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ie with Wine - 여자와 와인
Travie with Wine - 여자와 와인
  • 트래비
  • 승인 2008.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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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저널리스트들은 솔직하고 담박하다. 와인은 미술품처럼 수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셔 없애는 존재이며, 귀족문학처럼 무의미한 수사가 동원될 만큼 철학적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밀린 숙제하듯 와인을 마셔야 할때가 있는 전문가들은 ‘이 와인은몇 점’이라는 숫자놀음에 지쳐 ‘상징의 재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미국 와인에서는 쇳내 같은 달러 냄새가 나지. 아무렴.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에서 익은 포도가 무슨 죄가 있겠나. 그 포도가 거대한 스테인리스 발효조에 담겨지는 순간부터 포도는 푸른색 지폐 냄새를 풍기게 되지. 프랑스 와인은 또 어떤가. 샤넬 향수의 라인업이 연상되고, 아르헨티나 와인에서는 여전히 유럽 대륙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 느껴진다네. 참, 그런데 칠레 와인을 마실 때는 왜파블로 네루다의 시구가 떠오르지 않는 거야?”

필자는 와인이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와인은 다종다양한 옷을 입으며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신라면처럼 똑같은 피복을착용하지 않는다. 당신이 와인을 고르기 위해 와인 전문점에 들렀다면 우선 화려한 옷(라벨)을 입은 와인은 피하고 볼 일이다. 뭔가 내용이 없는 존재일수록 ‘액면’이 요란한 법이니까.

와인을 처음 고른다면 값이 싸면서 수수한 와인을 고르시라.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와인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당신의 은행 잔고가 넉넉하다면 외모가 수수하되 엄청 비싼 와인을 마셔 보는 것도 좋다. 다만‘ 비싼 와인의 라벨이 심플하게 디자인된 이유’를 알게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좋은 와인은 첫 맛에 당신을 매혹시키지 못한다. 헤어진 후에 향기를 남기는 여자처럼 와인은 다 마시고 난 후 혀끝에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이 진짜다. 또한 좋은 와인은 여자처럼 단박에 친해지기 어렵다. 첫 만남에서 속을 다 보여주는 바보 같은 여자가 없듯 와인도 자신의 속을 좀체 다 보여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탐색기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와인의 제 맛을 알게 된다. 대체로 어설픈 와인은 설탕처럼 인공의 감미가 강하다. 달콤한 와인은 혀를 쉽게 속이지만 이내 싫증이 난다. 

오래 묵은 와인은 나이든 여자처럼 복잡하다. 생산년도가 오래된 와인은 코르크를 열고 나와 공기와 접촉하기 전까지 자신을 철저히 감춘다. 그래서 익히 명성이 높은 장기 숙성  와인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어야 실패 확률이 적다. 맛이 변질됐다면 바꿔 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 숙성 와인은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저장되고 숙성됐는지가 중요하다. 습도와 온도가 맞지 않는 곳에서 저장된 와인은 따는 순간 당신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

그럼에도 오래된 와인은 원숙한 여인처럼 훌륭하다. 장기 숙성 와인은 병입 후 오랜 세월 고차원 방정식으로도풀 수 없는 불가해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숙성의 깊은 맛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값이 비싼 것은 당연하다.
 
몇십년을 묵힐 수 있는 장기 숙성 와인은 아무 품종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카베르네쇼비뇽, 템프라니요(Tempranillo), 네비올로(Nebbiolo) 등 매우 제한된 품종으로만 숙성시킬 수 있다. 대개 와인 숙성의 한계는 신기하게
도 인간, 그것도 여자의 수명과 비슷한 100년 미만으로 보고 있으며, 대개 20~30년까지 숙성된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참으로 묘한 숫자적 일치다.

똑같은 와인이라도 마시는 사람마다 다른 맛과 감동을 준다. 남이 맛있다고 한 와인이 내게는 무미건조한 와인일 수 있고, 천하의졸작으로 평가 받는 와인이 내게는‘걸작’이 될 수 있다. 와인과 여자는 상대성이란 어려운 명제를 쉽게 전달한다. 연간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수는 200억병 정도. 똑같은 라벨을 붙였다 하더라도 와인은 병마다 미세하게나마 독자적인 맛과 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와인의 총 생산병수와 종류는 같다고 과장되게 말하는사람마저 있을 정도다.

사랑에 목마른 이여. 와인을 마셔라. 이왕이면 싸구려 와인부터 마시도록. 혁명이 저 밑으로부터 시작되듯이.

글을 쓴 박찬일은 요리하고 글쓰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주부생활>, <우먼센스>의 기자 생활 뒤 홀연히 요리와 와인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의 거침없는 사고와 자유분방함은‘맛있는 세상’을 요리하는 그만의 독특한 레시피다. *위 글은 넥서스에서 출간한 <와인 스캔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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