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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최북단에서 온 시그널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7.05.0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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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가봐야 했다. 최남단 마라도, 최동단 독도에 
가보고 싶은 것과 같은 이유다. 
북위 37도 52분, 10km만 가면 북한 땅이다. 
여기는 남한 최북단의 섬, 백령도다. 
 

백령도 1박 2일 추천 코스
Day 1 | 심청각 → 하늬 해변 → 천안함 위령비 → 두무진 유람선 여행 → 두무비경길
Day 2 | 등대 해안 → 사곶 해안 → 백령도 담수호 → 콩돌해안 → 중화동
 
백령도 천안함위령탑의 전망대. 남한보다 북한이, 한국보다 중국이 가까운 섬의 운명은 고요하지 않다
 
 
오래전, 이 땅의 끝을 밟아 봐야 한다며 해남 땅끝마을에 함께 가자 했던 그는 얼마 후 백령도의 군인이 되었다. 국토의 서쪽 끝에 불시착한 그의 시그널은 점점 가물거리더니 맥없이 끊어져 버렸다. 백령도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은 그때부터였다. 한 번은 가 봐야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섬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아침 7시 50분에 출항하는 하모니플라워호를 타야 했다.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 첫차. 정성을 들여야 하는 여정이 힘들어도 싫지는 않았다. 조금 흐렸지만 기상 순조. 배는 정시에 출발했다. 선내 매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후미로 나갔다. 연안부두의 풍경은 인천대교의 실루엣을 끝으로 금세 사라져 버렸고, 540여 명을 실은 2,100톤급 배에게는 이제 한 가지 일만 남았다. 앞으로 4시간. 바다를 밀고 227km를 북서쪽으로 나아간다.
 
해무가 가득한 사곶 해변
고봉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사자바위
등대해안에서는 해식동굴뿐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돌을 볼 수 있다.
물이 빠진 등대해안에서 어리굴을 따는 섬 주민
 

●안개 너머에서 발견한 것

배는 소청도, 대청도를 거쳐, 드디어 대한민국 서북단의 섬 백령도에 도착했다. 하선객들의 절반은 온갖 형태의 꾸러미를 챙겨 내리는 도서민들 반, 돌아와 좋은지 싫은지 표정으로는 알 수 없는 군인들과 등산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들이 반이다. 

도착은 잘 했으나 첫걸음부터 차질이 생겼다. 악명 높은 백령도의 안개 때문이었다. 백령도 여행의 첫 코스로 예정되어 있던 두무진 유람이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니 어느 곳도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틀렸다. 안개가 자욱해서 더 특별해진 곳, 사곶 해변(천연기념물 391호)으로 갔다. 원래 사곶 해변은 석영 성분이 많아 단단한 규조토가 3km 이상 펼쳐진 곳으로 유명하다.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을 정도로 모래가 촘촘하고 단단해서 천연비행장으로도 사용했었다. 하긴 이미 모래사장 한가운데로 차를 끌고 들어온 참이다.

단단한 모래보다 신기한 것은 그곳에도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가리비를 채집하는 노인의 실루엣이 멀리 해무 속에서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했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구분되지 않는 아득한 시공간에서 기억도 함께 명멸하고 있었다. 그도 한때는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며 희미한 시그널을 보내곤 하지 않았을까? 

어둡고 희미할 때 필요한 것은 등대다. 사곶 해변 동쪽. 포구를 끼고 솟아오른 용기원산의 정상에는 등대가 하나 있었다. 1960년대까지 사용하다 지금은 전망대가 들어섰다. 올라가면 북한 장산곶까지 훤히 보이고, 그 사이 어딘가에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가 있다고도 했다. 궁금했지만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산책로를 따라 작은 언덕을 넘어야 접근할 수 있는 등대 해안에는 해식절벽과 해식동굴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해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만으로 반해서 기념사진이 급해지지만 멈춰 서면 안 된다. 더 긴 동선으로 해변을 누비다 보면 더 많은 해식동굴들을 만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바위마다 품고 있는 색다른 무늬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바위의 지문이자 시간의 나이테다. 

해안가에서는 밀물 때가 되면 바다의 속살이 더 두드러지는데 이럴 때 바빠지는 이들이 섬의 아낙들이다. 너럭바위에서 금방 따낸 굴은 짭조롬하면서도 고소했다. 시원한 소주를 곁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백령도의 냉면
마라도에 자장면이 있다면 백령도에는 냉면이 있다.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두고 고민했지만 정작 추천 메뉴는 메뉴판에도 없는 ‘반반’이었다. 비빔냉면에 육수를 더 자작하게 부은 것인데, 과연 매콤하면서도 촉촉하다. 주문이 올 때마다 직접 기계에서 뽑아 삶아 내는 메밀국수가 이 집의 자랑. 사료 대신 군부대에서 나오는 짬밥을 먹여 키웠다는 돼지고기 수육도 담백 쫄깃하다. 
 

사곶냉면
전화: 032 836 0559
가격: 냉면 6,000원, 수육 8,000원
 
백령도의 백미 두무진 풍경. 벼량 끝은 앉은 가마우지에겐 이곳이 천국이다 
암주 위에는 두무비경길이 있다. 이름 그대로다
 

●모래에서 태어난 비경

아침이 밝았지만 섬은 여전히 반만 잠에서 깨어났다. 안개 장막이 여전히 걷히지 않아 인천에서 떠야 할 배가 2시간째 대기 중이라고 했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도 두무진* 유람이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달려가자 시야가 훨씬 밝아졌다. 섬살이의 희비는 온통 출항 여부에 달린 듯하다. 배가 뜨자, 기분도 둥실 떠올랐다. 

