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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Movie - 나의 지겨웠던 베니스 여행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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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니스에 가본 것은 두 차례다. 한 번은 관광, 또 한 번은 영화제 취재를 위해서였다. 처음 베니스에 갔을 때,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산마르코 광장의 수많은 비둘기 떼, 도시를 촘촘히 엮어 놓은 크고 작은 운하와 곤돌라,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렵던 미로 같은 골목 등, 그곳은 ‘이국적’이라 부를 수 있는 신기한 볼거리의 집합지였다. 

도시 전체가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베니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의 바다 버전쯤 돼 보였다. 도대체 이 짠 바닷물 위에 견고한 벽돌 도시를 짓게 한 역사적 원동력은 무얼까, 잔뜩 지적 호기심을 지닌 채, 나는 이 골목 저 골목, 이 운하 저 운하를 킁킁거리며 신나게 쏘다녔다.

2년 뒤 다시 베니스를 찾게 된 것은 베니스국제영화제 때문이었다. 첫 번째 방문이 1박2일의 짧은 여정이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나는, 보름 가까운 영화제 기간 동안 이 신기한 도시를 실컷 볼 수 있게 됐다는 데 마냥 흥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흥분은 채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베니스에서 수상 버스로 약 40분 거리의 리도 섬에서 열린다. 경비 문제 때문에 육지 쪽에 숙소를 마련해야 했던 나는, 숙소에서 베니스까지 버스로 30분, 베니스에서 리도까지 배로 40분, 다시 리도 선착장에서 행사장까지 버스로 10분을 이동해야 했다.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왕복으로 거의 세 시간. 그걸 매일 되풀이한다면, 그것도 매일 아침 6시에 출발해 밤 11시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이 되시려나?

닷새쯤 그렇게 살다 보니 수상 버스라면 이가 갈릴 지경이 됐다. 배에서 바라다보이는 산마르코의 풍광은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 채 멀리 서 있는 희뿌연 박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관광객들이 풍기는 역겨운 땀 냄새와 뒤섞여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배에만 올라타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던 사진 기자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앉을 자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고, 운 좋게 자리가 나면 앉자마자 필사적으로 부족한 잠을 청한다. 매일 새롭게 밀려드는 관광객들은 똑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똑 같은 피사체를 향해 사진 찍기에 바쁘고, 어느새 베니스가 일터가 돼 버린 우리에겐 그들의 감탄사가 그저 소음, 벌들이 윙윙대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취재 도중, 베니스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여학생 두 명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이 멋진 도시에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기대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이들은 기회만 되면 베니스를 떠나려고 하죠. 이곳은 너무 심심하고, 왠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열흘 남짓 머문 내가 그런데,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동행한 후배 기자 역시 이국적 풍광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쳇바퀴 일상을 소화하다 보니 나중에는 얼굴색이 간암 말기 환자처럼 변해 버렸다. “베니스 왔는데 관광도 좀 하고 그래라.” 내 심드렁한 참견에 그도 심드렁하게 답했다. “영화 볼 시간도 부족해요, 선배.” 영화제 폐막을 이틀 앞두고, 나는 후배에게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베니스 하루 관광을 명했다. 약속 장소인 리알토 다리에서 두 시간을 서성거렸지만, 심드렁한 후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사진 기자는 꽤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가 남은 출장비를 탈탈 털어 가장 비싼 메뉴를 배불리 먹고, 지친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글을 쓴 최광희는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하고,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주간지 <필름 2.0>의 온라인 편집장을 거치며 쌓아 온 내공이 여행을 만나 맛깔스런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다. 팀블로그 '3M흥UP'(mmmm.tistory.com)에는 그 못지않은 4인의 필진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영화와 세상을 노래한다. 보다 내밀하고 자극적인 최광희의 영화 칼럼을 원한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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