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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Movie - 내가 겪은 뉴욕 그리고 <나는 전설이다>의 뉴욕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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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동경한다. 여행 좀 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물론 대 놓고 얘기하진 않겠지만), 이를테면 LA에 다녀온 것과 뉴욕에 다녀온 것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레벨 차이’가 존재한다. 마치 괌에 다녀온 자가 쿠바 여행자 앞에서 말꼬리를 흐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유가 뉴욕이 LA보다 비행기를 더 오래 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뉴욕의 상징성이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비중 때문일 것이다.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첨단 자본주의의 메카’와 동시에 브로드웨이를 품은 ‘문화 허브’의 양면적 특수성은 뉴욕을 매혹적인 공간으로 인식시켜 왔다. 뉴욕을 무대로 한 숱한 이야기들이 그 판타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해 온 것은 물론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뉴욕은 쿨한 욕망이 쿨하게 충돌하며, <어거스트 러쉬>는 록과 클래식이 섹스하는 공간, 폴 오스터의 뉴욕은 고향 없는 이들의 고향으로, 그러므로 떠남과 회귀의 근거지다.  


내가 뉴욕을 방문한 건 지난 2001년 여름, 두 대의 항공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박치기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기 딱 두 달 전이었다. 한 해 전 역시 뉴욕에 버금가는 미국의 대표 도시 시카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왠지 정겨웠던 시카고에 비하면 뉴욕의 첫 느낌은 이상하게도 위압적이었다. 마천루를 받치며 반듯하게 난 블록을 걸으며 나는 숨이 막혔다. 산소가 부족한 산꼭대기에서 느끼는 고산증 같았다고나 할까. 고개를 최대한 치켜 올려야만 보이는, 건물 틈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구름과 하늘은 차라리 처연해 보였다. 아마 내가 조금 여유가 있어 센트럴 파크나 브로드웨이를 거닐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 빌딩 숲의 한 구석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캐서린 제타 존스를 숨 가쁘게 인터뷰한 뒤, 다시 숨 가쁘게 또 다른 출장지인 LA로 향했다. 따뜻한 날씨에 LA에 오니 숨통이 트이고, 살 것 같았다. 

최근 개봉한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도 뉴욕이 배경이다. 1954년에 발표된 원작에선 LA가 배경이었는데, 감독이 뉴욕으로 무대를 옮겨 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 지구상에 홀로 살아남은 로버트 네빌 중령(윌 스미스)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뉴욕의 도심을 자신의 자동차로 활보한다. 아무도 없는 그 을씨년스러운 콘크리트 도시에 난데없이 사슴 무리가 나타난다. 이제 네빌은 사슴 사냥에 나선다. 멈춰 선 자동차들과 건물들을 헤치며 자신의 충견과 더불어 사슴을 쫓는 그에게 갑자기 적수가 나타난다. 그것은 사자 무리. 찬란했던 문명이 앙상한 폐허로 남은 자리에 네빌은 사자와 먹이를 다퉈야 하는, 아니 무력하게 먹이를 내주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이처럼 뉴욕이라는 공간을 원초적 생존 법칙만이 잔존한 정글의 이미지로 그린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9·11 테러가 미국인들에게 남긴 공포감의 상징이다.

2001년 뉴욕 여행에서 돌아온 뒤 두 달 만에 그 사건이 터졌다. 내가 묵고 있던 호텔은 월드 트레이드센터의 바로 몇 블록 옆에 위치해 있었다. 그 비극의 스펙터클을 바라보며, 나는 뉴욕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게 일종의 불길한 전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어쨌든 그 후로 나에게도 뉴욕은 정글의 이미지로 굳어졌고, 아직 인간으로 살고 싶은 나는, 미국이 문명으로 회귀하기 전에 그곳을 내 발로 찾아가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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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최광희는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하고,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주간지 <필름 2.0>의 온라인 편집장을 거치며 쌓아 온 내공이 여행을 만나 맛깔스런 하모니를 연출할 계획인다.

팀블로그 '3M흥UP'(mmmm.tistory.com)에는 그 못지않은 4인의 필진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영화와 세상을 노래한다. 보다 내밀하고 자극적인 최광희의 영화 칼럼을 원한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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