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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 l wine - 빵과 와인의 소박한 궁합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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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를 이탈리아에 살며 이사를 자주 다녔다. 북부에서 남부를 거쳐 중부까지, 필요한 공부를 하느라 커다란 이민 가방을 꾸리곤 했다. 뻔한 주머니 사정에 그럴 듯한 집이 걸리겠는가. 주로 외국인 노동자나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대충 살림 풀고 사는 집이었다.

이사에 이력이 붙고 이탈리아 빵 맛에 익숙해지자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닐 때면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빵이야 어차피 서양 사람들 주식이니 주택가에는 빵집이 늘 있게 마련인데, 그 맛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운 좋게 맛이 뛰어난 빵집 근처에 집을 얻으면 신이 나곤 했다. 마치 음식 솜씨 좋은 아줌마가 있는 하숙집을 얻은 것처럼.

서양의 빵집은 말 그대로 빵을 파는 집이다. 케이크나 달콤한 디저트용 빵과 과자를 취급하는 집은 따로 있다. 빵집은 파니피치오, 케이크집은 파스티체리아라고 부른다. 보통 이탈리아에서는 ‘무얼무얼 파는 가게’란 뜻으로 낱말 끝에 ‘~리아’를 붙이는데, 아이스크림을 팔면 젤라테리아, 비프스테이크를 팔면 비스테케리아 하는 식이다. 그런데 빵을 파는 곳은 ‘~치오’라는 접미어가 붙는다. ‘~치오’는 원래 영어의 ‘office’와 같은 뜻으로 공공의 성격을 띤 건물에 붙이는 말. 아이스크림이나 비프스테이크는 안 먹어도 그만이나, 빵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해인가 중부의 한 도시로 이사 갔을 때다. 집도 깨끗하고 전망도 좋았는데 값이 쌌다. 이게 웬 떡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하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지하에 커다란 빵 공장이 있어서 새벽부터 엄청나게 큰 오븐을 예열하느라 ‘쿵!쿵!’ 지진 소리가 들리는 거였다. 맛난 빵집에 집착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맛있는 빵집을 구별하는 법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새벽에 줄을 서는지 살펴보고, 오후에 빵이 남아 있는가를 보면 된다. 새벽부터 줄이 길고 오후에 재고가 바닥난다면 틀림없이 괜찮은 빵집이다. 천성이 게으른 필자가 새벽부터 빵집에 줄이 얼마나 긴지 살피는 건 애당초 글러버린 일이었으므로 두 번째 방법을 애용했다. 오후 두어 시쯤(빵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다) 어슬렁거리며 빵집에 들어선다.

“빵 있어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일 오슈.”
이러면 그 집  빵 맛은 보증되는 거다. 반대로,
“(반갑게) 있지! 있고 말고(잘 걸렸다)! 이 집에 있는  게  다 빵이야.”

이렇게 되면 본능적으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빵과 별 차이가 없는 빵을 뜯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맛있는 빵집의 오후는 당연히 썰렁하기 마련. 어른 베개만한 딱딱한 빵이나 구석에 쳐 박혀 있고, 맛난 스필라티나(이탈리안 바게트)나 파니노(동글동글하고 고소한 롤빵)는 못생긴 녀석으로 두어 개 진열대를 뒹굴면 다행이다. 갓 지은 밥이 맛있듯이 빵도 막 구워 김이 빠질 때가 가장 맛있다.

와인은 보통 음식이나 치즈와 함께 먹는다. 그런데 변변한 안주도 없을 때 순수한 곡물로 만든 빵에 곁들여 와인을 마셔 보라. 순수한 빵은 와인을 ‘원래 맛 그대로’ 우러나게 도와준다. 특히 풋풋한 화이트와인이나 젊은 레드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바게트를 뜯어 먹어 보라. 와인 맛이 고스란히 입 안에 전달되면서도 떫은 뒷맛을 중화시켜 준다.

그래서 와인 테이스팅을 할 때는 맹물로 헹궈내기도 하지만, 바게트 같은 빵으로 입을 헹궈내기도 한다. 섬세한 와인일수록 자극적인 양념의 음식보다는 이처럼 빵 한 조각을 곁들일 때 훨씬 훌륭한 뒤 끝을 보인다.

글을 쓴 박찬일은 요리하고 글쓰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주부생활>, <우먼센스>의 기자 생활 뒤 홀연히 요리와 와인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의 거침없는 사고와 자유분방함은‘맛있는 세상’을 요리하는 그만의 독특한 레시피다. *위 글은 넥서스에서 출간한 <와인 스캔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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