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영업비밀입니다만, 글의 결정적 순간은 ‘제목(혹은 첫 문장)’에 있습니다. 여행글쓰기 강의를 수년간 진행하면서 과제 피드백의 비중을 높여 왔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제목의 중요성입니다. 제목 없는 글(정확히는, 마땅한 제목이 찾아지지 않는 글)은 제목 없는 여행이었고, 그건 제목이 없는 시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아직 아침이지만 오늘 하루의 제목은, ‘스승이란’입니다. 이 레터를 마감하지 못한 찝찝함으로 새벽 3시 반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그래서 물감통을 열었습니다. 굳은 붓을 깨워 물감을 입히고, 지난겨울 광주에서 멈춰
두 번째 가을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긴장감이 흐르는 시대라니요, 이번 명절에도 대가족은 핵가족이 되고, 귀향자는 불효자가 될는지, 영 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위드 코로나(WITH COVID-19) 시대로 태세전환 중인데 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인지라, 확진자 집계를 중단하고 코로나를 독감 수준으로 관리하는 싱가포르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지긴 합니다. ‘지속 가능한 방역’ 외엔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상처 입은 우리의 여행은 어떻게 될까요? 코로나만 종식되면 보복여행으로 혼쭐을 내줄 기세였는데, 기다리는 동안 보복
평소 신조 중에 ‘남의 여행을 탐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타인의 여행은 부러워할 대상도, 평가할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번 호에 이우석 작가의 유쾌한 독설이 자기 방식의 여행을 고집하는 ‘여스플레이너(旅+explainer)’에게 꽂힌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그래서 딱히 남의 여행 이야기에 솔깃해하지 않는 제가, 최근 흥미롭게 들은 여행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장애인들의 여행, 비건들의 여행입니다. 이걸 어디서 들었냐 하면, (요즘 이거 하면 아재라던데) 한동안 ‘시간 플렉스’ 한다며 종일 틀어 놓았던 클럽하우스에서였습니다
백신은 맞으셨나요? 요즈음의 흔한 인사말입니다. 국민 4명 중 1명꼴로 접종을 마쳤다는 뉴스를 본 이후엔 좀 조바심이 나기도 하네요. 주사 한 방이 쏘아 올린 것은 ‘다시 여행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한동안 안부 묻기도 난감했던 여행업의 지인에게 다시 연락이 옵니다. 곧, 무어라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요즘입니다. 태도는 전염된다고 하죠. 백신이 주는 안도감은 한결 긍정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 낙관은 아직 미접종자인 저에게도 금세 전염되어, 새살이 차오르듯 안도감이 차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코시국’의 불안, 실
지난봄 한국관광공사 대학생 기자단을 대상으로 한 여행 글쓰기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나요?”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얼버무린 말을 한 것 같은데, 대답은 사라지고 질문만 맴돕니다. ‘아름다운 문장이 뭐지?’, ‘문장은 아름다워야 하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누구인가?’ 등으로 확장되어 가면서요. 새삼 묻는 사람, 묻는 행위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지난달부터 편집부는 ‘에디터를 위한 암묵지(暗默知)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소소한 대화의 시간입
훌쩍 떠났었습니다. 10년간 정주했던 서울 무교동 5층 사무실을요. 120여 권의 잡지를 만드는 동안 한 달 단위로 묶였던 일상의 매듭이 사라지자 한동안은 끝도 시작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렇게 시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부유한 끝에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계절입니다. 잡지라는 것이 한두 달씩 앞서 사는 일이라, 겨울이면 봄의 꽃대궐, 봄이면 여름의 짙은 녹음, 여름이면 가을의 울긋불긋한 산하, 가을이면 순백의 설경을 그리며 일 년 내내 욕구불만에 시달렸던가 봅니다. 폭설이 잦았던 지난겨울은 광주 양림동
