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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여행유전자] 여행의 완성은 컬렉션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8.01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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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딩~뎅~’
이곳은 스리랑카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반얀 캠프.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다 찾은 소리의 근원지는 숙소 앞 나무였다. 나무에 종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바람 크기에 맞춰 종소리가 커졌다 줄었다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종소리 위로 아빠 얼굴이 스르르 떠올랐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빠 손에 종이 하나씩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종은 아빠의 여행을 추억하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종은 여행 기념품 중에는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했다. 없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아빠는 여행하다 종을 발견하면, 갖고 싶던 곰돌이 인형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스위스에서도 그랬다. 초록 융단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은 목에 종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앙증맞은 에델바이스를 촘촘하게 수놓은 천에 달린 종을 기념품 가게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집에 와서는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리에 종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오사카 여행 컬렉션으로 가져온 벚꽃 모양의 종은 현관 열쇠고리에 달아 놓고 항상 지니고 계셨다. 중국 여행에서 사 온 종의 자리는 여행 가방이었다. 여행 가방에 달린 종은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귀여운 소리를 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의 여행 컬렉션은 배지였다. 해외 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아빠의 여행 반경은 주로 국내였고, 당시 국내 여행 기념품으로는 배지가 인기였다. 설악산 국립공원, 내장산 국립공원 등 곳곳에서 모아 온 배지가 한가득이었다. 등산 모자에 그 배지를 꼽아 놓았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배지들 때문에 모자가 묵직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내가 배지로 장식한 아빠 모자를 자랑하려고 소풍 때 쓰고 갔다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개울가에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 모자가 날아가 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다행히 아빠는 별말씀 안하셨지만, 내 마음엔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여행하면서 특이한 것을 모으기 좋아하는 나의 성향은 아빠를 똑 닮았다. 세계일주를 하고 1년 만에 돌아오던 날이 기억난다. 빵빵한 내 여행 가방을 열어 본 엄마는 가방 속 빈 병을 보며 뭐냐고 물으셨다. 안에는 1960년대 코카콜라 병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세상에나, 이제는 쓰레기까지 들고 오는구나” 하며 한숨을 쉬셨다. 

여행하는 동안 꾸준히 뭔가를 모아 왔다. 필리핀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에서 담아 온 흰 모래며 녹슨 코로나 맥주 뚜껑, 베트남 어느 시골 꼬마가 풀잎으로 만들어 준 메뚜기까지. 누군가의 눈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이겠지만 그 속에는 여행 중 짜릿했던 순간과 행복했던 추억들이 작은 상자에 담긴 보물처럼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여행의 추억을 호출해 주는 사소한 컬렉션은 소중했다. 가장 열을 내며 모으는 것은 인형이다. 인형들은 여행하며 만났던 ‘그 사람들’을 닮았다. 인형들이 입고 있는 옷은 추억이 담긴 곳의 사람들이 입는 그 옷이고, 인형이 쓰고 있는 모자는 그들이 길거리에서 흔히 쓰고 다니던 모자였다. 인형은 여행했던 곳의 사람들을 압축적으로 보게 해 줬고, 한눈에 간파할 수 있게 해 줬다.

아빠는 인형을 모으는 딸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지하셨다. 돌아보니, 아빠와 나는 종목만 달랐지 성향은 같았다. 소소한 것 모으기를 좋아하는,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아빠의 컬렉션 유전자를 이어받아 더 많은 것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심플 라이프를 외쳐도, 아무리 ‘버려야 산다’ 해도, 여행에서 데려온 친구들은 내칠 수 없었다. 이미 세계의 인형들로 좁은 집이 더 좁아지고 있지만, 오늘도 스리랑카 사람들을 닮은 인형을 가방에 차곡차곡 챙기고 있다.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인도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남인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파키스탄을 거쳐 몰디브, 스리랑카를 함께 여행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www.traveldesign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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