두무진(頭武津)(명승 제8호)은 백령도 서쪽 해안선의 담회색 기암절벽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지금까지는 풍화작용만 이야기했지만 그 반대의 상상력도 필요하다. 신기하게도 수평에 가까운 규암층을 유지하고 있는 두무진의 암주들은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사암이 땅속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규암으로 변성된 후 다시 떠오른 것이다. 5~10억년 전 원생대의 이야기다.
 
절벽과 암주 사이마다 숨어 있는 작은 해변들은 때때로 불청객들이 발을 들여놓는 비밀의 문 역할을 한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해적이 침입하기도 했고, 선교사가 상륙하기도 했었기에 지금도 감시가 삼엄하다. 그러나 통제하고 금지만 하던 시절은 옛말이다. 데크 계단을 잘 정비한 두무비경길은 초소를 넘어 저 아래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다. 50여 미터나 되는 절벽을 따라 오르내리는 길은 아찔하고 수고롭지만 그 가치는 내려가 본 이만 알 수 있다. 왜 이곳이 비경길인지를. 이럴 때 새들이 가장 부럽다. 느긋하게 날개를 말리고 있는 가마우지들에게 이보다 좋은 서식지가 또 있을까. 원래 백령도라는 이름도 새와 관련이 있다. 예부터 따오기(鵠)가 많이 살았는지 곡도(鵠島)라고 불리다가, 고려 때부터는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모습이라고 하여 백령도로 부르기 시작했다.

*두무진 | 기암절벽이 4km 이상 이어지는 백령도 최고의 명승지. 투구를 쓴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 같다고 하며 두무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 광해군 때 백령도로 귀향 온 이대기가 <백령도지>를 쓰면서 두무진을 두고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무비경길이 시작되고 유람선이 출발하는 사항포 포구
하모니플라워호의 프리미엄석
현무암으로 뒤덮인 하늬 해변 앞바다에는 잔점박이 물범이 살고 있다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의 얼굴들
 
 
 
●아쉬움을 주섬주섬 

인천에서 늦게 출발한 배가 빠른 속도로 백령도에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아쉽게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두무진만큼 유명한 콩돌 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해변 전체가 5cm 이내의 잔자갈로 채워져 있는 곳이다. 바람의 연금술이 얼마나 위대한지 콩돌해안의 자갈들은 외부 반입이 금지된 백령도의 귀한 재산이 되었단다. 진촌리에 있다는, 이름도 어려운 ‘감람암포획 현무암 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도 궁금하다. 일반적으로는 채취가 불가능한 맨틀 물질인 녹황색의 감람암 암편들이 화산작용으로 현무암에 포획된 채 바닷가에 올라와 노출되어 있단다. 지구의 속살인 셈이다. 그 옆에 있는 하늬 해변의 앞 바다에는 잔점박이 물범(천연기념물 제331호)이 사는 바위가 있다는데 내가 본 것은 고작 북한 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된 사나운 용치들뿐이었다. 이렇게 아쉬움이 많으니 다시 돌아오게 되지 않겠는가. 

백령도를 여행한 날은 3월 말, 천안함 사건 7주년의 하루 전날이었다. 천안함 위령탑 앞에서 참배하러 온 한 무리의 군인들을 만났었다. 다음날 백령도에는 군 장병들을 위한 의미 있는 이벤트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었다. 집이 멀어서, 형편이 어려워서 혹은 그 어떤 이유로든 찾아올 가족이 없거나 찾아갈 수 없는 장병들을 위한 자리라고 했다. 하루 더 머물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비로소 그가 있던 동안 이 섬에 한 번도 오지 못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아직 지독히도 비겁하다. 모든 아픈 이별에 대하여.  

▶반값에 즐기는 프리미엄석의 호사 
하모니플라워호가 여객선 중 국내 최초로 지난 3월에 도입했다는 프리미엄 좌석의 편안함은 기대 이상이었다. 컵홀더엔 커피를, USB 단자엔 핸드폰을 꽂아 놓고, 버튼을 하나 누르니 의자는 저절로 ‘주인님 주무십시오’ 모드가 된다.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의 호사를 단돈 몇만원에 여기에서 누릴 줄이야. 새벽잠을 설친 몸도 재충전 모드로 자동 전환됐다. 4시간이 짧기만 하다. 울릉심청수 청아라 한 병도 제공한다. 올해 말까지는 ‘서해 5도 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방문하는 타 지역민(인천 시민, 도서민 제외)들을 위해 왕복운임을 50% 할인해 주고 있으니 곁불 쬐듯 덕을 봐도 좋겠다. 연 3회까지 적용된다. 

에이치해운 하모니플라워호
출발시간: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출발 매일 07:50, 백령도 용기포신항 출발 매일 12:50
요금: 성인 왕복(정상가 기준) 일반석 13만3,000원, 프리미엄석 18만5,000원
전화: 1644 4410  
홈페이지: www.hferry.co.kr 
 
 
글·사진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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