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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지금 이 순간은 일상일까, 여행일까

  • Editor. 김예지
  • 입력 2017.10.12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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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있는 내내 헛갈렸다.
지금 우리는 과연 여행 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가,
일상 같은 여행을 하고 있는가.
그 와중에도 이 모든 것들을 실은 배는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이다. 그중에서도 바다다. 자연씨를 처음 알게 된 건 ‘나는 크루즈 승무원입니다’라는 제목의 브런치 포스트를 통해서였다. 선상에서 겪은 일들을 솔직담백하게 담은 기록들이 한창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을 때였다. 자연씨를 직접 만난 건 8할이 타이밍이다. 그녀가 잠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주 우연히도 연이 닿았다. 새초롬한 이미지,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어렴풋이 가졌던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수줍고도 수수했다. ‘자연’스러웠다.
 
1 딸기 한 봉지 들고 리스본 산책 2 하루를 정리하는 업무. 이것만 하면 끝! 3 세계 각국에서 온 동료, 손님들과 함께
 
 
가볍고도 무거운 사람

첫 느낌이 그런 대로 맞았다. 알면 알수록 그녀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에 가까웠다. 집에도 차에도, 명품 같은 것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고 했다. “평소 단출한 편이에요.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신용카드도 없이 체크카드만 쓰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웃음).” 배 위의 생활에서 체득한 습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크루즈 안에서 지내는 방이 넓지도 않은데다, 타고 내리고를 반복하니 짐을 많이 가져갈 수도 없어요. 집도 차도 그리 필요가 없고요.” 여행도 가볍게 다니는 편이다. “정말로 쓸 것만 골라 가져가려 노력해요. 사는 데 필요한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좋아요.”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녀를 미니멀리스트라 할 수 없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아 배우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한 가득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음식과 스페인어가 좋아 5년간의 크루즈 생활을 접고 훌쩍 멕시코로 떠났다. 그리고 약 4개월간 그곳에 머무르며 <나는 크루즈 승무원입니다> 책을 펴냈다. 인터뷰 당시 그녀는 곧 몇 주 뒤면 또다시 멕시코로 간다고 했다. 한동안 맘껏 먹고 여행하고 공부할 거라 했다. 조금 먼 미래로는 크루즈에 대한 책을, 그것도 영어로 쓰는 것이 목표란다. 승무원이라는 직업보다는 크루즈 ‘여행’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고 했다. 차분하지만 대담하고, 욕심이 없지만 야망이 충만한 사람이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으로 화제를 이어 가야 했다. 크루즈와 바다, 희망이나 꿈, 여행 정도였다.    
 
볕 아래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자연씨의 꿈은 원래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늘 여행하는 삶을 동경했던 당시 그녀의 머릿속에는 비행기를 타는 것만이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몇 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죠. 그러고는 비행기가 아닌 다른 수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크루즈였다. 미국 마이애미에 본사를 둔 로얄캐리비안의 채용 공고를 접했고, 그제야 제자리를 만난 듯 지원부터 합격까지 술술 진행이 됐다. “항공사 승무원과 호텔리어를 합쳐 놓은 일이랄까요.” 크루즈 승무원이 항공사 승무원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냐고 하자 그녀는 말했다. “비행기보다 호흡이 길어요. 짧게는 5일, 길게는 1달 넘게 게스트와 함께 생활하니까요. 일터가 곧 집이 된다는 것도 크루즈만이 가진 특징이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비행기보다는 크루즈가 여행에 더 가깝다는 개인적인 견해도 빼놓지 않았다. “크루즈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여정이니까요.”  

그녀가 맡은 직무는 컨시어지(Concierge)였다. VIP 승객 전용 라운지의 모든 것들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체크하고, 승객이 승선하는 순간부터 하선할 때까지 그들과 소통하며 돕는 일이다. 크루즈에서 일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돌아오는 반응들은 대개 비슷했다. ‘자유로워 좋겠다’, ‘매일 여행하니 좋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연씨가 그동안 들른 기항지만 37개국 70여 개에 달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른 도시에 닿는다는 사실은 아직도 설레요. 전 세계에서 모인 동료, 손님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그래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짧게는 6주 길게는 2달 정도 한 번에 휴가가 주어지긴 하지만, 5~6개월의 컨트랙트(contract) 기간 동안에는 휴일이 없고 24시간 호출 대비 상태다. 룸메이트와 함께 쓰는 방은 좁고 창문이 없으며, 매 번 비슷한 식사 메뉴에 한국 밥처럼 찰기 있는 밥은 기대하기 힘들다.
 
