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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의 트렌드 리포트] 어쩌면 최첨단인 아날로그 여행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5.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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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메뉴를 고르느라 매번 고민에 빠지는 여느 직장인과 달리 날씨가 더울 때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늘 점심도 평양냉면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평양냉면’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평양에서 먹어보지도 못했고, 평양에서 맛보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으니, 정말 평양에 평양냉면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서울에서는 ‘평양식’을 내건 냉면을 언제든 맛볼 수 있으니까. 평양냉면을 언제 어디서든 맘껏 먹을 수 있는 곳, 우리나라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외국에서 거주하거나 해외여행 중에는 평양냉면을 맛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한식당이 없을뿐더러 한식당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살았던 필자는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 자동차로 10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보스턴에서 워싱턴 D.C.까지 간 적도 있다. 그러니 외국에서 평양냉면을 맛보기란 얼마나 힘든지, 더불어 필자의 평양냉면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냉면의 맛을 알게 된 것은 10년 전 어느 날부터다. 여행을 좋아하는 대학교 선배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한국을 떠나 오랜 기간 해외여행 중이던 선배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한 이에게서 온 메일이라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림이 첨부되어 있던 이메일 내용은 대략 이랬다. 

‘지난 1년 넘은 여행을 잠시 멈추고, 러시아 서쪽 끝에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와서 배를 타고 속초로 들어왔다. 내일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간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기 전에 냉면부터 한 그릇 먹고 싶으니 시간이 되면 일요일 저녁에 논현동에 있는 평양냉면 집으로 와라. 첨부한 그림은 상트페르부르크에서 본 건데 오랫동안 여행한 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집 문을 못 열고 어색해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반겨주는 장면이다.’

메일을 읽으면서 선배의 말이 긴가민가했다. 오랜 기간 무소식이던 선배가 뜬금없이 연락을 해서는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했으니 말이다. 혹여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어 냉면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혹시, 지금 거기 오랫동안 샤워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남자 손님이 한 명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가 “네, 한 분 계세요. 밖에서 계속 담배 피우시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시네요”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논현동 냉면집으로 갔다.

그때 처음 평양냉면을 맛보았다. 메밀가루를 넣은 반죽으로 면을 뽑아 차가운 고기 육수에 말아 나온 평양냉면을 먹은 첫 느낌은 콕 짚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밍밍하면서도 오묘한 맛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묘하게도 그 맛이 자꾸 떠올라 평양냉면집으로 발걸음을 하게 되었고, 결국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종종 평양냉면을 찾게 되었다. 그날 나는 평양냉면의 오묘한 육수 맛과 부드러운 면발을 혀끝으로 느끼며 선배가 경험한 장기간의 배낭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유랑한 선배의 말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여유, 때로는 고독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만날 가족을 생각하는 선배의 눈빛에서 설렘과 행복을 보았다.

냉면 마니아는 냉면을 먹을 때 면발을 가위로 자르지 않고 이로 잘라 먹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다고 한다. 냉면의 면발을 가위로 자를 경우 열이 발생하여 차가운 냉면 고유의 맛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평양에서 유래한 냉면을 굳이 잘라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뜻 깊은 고뇌가 숨어 있다고 한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평양냉면을 먹을 때면 그때 선배의 스토리를 들으며 느꼈던 여행의 사랑과 그리움, 행복감, 그리고 반가움의 감정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앞으로 평양냉면을 먹을 때면 늘 함께할 듯하다.

그렇다.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머신러닝, 인공지능 등 디지털 경제의 기술혁신이 화두고,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여행만큼은 그 어떤 첨단 기술이나 화려한 통계 수치보다도 아날로그적인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날로그적 여행이 언젠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상현
에어비앤비 정책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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