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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특집 ① 여수, 순천 - 실루엣처럼 번지는 남도의 겨울 서정"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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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

우리나라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전라남도. 수많은 섬들과 땅끝마을이 들려주는 특유의 서정은 본능에 가까운 그리움으로 여행자를 끌어당긴다. 맛과 멋의 고장, 광주와 전남이 올해는 더욱 친근한 여행지로 다가올 전망이다.

‘2008 광주·전남 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이들 지역에서는 연간 다채로운 이벤트와 행사가 쉼 없이 펼쳐질 예정이기 때문. 풍성한 한 해를 앞두고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전남을 트래비가 찾았다. 아직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인지라 허허로운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색하지 않는 이 고장의 풍경 속에서 머지않아 다가올 따스한 봄을 예감할 수 있다.   

에디터  오경연 기자  
취재협조  솔항공여행사 02-2279-5959
www.soltour.co.kr



ⓒ트래비

대하소설보다 하루가 길다. 남도의 끝자락, 그곳에는 이성의 고지에서 감성의 평지까지 물이 흐른다. 실루엣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연인처럼, 오랜 그리움으로 간직했던 겨울 반도의 하루가 성큼 형체를 드러낸다. 가슴이 설레였다. 오후께 눈발을 보며 출발했던 여정이 남쪽을 향하면서 비로 변했다. 여수(麗水)로 향한 길은 제법 멀었다. 어둑해진 도시 사이로 사람들이 잠시 우산을 접을 즈음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밤 10시. 한적한 도시의 불빛들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아무리 서둘러도 첫날 일정은 무리인 시각. 여장을 풀고
이튿날 새벽, 향일암을 향해 나섰다.  

글 Travie writer 이세미  사진 류승일




ⓒ트래비
1. 향일암에서는 남해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 향일암 관음전
3. 향일암의 돌거북상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가 야속하기만 하다. 일출을 기대하고 발길을 부지런히 놀려 본다지만, 애초에 해를 보기는 그른 날이다. 위로하기로 하자. 흐린 비구름에 가려 있을 뿐 해는 여지없이 뜨는 것이라 여기면 암자를 향한 발걸음에 번뇌 하나는 내려놓은 셈인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일출을 기대할 일이다. 

기분 좋게 숨찬 경사를 딛고 오르는 계단의 초입에서 돌 거북상과 마주친다. 풍수지리상 바다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거북의 형상이라는 금오산의 몸통, 향일암답다. ‘바다를 향해 있는 암자’ 금오산 향일암이라고 쓰인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까지는 291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길목마다 욕심 하나씩을 내려놓고 뒤돌아보면 비에 젖은 남해의 모습에 가슴이 저릿하다. 거대하고 견고한 바위굴로 만들어진 해탈문을 지나 드디어 대웅전을 마주한다. 150m의 절벽을 발 아래로 두고 눈앞에 바다가 확연히 펼쳐지고 있었다. 공사가 한창인 대웅전에서 발길을 다시 위쪽으로 돌린다. 

원효대사의 수도도량인 관음전으로 가는 길목이다. 원효의 수행의 깊이를 감히 가늠해 보라는 듯 관음전으로 오르는 길은 어두운 바위굴을 거쳐야 한다. 수행의 심지를 드러내듯 바위굴 한편에 등이 밝혀져 있다. 해수관음상의 자애로운 눈빛을 잠시 마주하고 해탈의 경지를 맛보듯 관음전 앞에서 긴 호흡을 뿜어냈다. 저 멀리 수평선이 성속(聖俗)을 표시하듯 아스라이 흐린 새벽 위로 경계를 긋고 있었다. 

관음전 앞으로는 돌처럼 굳은 마음을 깨치듯 바위절벽 위에 원효대사가 좌선하던 바위가 망망대해를 마주하고 버티고 있다. 원효의 기개 앞에는 저 절벽의 파도조차 감히 잠잠했을 터이다. 속인의 마음이 어찌 그 수행의 깊이를 가늠하겠나. 그저 바닷가 절집에서 한 조각 평안을 얻고자 풍경이 허락하는 곳에서 제 몸을 맡길 뿐이다. 대웅전 오른쪽 길로 오르면 삼성각이 서 있다. 작은 거북 모양의 자연석 위로 인간 세상의 고통 덜기를 소원하듯 올려진 동전이 거액의 보시보다 경건하다. 거북의 시선을 따라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한참을 바다를 응시했다. 돌 거북 등같이 단단하고 갈라진 바위를 호위하며 후박나무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속인의 등 뒤로 원효의 일갈이 해풍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잿빛 바다 위로 안개는 자욱하고 빗줄기는 아직 그치지 않는다.




ⓒ트래비

2. 산책로
3. 해안동굴
4. 오동도 등대
5. 사누대 대나무 터널


빗방울은 여전하지만, 새벽이 완연히 사라지고 풍광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는 단숨에 돌산도에 걸쳐 있던 450m의 돌산대교를 지난다. 미끄러지듯 돌아나는 길목 너머로 줄에 널린 파래가 해풍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갯마을 어귀의 어선들은 가지런히 혹은 제멋대로 갯벌 위에서 몸을 뒤틀었다. 미항(美港) 여수의 단면들이 시선을 파고든다. 들고 나는 파도에 맞춰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는 사이 오동도 방파제로 들어섰다. 좌우로 바다를 대동한 768m의 길목이 유려한 전주곡 같다. 