와이파이 환경이 원활하지 않아 연락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가족과 친구들을 잘 챙기지 못할 뿐더러 연애도 어렵다. 양호한 컨디션을 늘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승무원에게 과도한 음주는 철저히 제한되다 보니, 어쩌다 한 번 맘 놓고 술을 마실 수도 없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를 두고 자연씨는 ‘호화로운 감옥’이라 표현했다. “크루의 하루는 생각보다 수동적이에요. 그날그날 짜인 일정을 소화하고 매번 차려진 식사를 먹는 거죠. ‘사육당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자유라는 개념이 그녀에게서 가장 멀찍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땅 위에서의 일상이 그리웠어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나무 사이 지저귀는 새 소리, 직접 장을 봐서 내 손으로 해 먹는 밥, 티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사복. 누구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들이 그녀에겐 절실했을 법도 하다. “한 번 확 놀아 보고 싶어요!” 그래서였는지 자연씨는 정말 놀고 있다. 작년 7월 휴직 이후, 잠정적인 휴식기에 돌입했단다. 이때만 해도 서울, 지금 현재 그녀는 멕시코 케레타로(Queretaro)에 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베트남 해변에서
기항지마다 사 모은 기념품들. 건축물, 종, 인형은 각자 끼리끼리
 
 
여행하고 있지만 여행하고 싶다

“여행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답보다는 동조가 목적인 질문이었다. 실은 답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여행이 곧 일이 되어 버린 나와 자연씨 사이에는 분명 교집합이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행하고 있지만 여행하고 싶어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공감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냉장고 문은 빈틈이 없을 것이다. 지금껏 가 본 도시마다 하나하나 자석을 사 모았다니. “그동안은 뷔페 같은 여행을 했다고 할까요. 다양한 곳에 발 도장을 많이 찍는 것도 좋지만, 이젠 한곳에 정착해 ‘깊은’ 여행을 하고 싶어요.” 항상 시간이 아쉬웠다. 기항지에서 주어지는 시간은 길어야 반나절 정도라 명소 하나를 둘러보고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에 여유롭게 꼭 다시 와 봐야지’ 하고 기약하면서 다시 되돌아가곤 했죠.” 드디어 왔다.
 
늘 받기만 하던 단골 질문을 던질 완벽한 타이밍. “그래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몇 초의 고민 후 자연씨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말했다. “그전에 북유럽을 주로 가서인지, 늘 접하던 아기자기한 요소들과 대조되는 웅장함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때는 오후 5시쯤 나가서 밤을 보냈으니, 다음번엔 낮 시간을 경험해 보고 싶어요.” 여행을 하고 있지만 여행이 하고 싶다.

그러니까 자연씨(혹은 우리)는 뭔가 거창한 관광이 아닌 소소한 여행을 희망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는, 일상 같은 여행을. “한국에 올 때마다 오히려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버스를 타도 마음이 들뜨고, 무작정 걷는 것도 신나요.” 이날, 어쩌면 여행과 일상은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주제를 두고 그녀와 나는 한참동안이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금 이 순간을 과연 일상이라 해야 할지, 여행이라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논했다. 끝내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1 케레타로에서 열린 지역 박람회에서 2 멕시코 레온León에서 열린 벌룬 페스티벌 현장
 
 
내일 아침 우리는 어디쯤

다시 망망대해. 언제 또 크루즈를 탈 거냐고 물으니 그녀는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에도 로얄캐리비안으로부터 스케줄 오퍼를 받았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거절했단다. “막연하긴 해도 연연하진 않아요. 맞는 스케줄이 있으면 다시 배를 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르게 살 수도 있고요.” 우선은 멕시코행이다. 뒷일이야 뭐가 어찌 됐든. “여행으로 끝날 수도 있고, 또 다른 책을 쓸 수도 있겠죠. 스페인어를 배워 놓으면 언젠가 다시 타게 될 크루즈에서 더 많은 승객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가능성은 바다다.

