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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 movie l 제이슨 본이 미처 못 본 모스크바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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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한 영화 <본 얼티메이텀>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고독한 영웅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러시아 경찰들에게 긴박하게 쫓기는 장면이다. 거리에는 눈이 쌓여 있고 분위기는 삼엄하다. 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가 보여 주는 모스크바라는 공간은 주인공을 둘러싼 긴장과 위압감의 미장센으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그것은 영화가 의도했다기보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영화가 세뇌시켜 왔던 크렘린의 ‘고압적이면서도 은밀한 이미지의 잔영’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떤 공간이나 대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투사하는 이미지는 확실히 위력이 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웃지 못 할 일화. 모스크바에 출장 간 한 한국 기업체 직원이 경찰의 검문에 지나치게 ‘쫀’ 나머지, 냅다 튀다가 루블화 수십 장을 등 뒤로 던졌다고 한다. ‘먹고 떨어져’라는 의사 표현이었을 터. 그는 그 덕분에 경찰이 아닌 특공대원들에게 붙잡혀 더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 딱한 사람, 아무래도 냉전기의 <007> 시리즈를 너무 많이 본 게 아닐까. 또 다른 일화. 미국에 간 한국인이 호텔 엘리베이터를 흑인 배우와 단 둘이 타게 됐는데, 흑인을 갱으로 오인한 그가 ‘4층 버튼을 눌러 주세요(Hit Four, Please)’라는 흑인의 말에 자기 머리를 스스로 네 번 벽에 박았다고 한다. 그는 갱스터 영화를 너무 많이 봤을 게 뻔하다. 그냥 피식 웃고 넘길 수 있는 사례들이지만 곱씹어 보면 영상 매체가 얼마나 지독한 편견의 메신저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지난 여름 선배 부부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겨울의 이미지로만 각인된 모스크바는 따스한 햇볕을 받아 찬란했다. 붉은 광장의 탁 트인 전경 위로 우뚝 서 있는 바실리 성당은 그 자체로 황홀한 예술품이었고 거리 곳곳에 옛 소련의 잔재와 제정 러시아의 유물들이 그로테스크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였다. 더욱 찬란했던 것은 ‘좋은’ 계절을 맞아 일광욕을 위해 웃통을 벗어제친 시민들, 결혼식을 올린 뒤 사진 촬영을 위해 거리와 공원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선남선녀들의 풍경이었다. 잘 차려 입은 신랑 신부들의 표정은 눈부셨고, 햇볕을 흠모하는 시민들의 여유 넘치는 모습은 러시아를 눈과 얼음의 나라로만 ‘단순무식’하게 새겨 왔던 내 인식의 한 언저리를 싹둑 잘라냈다. 

어떤 여행에서든 나는 영화를 통해 기대하는 바와 같은 것을 기대한다. 사람의 풍경을 목격한다는 것은, 나로선 그 공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파편화된, 혹은 왜곡된 이미지를 조율하는 작업이자 삶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건물보다, 거리보다, 늘 사람을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한 차원 높은 것은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바디 랭귀지가 됐든, 어설픈 현지어가 됐든, 적어도 비영어권 나라에서 자기 편하자고 아무에게나 영어를 들이대는 몰상식한 짓만 안 한다면, 모든 종류의 소통은 여행의 질을 최고의 단계로 끌어 올리는 지름길이다. 다행히 현지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던 나는, 러시아인들의 무뚝뚝함에 처음에는 짜증이 나다가, 여행이 끝날 즈음엔 슬쩍 그들이 가진 의리의 정서와 살가움을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의 러시아는 비로소 세뇌된 이미지의 감옥에서 출소할 수 있었다. 밤 10시까지도 해가 지지 않는 한여름 밤의 보드카 맛이 기가 막히다는 사실은 덤으로 얻어 왔다. 


글을 쓴 최광희는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하고,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주간지 <필름 2.0>의 온라인 편집장을 거치며 쌓아 온 그의 내공이 여행을 만나 맛깔스런 하모니를 연출할 계획이다. 팀블로그 ‘흥 UP(mmnm.tistory.com)’에는 그 못지않은 개성으로 각개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는 4인의 필진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영화와 세상을 노래한다. 보다 내밀하고 자극적인 그의 영화 칼럼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그의 여행기도 빼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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