동백(冬柏)의 섬, 오동도.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섬을 뒤덮고 있는 동백섬을 굳이 오동도라고 부르는 것은 섬의 생김새가 오동나무 잎처럼 보인다고 해서다. 오동도 동백은 말 그대로 겨울부터 피기 시작해서 봄까지 꽃을 피운다. 봄에만 피는 선운사의 춘백과는 다르다. 먼 옛날 오동도에 아름다운 여인과 어부가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 도적이 들어 부인을 겁탈하려 하자 도망치던 부인이 벼랑 바다에 몸을 던졌다. 돌아온 지아비는 슬피 울며 오동도 등대 양지바른 기슭에 무덤을 지었는데 그해 겨울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었다고 한다. 해서 동백은 때로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여심화’로 불린다. 붉디붉은 절정의 삶을 살다가 한순간 온몸으로 낙화해 버리는 동백의 순정이 이 겨울에 여지없이 섬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맨발 산책로를 따라 오르다가 휘영청 우거진 시누대 대나무 터널을 지난다. 시누대는 가늘고 힘이 없어 화살촉으로 사용했다는 그것이다. 봄을 착각한 동박새가 이따금 날개짓 할 뿐, 동백의 섬은 고요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커다랗고 말끔한 오동도 등대를 올라 본다. 섬 둘레는 더욱 확연하다. 동백이 무성한 군락지와 저편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바다 위로 출렁이고 있었다. 등대에서 내려 길 오른쪽 키 큰 동백림을 따라 내려가면 불현듯 움푹 패인 골짜기를 맞게 된다. 낮은 골짜기를 타고 해풍이 불어온다. 바로 용굴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계단을 따라 벼랑 저 아래로 커다란 해안동굴이 보인다. 절벽 바로 아래 철썩이는 흰 포말이 굴 입구를 들락거리며 바다의 정취를 부채질했다. 오백년 묵은 지네가 출몰했다는 전설을 뒤로한 채 갯바위를 오가며 사진 포인트를 찾는 관광객의 모습이 밝기만 하다. 객들의 웃음소리가 발길에 짓밟힌 동백 꽃송이 위로 겹쳐진다. 오동도. 비에 젖은 동백의 순정이 너무도 처연하다.




ⓒ트래비

1. 철새들의 비명
2. 흑두루미
3. 순천만 전경


무진(霧津). 순천만을 향하는 길목에서 이 지명이 먼저 떠오른 것은 아마도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탓이리라. 안개 덮인 나루, ‘무진’이라는 지도상에 있지도 않은 그곳의 무대인 순천만은 늘 하나의 꿈이었다. 물리적 공간 이전에 그곳은 언제나 길 위의 이들에게는 추상적 그리움의 대상이다. 소설 속의 글귀처럼 무진의 안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한다. 그래서 무진은, 아니 순천만은 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탈일상의 공간이며 몽환적인 공간이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머물 수는 없는 곳. 그래서 한나절 또는 이틀, 혹은 소설 속의 ‘나’처럼 2박3일로 족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꿈 사이의 팽팽한 대립의 공간, 그곳에서 울어대는 갈대의 울음을 들으러 간다. 

미항을 등지고 길은 순천으로 이어진다. 고흥과 여수에서 뻗어 내린 지맥이 만을 이룬 곳, 순천만. 드넓은 갯벌과 갈대밭, 섬, 그리고 산으로 이루어진 연안습지. 희귀 조류와 갯벌 생물이 공존하는 생명의 땅으로 2006년에는 람사협약(국제습지협약)에 등록되기도 했다. 230만m2의 누런 갈대밭은 잿빛 질펀한 갯벌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성근 마음자락 위로 순천만의 벅찬 서정이 차오른다. 

순천만에 갈대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이다. 순천 시내를 흐르는 하천에 유기물이 공급되면서 지금의 거대한 갈대밭이 탄생했다고 한다. 주차장 입구의 자연생태관을 지나 산책로를 거닐며 갈대에 넋을 빼앗길 즈음, 흐린 하늘 위로 한 무리의 새가 떼지어 날아가는 장관이 펼쳐졌다.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 떼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을 향한다. 새들은 V자를 그리는 듯하더니 다시 갖가지 형태를 이루며 비행을 펼친다.  

순천만은 곡선의 미학 그 자체다. 잘 알려진 이곳의 물길이, 철새들의 날갯짓이, 안개 속에 아련히 드러나는 산의 실루엣이 그러하며 부드럽게 휘어지는 가는 갯고랑과 마른 갈대의 흔들림, 불어오는 짠 바람이 또한 그러하다. 직선에 길들여진 모든 것들은 순천만을 거니는 동안 갈대의 수런거림 속으로 완만하게 흡수된다. 순천만의 유명한 S자 물길을 보려면 입구에서 3km 떨어진 용산전망대에 올라야 하건만, 시간이 충분치가 않다. 대신 탐조선을 타고 물줄기를 거슬러 순천만의 속살을 엿보기로 했다. 

서둘러 배에 올랐다. 제대로 된 광경을 보고자 욕심을 부려 배의 실내보다는 뱃머리쪽을 택했다. 갈대밭 사이 물길을 가로지르며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간혹 건너에서 마주 오는 탐조선이 일으키는 물결과 맞부딪혀 배가 뒤뚱거렸다. 아이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 청둥오리 떼는 탐조선이 일으키는 파도 위를 꽁지를 흔들며 장난치듯 유영한다. 혹시 갯벌 위로 무언가 고물거리지 않을까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지만, 배는 쏜살같이 옆을 지나친다. 저기 갈대숲 한편으로 보이는 흑두루미는 부동자세로 제 주위를 기웃거릴 뿐, 인간들의 부산스러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제 집을 찾아드는 이들처럼 한 무리의 혹부리 오리떼가 황급히 갈대 숲 사이로 몸을 숨긴다. 

어느새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갯벌에 물이 들고 있었다. 대대포구에 잠시 섰다. 허허롭다. 휴식에 든 탐조선에 시야를 고정하는 사이 버스 탑승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대밭 사이, 다시 무진의 안개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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