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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여행유전자] 꾹꾹 눌러 띄운 마음 한 조각

  • Editor. 채지형
  • 입력 2018.03.27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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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소연언니에게, 여기는 포카라. ABC에 다녀왔어. 그다지 높지도 않은데, 이번에는 고산병으로 고생 좀 했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좋더라. 한 계단 한 계단 끙끙거리며 오르다 보니, 끝이 나오긴 하더라고. 내려올 땐 깜짝 놀랐어. 이렇게나 길었던가 싶어서. 우리의 킬리만자로 생각도 많이 났어. 죽을 것 같던 밤과 별과 맥주. 나 때문에 고생했던 언니, 다시 한 번 미안하고 고마워. 올해는 더 재미있게 살자, 언니야. 히말라야 기도발을 믿어 보며, 포카라에서 지형”

소연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뭐, 이런 걸 또 보냈어”라면서도, 바람 타고 날아온 엽서가 싫지 않은 목소리였다. 시간을 쪼개 엽서를 띄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여름.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엽서의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기능은 천지차이다. 그때만 해도 엽서는 안부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일주일 후에 도착하는 톡 메시지라고나 할까. 1990년대 중반은 인터넷을 글로 배우던 시대였고, 인터넷은 ‘인터넷의 효시는 1969년 미국 국방연구계획국 프로젝트인 아르파넷으로…’라는 식으로 대학 리포트에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첫 배낭여행이었던지라 남은 동전 수까지 체크하며 여행했다. 빵을 살 때도 양 많고 칼로리가 높은 빵을 골랐지만, 엽서만은 1,000원이 훌쩍 넘는 파노라마 사진을 집었다(200원 정도면 보통 엽서 한 장을 살 수 있었다). 엽서에는 생전 처음 떨어져 지내는 부모님께 보내는 사모곡이 담겼다. 돌아보면 웃음만 나지만, 엽서를 쓰면서 얼마나 훌쩍였던지. 엽서를 쓰고 나면 들뜬 마음으로 우체국을 찾았다. 보름에 한 번 어렵게 국제전화를 걸면, “엽서 받았다”는 한 옥타브쯤 올라간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막내 딸내미의 첫 해외여행.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꼬. 엽서는 안녕을 알리는 평화의 메신저, 비둘기였다. 

세계일주를 하던 2005년. 당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이메일이었다. 국제전화 대신 스카이프를 쓰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그럼에도 엽서 쓰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때로 생일카드로 변신하고 가끔은 편지로 바뀌기도 했다. 내용은 매번 달랐다. 안부를 묻기도 하고 여행의 즐거움과 피곤함을 쓰기도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적기도, 포부를 담기도 했다. 엽서를 쓰고 예쁜 우표를 붙이고 나면 엽서의 주인공들이 진심으로 그리워졌다.
 
여행이 깊어 갈수록, 나는 엽서 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일정이 꽉 찬 3박  4일 해외 출장에서도 두리번거리며 우체국을 찾곤 한다. 엽서 안에 담긴 공기와 바람과 냄새는 특별하니까. 잉크가 번져도 커피 자국이 남아도 비를 맞아도 상관없다. 오히려 아날로그 맛이 진해져 나쁘지 않다. 손 글씨가 빼곡히 담긴 엽서의 맛은 어떤 수단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했다. 책장에 꽂힌 파일을 꺼냈더니 우두둑 하고 편지뭉치가 떨어졌다. 엄마가 집에 왔다 갈 때면 책상 위, TV 앞, 냉장고 표면에서 흔적이 발견됐다. 언젠가 한번 분명히 집에 다녀가셨는데도 편지가 없어, 전화로 여쭈었다. “엄마, 뭐 잊은 거 없어요?”라니, “맞다, 깜박했네. 두 번째 책장에 있는 까만 노트 안에 넣어 놓고. 내 정신 좀 봐”라고 하셨다. 역시나. 레퍼토리는 매번 비슷했다. ‘엄마는 우리 딸을 믿는다’와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는 모든 편지의 공통분모였다. 엄마의 편지는 반창고가 되었고 빨간약이 되었다. 가끔은 비타민이, 때로는 해열제가 되기도 했다.
 
빛바랜 엄마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엽서 쓰기도 결국 마음을 전하는 엄마의 유전자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가득 담은 편지로 말을 거는 엄마. 딸은 물론이고 며느리와 사위에게 편지를 띄우는 엄마. 어쩌면 종이 위에 눌러 쓴 엄마의 마음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신나게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 저녁에는 팔순을 맞은 엄마에게 오랜만에 편지 한 통 띄워야겠다.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이야기를 담아서. 
 
*연재를 마칩니다
‘여행유전자’를 애정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낸 사부곡으로 시작한 칼럼이 옆에 계신 어머니의 재발견으로 마무리되었네요. 귀하게 받은 여행유전자, 많은 분들과 나누며 더 신나게 여행하겠습니다.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다정다감한 어머니와 여행 좋아하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아, 다정한 여행을 즐기며 살고 있다. 팔순을 맞이한 어머니와 함께 발리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홍삼을 차곡차곡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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