고, 또 조금 더 걷다가 마주보고 농담 한마디 건네는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둘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느라 이번에도 마감을 훌쩍 넘기고 만 게으름뱅이 소설가다.   www.facebook.com/titatita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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