최근 멕시코에서 들려온 강진 소식에 자연씨가 걱정돼 안부를 확인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지진이 난 남부 지방과 떨어져 있어 다행히 무사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녀는 모처럼 뷔페가 아닌 하나의 온전한 음식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번에 출간 작업 때문에 못했던 것들을 이번에 제대로 즐기고 있어요.” 그녀는 노랗게 잘 익은 망고를 한 손에 들고 정처 없이 공원을 걷거나, 오후 내내 소파에 앉아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여 아무것 이상의 하루를 만든다.
 
그동안 나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일상일까 여행일까, 아직도 헛갈리는 상태로.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상이니 여행이니, 그 모든 것들을 싣고 삶은 그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뿐이 아닐까. 그날 자연씨와의 대화를 되새겼다.

“크루즈는 그 자체로 여행입니다. 목적지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여정이요.” 일상 같은 여행을 꿈꾸지만 일상은 본디 여행일지 모른다. 삶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끝없이 다음 기항지를 향하는 과정. 기대해 본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에 없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해 있기를. 항해를 계속할 뿐이다. 바다는 무한하다.  
 
●CRUISE INFO
선상에서 통하는 TIP
 
1 환전은 미리미리
 
기항지에서 쓸 돈은 미리 은행에서 필요한 만큼 환전해 가되, 부족한 부분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편이 현명하다. 선상에서 환전을 하면 수수료를 물며 선내 ATM을 통해 인출을 해도 6~7USD 정도의 수수료가 붙기 때문. 당연한 이야기지만, 갑자기 해외 지출이 생기면 신용카드가 막히는 경우도 있으니 미리 해외에서 결제가 가능한 카드인지 확인하고 떠나는 것도 잊지 말자.
 
2 멤버십이 좋긴 좋아

로얄캐리비안의 경우 1박당 1포인트가 쌓인다. 예를 들어 7박 8일 일정을 마치면 7포인트가 생기는 것. 80포인트가 넘으면 다이아몬드 멤버가 되는데, 라운지 출입과 더불어 컨시어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고 다음 크루즈를 예약할 때 할인을 받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175포인트가 넘으면 다이아몬드플러스멤버, 600포인트가 넘으면 피나클 멤버가 되며 레벨마다 혜택이 다르다. 다이아몬드 레벨 이상 멤버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혜택은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해피아워 드링크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점. 

선상에서 통하는 용어
 
데크(Deck)│크루즈 내 ‘층’을 의미한다.
포워드(Forward), 미드십(Midship), 아프트(Aft)│각각 선두, 가운데, 선미를 말한다. 
이머전시 드릴(Emergency Drill)│출항에 앞서 모든 승객이 의무적으로 받게 되는 비상안전교육. 구명조끼 착용 등의 교육을 받는다.
인테리어 룸(Interior Room)│배 안쪽에 위치한 가장 저렴한 객실로, 창문이 없다.
포멀 나이트(Formal Night)│턱시도나 드레스를 차려 입는 저녁. 드레스코드가 주어지기도 한다.
백 투 백 크루즈(Back to Back Cruise)│크루즈를 2회 이상 연속 예약하는 것을 말한다.
 
 
BOOK
<나는 크루즈 승무원입니다>

5년간 로얄캐리비안 승무원으로 일한 자연씨의 경험과 노하우를 담았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친구가 조곤조곤 말해 주는 것처럼 목소리가 편안하다. 일과 여행의 경계에서 샘솟는 그녀의 호기심과 방랑심을 엿볼 수 있다.
홍자연│미래의창│2017년
 
 
*홍자연은 지난 5년간 로얄캐리비안 크루즈 승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2016년 여름, 휴식을 고하고 떠난 멕시코에서 <나는 크루즈 승무원입니다> 책을 쓴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느릿한 삶과 여행을 선호하며, 겁이 많은 편이지만 익숙한 것들을 지양한다. 땅 따먹기 식 탐방보다는 진득한 ‘탐구’가 하고 싶어, 지금 또다시 멕시코에 있다.
인스타그램 jayeonhong  브런치 missconcierge
 
글 김예지 기자  인터뷰 사진 Photographer 유운상  사진제공 홍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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