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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속도로 제주 여행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7.05.01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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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에 뭘 그리 많이 하고 싶었는지. 
많은 것들을 빠르게 해 내는 서울의 속도에 
너무 익숙해졌었나 보다. 
정신은 좀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한라산을 오른 사람들이 백록담을 바라보며 하나씩 쌓아 올렸을 돌멩이들

제주도 1박 2일 추천 코스
Day 1 | 공항→골막식당에서 아침식사→한라산 영실 코스 등반→협재 해변 석양 감상→어사촌 도야지에서 저녁식사 
Day 2 | 네거리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머체왓숲길 걷기→공항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는 산길
영실 코스의 주인공, 영실기암 위로 하얀 낮달이 떠 있다

●DAY 1 
한라산을 오르다
등산을 좋아하지만 한라산은 처음

왜, 사람마다 그런 것 있지 않나? 잘하지도 못하고 자주 하지도 않으면서, 나 그거 좋아해! 말하고 싶은 것. 할 줄 아는 음식은 몇 개 없지만 요리를 좋아한다든지, 올해 들어 1권도 못 읽었지만 독서를 좋아한다든지. 나의 경우엔 “등산을 하진 않지만 좋아해요”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때마다 아무도 믿어 주질 않아 서운했다. 정말인데. 나 등산 좋아하는데.

섬을 여행할 수 있는 1박 2일이 주어졌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등산을 좋아하지만 한라산은 한 번도 올라 보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제일 하고 싶은 건 예쁜 숙소에 틀어박혀서 몸에 이불을 둘둘 감고 누워 허리가 아플 때까지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자는 거였는데.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지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상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5년 전에 사 두고 세 번밖에 안 신어 새것 같은 등산화를 꺼내 챙겼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라산에는 5개의 등반 코스가 있다. 백록담 정상까지 올라가는 관음사 코스와 성판악 코스 그리고 해발 1,700m 윗세오름까지 올라가는 영실, 어리목, 돈내코 코스까지. 이름도 다들 참 ‘제주스럽게’ 곱다. “내가 관음사, 성판악, 돈내코, 영실까지 올라 봤는데 그중에서 영실이 가장 예뻐. 코스도 짧고.” 한라산을 5번이나 등반해 본 여행 동반자가 말했다. 그래, 영실이 답이다! 최근 몇 달 동안 운동이라곤 점심시간 청계천 산책밖에 하지 않았으므로 백록담은 엄두도 안 냈다. 영실의 목적지인 윗세오름에 도착하면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단 이야기도 솔깃했다. 산에서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런 생각과 함께 등반을 시작했다.

해발 1,700m까지 올라가는 코스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시작 지점에 1,280m라고 표시돼 있다. 후우, 다행이다. 아랫마을엔 이미 유채꽃, 벚꽃, 개나리가 활짝 폈는데 여긴 등반길 초입부터 미처 녹지 못한 겨울의 눈이 쌓여 있다. 같은 섬 안에서도 이토록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니 금세 영실 코스의 주인공, 영실기암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병풍바위라고도 불리고 오백장군, 오백나한이라고도 불린다. 바위와 맞닿은 하늘이 더 없이 푸르렀다. 문자 그대로 구름 한 점이 없다. 새파란 하늘에 떠 있는 건 하얀 낮달 뿐. 날씨가 변덕스러운 한라산에서 맑은 하늘을 만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던데, 운이 좋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산신령에게 올린 기도의 효험이 있었던 걸까.

영실은 짧은 코스지만 등산로와 풍경이 다양해 재미있다. 돌과 흙이 있는 완만한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가파른 나무 계단을 한참 오르다가,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하는 현무암 돌밭을 지나니 갑자기 넓은 평지가 펼쳐졌다. 그러는 동안 영실기암을 보았고, 먼 곳의 오름들을 보았고, 하얗게 고사하였지만 왠지 멋진 구상나무 군락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빛 평지 저편에 우뚝 솟은 백록담 남벽을 보았다. 평화. 그 풍경은 ‘평화’라는 두 글자로 설명이 되었다.

눈은 호강했지만 높이 올라오니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도 강해져,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연신 콧물이 났다. 그때 윗세오름 매점이 보였다. 저기다! 컵라면을 판다는 그곳. 온기라곤 없는 매점 의자에 앉아 먹는 따끈따끈한 국물과 야들야들한 면이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아무 말 없이 콧물만 훌쩍이며 한 컵을 비웠다.

하산하는 길, 양쪽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목을 삐끗한 것도 같았다. 원래 계획은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협재 해변에 가서 석양을 본 다음, 미리 알아 둔 애월의 흑돼지 구이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서귀포 천문과학관에서 별을 감상하는 거였는데. 다 틀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정보다 하산 시간이 늦어져 부지런히 가도 협재 해변의 석양은 놓칠 것 같고, 하필 천문과학관은 오늘이 휴관이란다. 그래도 흑돼지 구이는 꿀맛이었다. 긴 꿀잠을 잤다.
 
