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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편지를 쓰는 오후

  • Editor. 김서령
  • 입력 2017.10.3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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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랍시고 또 어디론가 날아가 있을 때였겠지. 그때 나는 하도 깊이 사랑에 빠져 머릿속이 매일 웅웅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도 하프 마라톤은 족히 뛴 여자처럼 내내 헉헉댔다. 서울에 더 있으면 정말이지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 주섬주섬 수트케이스를 꾸렸던 거다. 내 깜냥에, 연애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넉 달쯤 떠나 있어야지 마음을 먹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세부에 각각 두 달씩 숙소를 잡았다. 
 
여행 중에는 그립고 애달픈 일이 그래도 수월하게 잊히기 마련이다. 적절한 거리감이 나를 고요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어 들고 타박타박 낯선 거리를 걸었다. 날은 지겹도록 매일 더웠고, 나는 다리가 아팠고, 그래서 노천카페에 앉았다. 소설은 쓰고 싶지 않았다. 
 
가방 안에는 늘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지만 사실 나는 노트에 무언가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연필 몇 자루도 들었지만 글씨를 쓰는 일은 잦지 않다. 94년인가 95년에 아르바이트비를 받아 대우 르모 워드프로세서를 산 뒤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게 그렇게 좋아서 나는 자다가도 몇 번씩 기숙사 침대에서 일어나 키보드를 두들겼다. 타이핑 속도가 남들보다 빨라 한때는 “손가락이 머릿속을 자꾸 앞질러 가. 원고지에 쓰는 버릇을 들여 볼까?” 그런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 놓은 적도 있지만 오래 전 손을 다쳤고, 그 때문에 내 왼손은 넷째 손가락을 빼고는 감각이 멍해져 이제 키보드를 누르지 못한다. 힘이 안 들어가는 거다. 약지 하나로 키보드의 왼쪽을 다 뛰어다니려니 속도는 당연히 느려졌다. 마감을 하고 나면 그래서 넷째 손가락은 퍼렇게 멍이 들고 또 탱탱 부어 올랐다. 이제는 적당한 속도다. 머릿속과 비슷하게 가는 거다.
 
더운 도시에서 산 노트는 질이 좋지 않았다. 거슬거슬했고 지우개질 두 번만 하면 찢어져 버릴 듯했다. 나는 노트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쪽 가득 썼다. 고백해도, 고백해도 더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노트를 찢어 봉투에 넣어 보내는 대신 나는 카메라를 꺼내 편지를 찍었다. 그리고 그의 이메일로 사진을 보냈다. 다정한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무척 수줍었기 때문에 그 편지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다음 그에게 전했다. 그러니 몽땅 왼 거다. 편지를 읽은 그가 마지막 부분을 참 좋아했는데, 그가 좋아해서 나도 얼굴이 발개지도록 설레었는데, 지금 와 단 한 문장도 기억나지 않는다. 참 쓸모도 없는 추억 같으니.
 
마닐라에서였는지 세부에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짐을 챙기던 나는 무심코 책상 위의 연필꽂이를 돌려 세웠다. 거기에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랑해 줘서 고마워.”
 
곰곰. 이게 뭐였지. 곧 떠올랐다. 내 사진 편지를 받은 애인은 메모지를 들어 짧은 편지를 썼다. 그러고는 나처럼, 카메라로 그걸 찍어 보냈다. 사랑한다 운운하는 그의 악필이 하도 귀여워 나도 포스트잇을 들어 답장을 썼다.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진으로 보내 주었는데 그게 남은 거였다. 그 포스트잇은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나달나달해진 끝에 결국 버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고백들은 내가 없는 공중을 날고 이내 사라졌다. 또 애인들도 사라졌다. 노란 포스트잇은 어쩌다 남았지만, 우연이다. 버릴 짬을 내지 못했을 뿐인 거다. 뜨거운 입김 같기만 했던 필리핀의 도시들도 거의 잊었다. 그곳에서 쓴 소설만 남았지. 그곳의 날씨처럼 습하디습한 소설 한 편.  
 
소설가 김서령
날이 차지는 중이다. 추운 날은 정말 싫은데. 도톰한 양말을 꺼내 신고 굵은 실로 짠 망토를 옷장에서 꺼냈다. 그렇게 책상 앞에 앉았다. 커피는 빠르게도 식는다. 반도 안 마셨는데. 세련되고 고상한 미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다. 전자레인지에 40초만 데워 와야지. 그래도 괜찮은, 시답잖은 커피 취향을 가진 소설가다.     www.facebook.com/titatita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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