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채지형의 여행유전자] 길을 잃어도 괜찮아

  • Editor. 채지형
  • 입력 2017.11.28 1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잔지바르섬을 여행할 때였다. 거미줄처럼 좁은 골목이 이어져 있었다. 다년간의 여행 경험은 길도 잘 찾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착각이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도대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로였다. 골목은 너무나 좁았고 높은 벽만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벽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대낮인데도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불안했다. 잔지바르섬을 다 품을 것처럼 호기롭게 걷기 시작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발걸음도 마음도 허공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골목 끝에서 까만 옷을 입고 나타나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잔지바르는 아프리카지만 무슬림이 살기 때문에 까만색 옷을 입은 여인들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불안감을 누르지 못하고 골목 사이를 뛰듯이 돌아다녔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늘에 있는데도 목이 하염없이 말랐다. 

골목을 헤매다 결국 출구 찾기를 포기해 버렸다. 포기했다기보다는, ‘걷다 보면 언젠가 나타나겠지’라며 생각을 바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어슬렁거리며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심장을 쫄깃하게 했던 불안감이 사라지자,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월을 품은 벽들, 골목 사이를 지났을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했다.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춰 실컷 골목을 구경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시끌벅적 아이들의 사이다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갔다. ‘모든 길은 통한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큰 길이 나타났다. 전날 돌아봤던 시장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 찾을 줄 알았어.’ 혼자 미소를 지었다.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엄마와 집 앞에 있는 시장에 갔다. 분명히 엄마 손을 잡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빈손이었다. 장난감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엄마의 손을 놓은 것이다. 사방에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온 길을 더듬어 되돌아갔지만, 다른 길이었다. 어린 내게 시장은 거대하고 복잡했다. 그날 길을 어떻게 찾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엄마 손 꼭 잡아야 해”라는 말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야단맞지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나보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계셨다. 그런데 아빠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공부 많이 하고 왔다며 어깨를 다독이셨다. 한술 더 떠, 튼튼한 운동화를 사 주겠다며 더 많이 돌아다니라고 하셨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면서. 어릴 때 일은 거의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비가 꿀을 따러 다니는 것처럼 세상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된 것이.

꽤 오래 잊고 있었다. 헤매도 된다는 것을.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기웃거림에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입시를 위해 옆 자리에 앉은 친구들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날개가 접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헤매면서 스스로 길을 찾던 어릴 때 촉은 이미 무뎌졌고, 그렇게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잔지바르의 골목은 어릴 때 나를 찾아 주었다. 어딘가 길은 있을 것이니, 그 안에서 잠시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기억하게 했다. 더 이상 길 잃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잘 닦인 8차선 도로 같은 날들도 있고, 먼지 풀풀 날리는 산길을 가는 날도 있는 법. 눈앞에 바로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길은 나타날 테니까.

오히려 기꺼이 길을 잃을 수 있게 됐다. 길을 잃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만남과 떠오르지 않았을 생각이 더 없이 귀하게 다가왔다.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가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헤매는 순간순간들이 거름이 되어 주었다. 어딘가에서 프로필을 달라고 하면 ‘길을 헤매다 집에 오면 공부 많이 했다고 칭찬해 주던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 곳곳을 여행했다’고 쓴다. 앞으로도 많은 길을 돌아가겠지만, 그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이 길을 가다 보면, 내가 가고 싶은 그 길이 나타날 것이라고.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기꺼이 헤맬 줄 아는 아버지와 나누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 신나게 헤매며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2017년 남은 한 달은 신혼여행 때 만난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면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www.traveldesigner.co.kr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