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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모든 것이 비빔밥처럼 어우러진다

  • Editor. 김진
  • 입력 2018.02.0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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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에 도착했을 땐 거센 비바람에 은행잎들이 다 떨어져 노랑카페트가 돼 있었다. 연인들은 한쪽 어깨가 다 젖어도 좁은 우산을 함께 썼다. 비바람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사춘기 소녀들은 대여점에서 빌린 한복을 차려입고, 츄러스와 초코파이를 들고 다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은 저 혼자 마을 끝자락에 뾰족하게 솟아 있지만, 이상하게 잘 어울린다. 성당 주춧돌은 전주 읍성의 성곽 돌로, 벽돌은 성벽 흙으로 만들어졌다는데 그 이유 때문일까. 그렇게 전주 한옥마을은 옛것과 지금 것, 우리 것과 서양문화가 공존해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는 한복을 빌려 입은 소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의 밤. 은은한 조명 덕분에 마을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한옥에 한 번도 살아 보지 않았더라도 한옥에서는 왠지 푸근한 고향의 정취가 느껴진다
 
서울 북촌이나 경상북도 경주, 안동의 한옥마을과 달리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들은 도심에 대규모로 운집해 있다. 다른 지역의 한옥마을이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가옥의 형태를 가졌다면, 전주는 1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형성됐기 때문에 전통가옥보다는 도시형 한옥에 가깝다. 한옥마을 탄생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풍남문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일본인이 대거 거주했는데, 그들은 상권까지 넓혀 나가며 전주 사람들을 위협하기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1930년대부터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한옥마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가맥가게 맥주집에서 보슬보슬한 황태포에 맥주를 들이켜고 싶었지만, 입고 온 옷은 너무 얇았고 배낭도 무거웠다. 대신  마을 대로변 빌딩의 꼭대기에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골목마다 노란 LED 조명이 오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은은하게 비춰 주니 낭만적인 분위기가 깊어진다. 크고 작은 한옥들은 담장 너머로 손을 맞잡을 수도 있을 만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잇닿은 한옥의 선은 살짝 들어 올린 버선코처럼 우아하고 매끄럽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길거리 음식 냄새가 지면 가까이 머무른다. 버터향 문어꼬치, 임실치즈 닭꼬치, 호떡, 떡갈비까지. 풍겨 나오는 냄새가 코를 한껏 자극했다. 한옥마을의 정취를 해친다는 이유로 많은 길거리 음식점이 정리됐지만, 여전히 먹을 것은 차고 넘친다. 그래도 전주는 역시 비빔밥이니,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전주 비빔밥은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눈과 손과 입이 즐거운 비빔밥

음식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특별한 날에나 먹었던 경양식집 돈가스, 이삿날 신문지 깔고 먹던 짜장면, 연인과 마주 앉아 마신 커피 한 잔이 그렇게 맛있었다. 이날 나는 추위에 허기까지 더해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비빔밥을 먹었다. 

투박하고 둥근 유기그릇에 쌀밥과 호박, 황포묵, 표고버섯, 육회가 담뿍 담겨 나왔다. 오방색의  비빔밥은 우선 시각적으로 맛있다. 비빔밥은 미감(味感)과 미감(美感)이 만난 작품이다. 여행 후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비빔밥의 색감이 너무나 예뻐서 색연필화로 그려 봤지만, 생생한 색감과 맛이 도무지 표현이 되지 않았다. 써억써억 비비는 재미도 있다. 마지막으로 입속에서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는 묘미까지 있다. 재료를 한 번 훑어보고 으스러지지 않게 잘 섞은 다음, 입 안에서 꼭꼭 맛을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릇의 바닥을 뚫어 버릴 기세로 먹어 치웠다.

궁중음식에서 비롯됐다는 비빔밥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좌판에서 팔던 싸구려 음식이었다. 당시 전주 남문시장에서 팔던 비빔밥은 밥에 나물과 날달걀만 넣고 거침없이 쓱쓱 비벼 먹는 형태였다고. 이후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비빔밥 식당인 ‘한국집’에서 비빔밥을 정갈하게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그것이 현재 전주 비빔밥의 시초가 됐다. 

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앉게 된 가족은 팔순이 넘은 어머님과 두 딸이었다. 테이블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서로 모르는 네 명이서 나란히 앉게 된 것이다. 전주 비빔밥은 육회 혹은 익힌 고기를 선택할 수 있는데, 어머님은 생고기가 내키지 않은 듯 고기를 익혀 달라고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첫 끼는 공교롭게도 ‘어우러짐’의 음식, 바로 비빔밥이었다.  
 
전주 콩나물국밥은 일꾼들의 간이음식으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든든한 한 끼로 자리잡았다
 
토렴식 콩나물국밥에 담긴 정신

“서울 사람들은 팔팔 끓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사장님이 토렴식(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를 반복해 데우는 것) 콩나물국밥에 대해 설명했다. 서울 사람들은 뚝배기 옆으로 국물이 넘칠 정도로 바글바글 끓여야 맛있게 느낀다고 한다. 자극적인 것에 익숙하면, 밍밍하고 미지근한 것이 어색하다.
 
박찬일 셰프는 그의 저서 <뜨거운 한입>에서 콩나물국밥은 ‘어른이 되는 맛’이라고 표현했다. ‘무심하고 밋밋한 콩나물이 전부인 그 국물은 자극이라고는 모르는, 요즘 같은 선동적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맛이다’라고. 그 말에 무릎을 딱 치게 되니 나도 어른이 됐다는 증거인가. 한옥마을의 고요한 아침, 눈곱을 떼자마자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비워 냈다. 

예로부터 물이 좋은 전주에서는 콩나물이 잘 자랐다. 좋은 식재료는 좋은 음식을 만든다. 전주 남문 밖 시장 사람들은 일이 끝나 가는 새벽이면 출출한 뱃속을 달래 주는 따뜻한 국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꾼들의 간이음식으로 전주 콩나물국밥이 탄생했다. 전날 저녁 지어 놓은 찬밥을 뚝배기에 넣고 콩나물 국물을 서너 번 국물말이 하면 가장 먹기 편안한 온도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 낸 토렴식 콩나물국밥은 밥알에 밴 국물 맛도 맛이거니와, 너무 뜨겁지 않아 바쁜 시장 사람들이 후루룩 먹기 좋았을 터. 갈수록 남부시장 방식의 토렴을 하지 않는 가게가 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전라도는 2018년에 1,000년의 역사를 맞이한다. 지금 통용되는 8도의 명칭이 대부분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강원도가 강릉과 원주의 머리글자를,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의 앞 자를 따 붙인 것처럼 전라도 역시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합해 만든 지명이다. 때는 고려 현종 때로 서기 1018년이었다. 
 
글·사진 김진  에디팅 강수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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