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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번역가 이미도 - 여행 위도와 경도를 표시하는 내 삶의 지도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3.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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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익살스러운 표현을 빌자면 그는 기자가 만난 최고의 수다쟁이였다. 던지는 질문마다 막힘 없이 쏟아내는 답변들을 듣고 있노라면 숨은 쉬고 있을까 염려될 정도다. 남성치고 가늘고 높은 음성 또한 그의 주장들을 또렷하게 전달하는 힘이 된다.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참인 듯, 아메리카노 두 잔을 연거푸 비우며 마른 침을 삼키면서도 답변은 막히질 않았다.
최근 영화 산문집을 내고 번역가를 넘어 작가로의 활동 영역을 확장한 그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오십을 목전에 둔 남자의 눈은 십대 소년의 그것처럼 반짝이는 꿈으로 가득했다. 이념과 노선, 좌익과 우익을 나누기보단, 그저 ‘유익(有益)’을 좇아 세상을 항해하는 남자. 긍정의 힘으로 그가 번역해 온 삶은 미치도록 눈부셨다.   


친절한 번역가
‘Mr. 이미도’

언제나 영화가 끝나면 엔딩 크레디트 대미를 장식하는 이름이 있었다. 외화번역가 ‘이미도’라는 굵은 글씨가 검은 스크린을 스르륵 훑고 내려갈 때면, 다수의 관객들은 ‘잘 나가는 여성 번역가’쯤으로 치부하며 극장을 나서기 일쑤였다. “이러다 나도 어느 가수처럼 바지라도 내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첫인사부터 이미도는 자신의 성별에 관한 선입견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미도(美道)’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여성스런 이미지 때문일까. 그를 알기 위해선 먼저 이름부터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아름다운 길, 미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을 내포한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본명. 모두가 본인의 이름처럼 삶이 결정되고 살아진다면, 아마 이미도만큼 적절한 예도 없을 테다. 그만큼 그와 영어는 뗄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결합체다.

영화가 부흥을 누리던 시절, 번역가 이미도는 만인의 영어 선생이었다. 은연중 영화 속 자막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영화 속 인생과 마주했다. 지난 15년간 그가 번역한 450여 편 가운데 <와호장룡>, <슈렉> 시리즈, <식스 센스>, <뷰티풀 마인드>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이제는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도 선호하는 번역자의 아이디 한두 개는 고집하는 시대, ‘번역가 이미도’란 타이틀을 극장에서 마주한 순간 술렁이는 객석의 분위기만으로도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번역가다.   

여성인 줄 알았더니 남성이고, 그렇다 보니 그 이미지가 철저하며 날카로울 것 같다는 게 다수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성공한 번역가라는 말에도, 최고라는 수식어에도 손사래를 치는 수줍고 겸손한 남자였다. “제가 번역한 작품 가운데 흥행작들이 많아 그런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장르가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 영화니까. 연극이나 소설 번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드러나는 것뿐인데요.”

스타벅스와 해운대, 그의 사적인 작업실

61년생. 외화 번역가 겸 작가. 희끗한 머리칼이 로맨스를 부추기는 중년 남자의 싱글라이프는 어떨까. 그의 하루 일과는 휘황찬란한 ‘별천지’, 한마디로 스타벅스에서 시작해 스타벅스에서 끝나곤 한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뉴스를 보죠. ‘YTN’이랑 ‘CNN’ 같은. 그러다 오전 7시면 동네 스타벅스에 출근해요. 집에선 긴장도 풀리고 늘어지니까.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신문을 3가지 정도 읽는데, 마음에 드는 글귀는 스크랩도 해요. 제가 좀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관심이 많거든요. 스타벅스가 다른 카페들과 다른 이유는 무선 인터넷이 깔려 있다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노트북 사용하기도 좋고, 또 퀵이랑 택배서비스 받기도 편하고.(웃음) 말하고 보니 너무 된장남 같은가요?”
그의 스타벅스 예찬론은 공간이 한 사람의 작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고 보면 이미도에게서는 21세기 유목민, 늘 자유롭고 싶어하는, 혼자놀이의 고수가 되어야만 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이 엿보이기도 한다. 외롭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왜 외로워요?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저는 책 읽고 글 쓰고 생각하고 창작하는 이 모든 게 다 즐거워요.(잠시 생각하다) 그러다 정말 외로워지면 가끔 부산 해운대로 훌쩍 내려가죠 뭐.”  

스타벅스에서 평균 하루 8시간 정도 일한 그는 한 작품이 끝나면 부산 해운대를 찾는다고 했다. 말없이 백사장을 거닐거나, 역시 해운대 앞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에 앉아 작업을 마무리할 때면 그처럼 평온한 순간이 없다고. 매일 스타벅스에서 생활하며 늘 다른 하루를 보내고, 여행지에서는 또 일감을 찾아 고민하는 그에게 일상은 여행이고, 또한 여행은 일상처럼 보였다. 

여행이란 마음의 지도에 위도와 경도를 표시하는 것

영어에 너무도 완벽한 이 대단한 남자는 사실, 미국 생활을 오래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외대에서도 스웨덴어를 전공했고, 어학연수 또한 다녀온 적이 없다. 미국에 머문 기억이라고는 평생에 2년 남짓.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영어만큼은 분명 등 푸른 활어처럼 역동적으로 숨쉬는 것이었다. 

스키를 좋아하는 터라 일본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교교한 밤, 료칸에 가만히 앉아 청주 한잔을 마시는데, 멀리 푸드득 소리가 났어요. 나무 가지가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진 통에 새가 놀라 달아난 거죠.” 니가타의 겨울 서정에 대해 단 몇 문장으로 표현하는 그의 서술은 참으로 맛깔스럽고 문학적이다. 역시나 세 번째 책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가 재미있는 이유를 알겠다. 그는 때론 카피라이터이며, 유창한 달변가, 자상한 영어 선생님처럼 영화와 영어를 접목한 에세이집을 훌륭히 완성했다.

외국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어떤 영어 공부가 도움이 될 것 같냐고 묻자, 그는 확고한 목소리로 조언한다. “외국 8~9세 아이들이 보는 영영사전 있잖아요?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다 외우고 체득하세요. 그 사전에 수록된 것들만으로도 여행지에서 유창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언어를 잘 해야 그 나라에서도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잖아요.”
이미도에게 여행이란 무언지, 트래비 독자들을 위해 영어로 답해 달라 물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생각 뒤 메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아름다운길다운’이라는 이름의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Traveling is making latitudes, longitudes, and lighthouses in the map of my heart and life.”

여행은 그의 마음과 인생의 지도에 위도와 경도, 그리고 등대를 만들어 주는 숭고한 의식이라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어느 별다방에선가 보내 온 편지 한 통에서 그 뜨거운 열정에 감동을 느꼈다. ‘번역자는 반역자’라는 오해와 편견 속에서 성공을 이룬 이미도에게 작가로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늘 우리 곁에서 영화만 읽어 줄 것 같은 남자는 이제 자신의 지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늘 소년 같은 열정으로 유익한 항해가 계속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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