저는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은 편입니다. 리액션도 신통치 않습니다. ‘뭐 먹을까?’ 물으면 ‘아무거나’가 태반이고, ‘맛있지?’ 하면 ‘응, 괜찮아’가 고작입니다. 상대방 김 빼기 딱 좋은 습관이라 고치고, 나름의 선호 리스트도 가졌으면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그래서인지 취향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부럽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합니다.원고에도 취향이 묻어납니다. 연재 기사가 대표적입니다. 매체가 됐든 개인 블로그가 됐든 어딘가에 무언가를 정기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대상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성실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페이스북은 종종 과거의 오늘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불쑥 튀어나온 1년 전 게시 글은 여러 감정을 불러옵니다. ‘여기 맛있었지’, ‘이 친구들은 잘 사나’, ‘이따위 사진은 왜 올렸을까’ 하며 입맛을 다시기도 웃기도 합니다. 물론, 리액션이 신통치 않은 탓에 이런저런 댓글을 달아 공유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무감한 제게도 여행은 예외입니다. 몇몇 여행에는 댓글도 달고 격렬하게 그때를 기억하고 싶어집니다. 3월 호 마감의 막바지로 이놈의 레터는 언제 넘어오냐는 채근을 받고 있는 오늘은 2월17일입니다. 페
에는 ‘트래비스트’라는 든든한 서포터즈가 있습니다. 트래비스트는 콘텐츠 서포터즈이자 조언자입니다. 7년째 이어 오며 여러 소중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던 대표적인 쌍방향 프로그램이지만 올해는 대상자를 한 달 늦게 소개드리게 됐습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코로나19 탓입니다. 여행은커녕 9시에는 신데렐라가 돼야 하고 여럿이 모이는 자체가 불미스러운 시국에 트래비스트에 지원을 하실까 고민을 했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이 ‘함께하겠노라’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1년, 저희와 함께하실 트래비스트는 총 11분입니다. 6분은 새 얼
어제 같은 오늘임을 뻔히 알면서도 기다렸습니다. 지금처럼 해 바뀜을 고대한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살 더 먹는 걸 넘어 나이 앞자리까지 바뀌는 2021년인데도 새해 인사가 반갑습니다. 새해, 1월, 새 출발 같은 파릇한 단어의 기운을 빌려서라도 2020년의 기억을 강제 격리해 두고 싶습니다. 하루, 한 달, 일 년의 매듭이 필요한 이유를 새삼 공감합니다. 작년 4월이지요. 피곤한 얼굴의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
반가운 12월입니다. 2020년쯤 되면 유토피아가 되어 있을 줄로 믿었는데, 이토록 달력을 빨리 넘기고 싶어질 줄을, 11개월 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2020년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의미로 기록될지 한 생만 사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기묘한 일 년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많은 것에서 결핍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부족했던 건 웃음이었습니다. 가 21년 만에 폐지된 해이기도 했네요. 개그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라고 할 만한 조상님으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MBC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TV도 귀했던 70~80년대 이웃들이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전 직원이 독감 백신 접종을 완료했습니다. 환절기와 겨울을 맞이하는 월동 준비 같은 것이죠. 11월이 되니 2021년을 그려 보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습니다. 슬슬 해외여행 출장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포착됩니다만, 여전히 조심스럽죠. 두렵기도 하고요. 아직은 백신 없이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코로나 백신이 곧 여행 백신인 겁니다.여행 백신을 기다리는 동안, 제 면역력을 체크해 봅니다. 여행을 가느라 아팠고, 여행을 못 가게 돼서 아팠고, 여행이 그리워 아픈 중입니다. 아플 만큼 아팠으
이럭저럭 시월입니다. 오로지 옷장 관리의 관점에서 계절의 변화는, 귀찮다면 귀찮고 재밌다면 재밌는 일인데, 올해는 꽤 집중해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출장과 여행 위주로 구입했던 흡습, 건속 기능성 옷들이 기능 한 번 제대로 뽐내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등산, 요가, 클라이밍을 위해 산 옷들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건 마찬가지고요. 청바지와 티셔츠, 잠옷만 생고생을 했습니다. 내친 김에 다림질이 귀찮아 손도 대지 않았던 옷들을 꺼냈습니다. 늘어놓고 보니 옷을 살 당시의 마음이 하나씩 기억납니다. ‘공식 석상’을 위해