길게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먼 곳의 오름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백록담을 만나기 직전,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하는 돌길을 지나야 한다
 
영실코스의 끝에는 이렇게 드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산 위의 평야
 
한라산 영실 코스
찾아가기: 영실휴게소(제주 서귀포시 영실로 246) 주차장에 차를 대고 윗세오름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온다.
소요시간: 쉬엄쉬엄 가면 왕복 4~5시간
인포: 따뜻한 봄날이어도 한라산에선 추울 수 있으니 여벌 옷을 챙겨 갈 것.
가격: 윗세오름 매점 컵라면 1,500원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머체왓숲길엔 사람이 많지 않다
숲길에서 마주친 사람 얼굴 모양 돌
‘하원마을’의 어느 작은 집. 귤나무와 돌담이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 예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구름 낀 하늘 때문에 석양은 볼 수 없었지만, 협재 해변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DAY 2 
숲길을 걷다 말고 바다를 보다 말고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했다

안 하던 것을 하면 병이 난다. 분명 많이 잤는데도 온몸이 욱신욱신 천근만근이다. 드라마 보다 울고 잔 것도 아닌데 쌍꺼풀이 사라질 정도로 퉁퉁 부을 건 또 뭐람.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몰골은 처참하다. 오늘은 국장님이 꼭 가 보라고 추천해 준 ‘머체왓숲길’을 걷기로 했는데…, 아….
유명한 맛 칼럼니스트들이 추천한 갈치요리 전문 식당에서 배를 채우니 기운이 좀 난다. 계획대로 머체왓숲길을 가 보기로 했다. 날씨는 이틀 연속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다. 달리는 차의 창문을 내리고 창밖으로 손을 조금 내밀어 봤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도 해 봤다, 날개처럼. 제주 바람의 촉감이 사랑스럽다.

‘머체왓’은 제주 방언으로 ‘돌밭’이라는 뜻이다. 그 일대가 머체(돌)로 이뤄진 밭(왓)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숲길이어선지 주차장에 차도 몇 대 없고 몹시 조용하다. 휴대전화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흥얼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으니까, 들썩들썩 우스꽝스런 어깨춤도 췄다. 이유 없이 배실배실 웃기도 했다. 가끔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바보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한결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화창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거의 다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숲길엔 편백나무들이 빽빽했다. 모든 것이 신기한 초등학생이 된 듯, 큼직한 고사리 이파리며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뿌리를 잘못 내린 작은 나무,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간 담쟁이 식물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제주까지 와서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대론 안 돼!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숲길을 되돌아 나와 어제 못 본 협재 해변의 석양을 보겠다며 차를 달렸다. 가까스로 해변에 도착했는데, 아까까진 없던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결국 석양은 보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바다를 보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10분 뒤 다시 차를 타고 부지런히 공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꼭 가 보고 싶은 카페와 공방도 있었는데, 근처에도 못 갔다. 숲길을 걷다 말고, 바다를 보다 말고. 고작 1박 2일에 뭘 그리 많이 하고 싶었는지. 그동안 많은 것들을 빠르게 해 내는 서울의 속도에 너무 익숙해졌었나 보다. 다음번 제주 여행은 제주의 속도로 해 보기로 마음을 먹어 본다. 하지만 이 정신 없었던 이틀 역시 행복하고 소중한 여행이었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머체왓숲길
주소: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소요시간: 6.7km 코스, 2시간 30분
 
●제주도 1박 2일 여행
 
골막식당 ‘골막국수’
노중훈 여행작가의 책 <식당 골라주는 남자>에서 보고 찾아간 집이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렌터카를 빌려 한라산으로 가기 전에 들렀다. 고기국수인데도 국물 맛이 전혀 무겁거나 느끼하지 않고 깔끔하다. 돼지 사골 육수에 멸치 육수를 섞는다는데, 그래서인가 보다. 면은 우동면과 소면의 중간 정도로 통통하다. 두툼하게 막 썬 듯한 고기도 푸짐하게 넣어 준다.
주소: 제주 제주시 천수로 12
전화: 064 753 6949  
가격: 골막국수 6,000원
 
 
어사촌 도야지 ‘흑돼지 오겹살’
제주도민들의 로컬 맛집 목록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블로그를 보고 찾아갔다. 칼집을 낸 두툼한 오겹살은 탱글탱글, 싱싱하다. 뜨겁게 달궈진 숯불 위에 올리니 그 두툼한 오겹살이 금방 익었다. 파절이와 쌈채소, 밑반찬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나왔지만, 사실 고기 자체가 맛있으니 다른 것을 곁들일 필요가 없었다. 협재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주소: 제주 제주시 애월읍 천덕로 440-6  
전화: 064 799 5559
가격: 오겹살 1인분 180g 1만7,000원
 
 
네거리식당 ‘갈치국·갈치구이’
이름난 맛 칼럼니스트들이 이 식당의 갈치국을 추천하는 글을 여러 번 본 터라 호기심이 생겼다. 갈치로 끓인 맑은 국이라니, 비릴 것 같은데 다들 맛있다고 그렇게 칭찬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진짜, 비린 맛이나 냄새는 전혀 없이 칼칼한 감칠맛이 났다. 육지에선 은갈치가 그렇게 귀하다는데, 안 먹었으면 서운할 뻔했다. 국도 맛있고 구이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서문로 29번길 20  
전화: 064 762 5513
가격: 갈치국 1만5,000원, 갈치구이 2만5,000원
 
 
글·사진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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