데뷔의 계절인가 봅니다. 놀라울 만큼 ‘ 지인 출신 ’ 작가들이 쏟아집니다. 이제 ‘ 작가 ’ 라고 불려 마땅한 그들의 첫 페이지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여행을 좀 기록해 보고 싶다던 여행가 , 트래비아카데미의 특강에 참가했던 직장인 , 독자 이벤트에 당첨되 어 함께 여행을 다녀온 대학생 등이었습니다. 여행매거진과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 길게는 10 년 가까이 성장기와 고군분투를 간헐적으로 지켜보는 것은 ‘ 일 ’ 이기도 하 고 ‘ 마음 ’ 이기도 했습니다. 에디터에게는 두 가지 능력 ( 혹은 권한 ) 이 있습니다 ( 또 , 있어야
출근길에 누군가 전송해 준 ‘트렌드 능력고사’라는 걸 해 보았습니다. ‘전 국민이 힙스터가 되는 그날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의 유행어나 줄임말, 흥행한 마케팅 사례를 묻는 설문이라 N세대인 저는 2번을 반복해도 50점을 겨우 웃돌았습니다. 테스트 결과는, 아직도 김광석의 노래를 최고로 생각하냐며,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세대 가르기 마케팅’이었습니다.이런 마케팅도 유행이라면 유행이어서 누군가는 여행에서도 세대론을 말하지만, 그건 여행을 소비로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장에
마지막 출장으로부터 고작 4개월이 흘렀을 뿐인데, 마치 4년이 흐른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다음 달에는, 그렇게 유예되어 온 기다림이 어느덧 하반기로 함께 넘어와 내년을 바라보는 중입니다. 조바심을 경계하는 비법은 출근길에 광화문 교보문고의 글판을 한 번씩 보는 겁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백무산, ‘정지의 힘’ 中).’그래도 며칠 전에는 ‘실로 오랜만’에 관광버스를 탔습니다. 목적지도 ‘실로 오랜만’인 한국민속촌이었습니다. 이 조합이 이뤄진 이유는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를 위해 준비된 여행이었
예상은 했습니다만, 반응은 그보다 크게 엇갈렸습니다. 작은 변화라 생각하며 바꾸었던 표지가 몰고 온 후폭풍 말입니다. 어쩌다 한 번의 변신임을 아는 분들은 신선하다고 격려해 주셨지만, 표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표지는 다시 ‘노멀’로 돌아왔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다시 되돌려질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마도 표지 정도뿐일지도 모릅니다. 언텍트 여행, 스테이케이션 여행, 웰니스 여행, 보복적 소비 등 여행의 미래를 논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지
놀랍지만, 적응이 되어 갑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온라인 수업도, 질의응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고, 혼밥도 혼술도 꽤 즐길 만하며, 여행 없는 나날도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조금 다행스럽기까지 한 것은,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놓여난 것입니다. 이 시기는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을 겁니다. 새로운 시도들을 강요합니다. 준비한 적 없는 온라인 개학을 현실로 만든 것처럼요. 가상 현실 여행도 쑥 앞당겨질까요? 그러면 유채꽃밭이 확 갈아엎어지는 일은 없겠지만, 썩 달갑지는 않네요. 다들 조금은 그러
놀라셨나요? 제목이 좀 미끼 같죠. (아직) 퇴사는 아닙니다. 요즘 부쩍 ‘작별’을 고하는 여행업계 지인들의 메일이 늘었습니다. 길게는 20년 동안 ‘일’삼아 교류하며 제법 우정 비슷한 정까지 쌓아 온 이들인데, 서운함과 놀라움이 적지 않습니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다거나, 이제 좀 쉬고 싶다거나. 무거운 고민 끝에 내린 결단들이니 응원만이 남습니다.여행을 ‘일’로 삼는다는 것이 쉽지 않죠. 그야말로 바람 잘 날 없습니다. 지난여름 다녀온 일본 여행 기사를 (우리가 다 아는 그 이유로) 아직도 싣지 못했는데, 이
설 연휴까지 보내고 나니 2020년으로 성큼 들어와 버린 느낌입니다. 변변한 계획 하나 잡지 못하고 2월을 맞이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나태에 빠진 ‘무늬만’ 여행자를 억지로 끌어낸 것은 1여 년 전 가 주최했던 여행 프로젝트 ‘삼확행(세 가지 확실한 행복)’의 캠핑 동행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다시 만나 인천대교 야경을 바라보며 모닥불 피웠던 밤, 놓고 있었던 여행에 대한 갈망이 서서히 데워지더군요. 여행 준비의 시작은 ‘지름질’ 아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캠핑용 소품 정리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그 많은 포켓들에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