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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종교로 빚어낸 삶의 여유 City2 아우랑가바드(Aurangaba)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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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에서 차를 타고 12시간을 달리면 데칸 고원의 황량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차도, 사람도 더없이 순정한 이 시골마을은 아잔타·엘로라 석굴로 가기 위한 관문. 가까운 지역에 나란히 자리한 불교와 힌두교 사원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더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일러준다.

뭄바이에서의 화려한 도시 생활도 잠시, 중심을 벗어나면 이내 풍경은 희뿌연 평야로 뒤바뀐다. 여행의 시작이 뭄바이였다면 다음 목적지로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를 선택하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루트. 다수의 여행자들이 이 낯선 도시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는 그를 통해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과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불교, 힌두교, 자인교의 흔적이 순차적으로 보존된 ‘엘로라 석굴’, 오로지 불교의 정수만을 고스란히 남긴 ‘아잔타 석굴’은 인도를 넘어 세계적으로 최고의 문화유적이라 평가받는다. 하지만, 수행자들을 위해 산 속 깊숙이 마련된 두 개의 석굴을 찾아가는 여정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가급적 하루에 한 군데씩 둘러보는 것이 좋은데, 사전에 편안한 복장으로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하도록 하자.

과거 무굴제국의 화려한 권세와는 달리 아우랑가바드의 현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사실,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데칸 고원(Deccan Plateau) 일대를 장악한 무굴 제국으로 인해 아우랑가바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심지어 황제 ‘아우랑제브가’가 통치를 맡으며 이곳을 ‘자신의 도시’라 칭했을 정도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권세는 꿈처럼 짧다고 했던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집요하게 발생한 힌두교인들과의 전투는 결국 무굴 제국의 쇠락을 가져왔다. 도처의 성곽들 가운데 ‘다울라타바트’는 외군의 침략에 대처해야만 했던 아우랑가바드의 ‘눈부신 날들’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데칸 고원의 먼지 날리는 평야만이 아우랑가바드의 전부는 아니다. 화려했던 과거 시제를 품고 미련스레 살아가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긴 세월에 걸쳐 쌓아온 고도(古都)로서의 위용을 새삼 상기해 보는건 어떨까. 역사의 흔적은 결코 한낮 과거의 영예로 사라지지 않듯 말이다.

비비 까 마끄바라 서인도에서 즐기는 타즈 마할

인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그 자체로 인도의 또 다른 이름인 ‘타즈 마할’. 그를 본따 만든 것이 아우랑가바드에 자리한 ‘비비 까 마끄바라(Bibi Ka Maqbara)’이다. 이는 자칫 석굴과 고원 같은 무채색 이미지로만 끝날 여행에 화사한 색조를 더해준다. 

청아한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가운데, 비비 까 마끄바라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실, 타즈 마할을 본 적이 없는 이들은 이마저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혹자는 그 규모나 위용 면에서 한참 뒤진다고는 하나, 어쨌든 눈앞에서 타지 마할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잠시나마 북인도를 여행할 수 있어  반갑다.

이곳은 아우랑제브 황제의 첫 번째 부인의 무덤으로 효심 지극한 큰아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수면 위로 비치는 사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채화가 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짜 인도’의 모습을 간직하게 한다. 사실 인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북인도에서 벗어나 있는 여행객에게는 잠시나마 모조품을 통해 위로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 


1 수면 위에 미친 비비 까마끄바라는 실제보다 더욱 아름답다  2.3 다올라타바드의 성곽은 워낙 높고 험난해 아이들마저도 숨이 차다

다울라타바드
 데칸 고원을 지킨 역사의 흔적

엘로라로 가는 길목에 아우랑가바드의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황량한 데칸 고원에 자리한 이 거대한 성은 14세기의 왕 모하메드 투크라크의 결과물. 그는 번영의 도시를 기원하는 의미로 성의 이름을 ‘다울라타바드(Daulatabad)’라 지었다. 
5km의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을 따라 오르면 승전탑인 찬드 미나르(Chand Minar)와 만나게 된다. 붉은 진흙 빛을 내는 원통형 기둥은 그 높이가 인도에서 두 번째로, 1435년 이곳을 정벌한 왕에 의해 세워진 기념탑이다.

산 정상에는 비밀스런 감금 공간인 치니 마할(Cini Mahal)이 있는데, 인도 독립 전까지 무시무시한 감옥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번 쳐들어온 군인 역시 이곳을 통해 절대 나갈 수 없도록 곳곳에 함정들을 가득 설치해 놓았다. 특히나 적을 가둔 홀 안에 굶주린 악어를 집어넣는다든지, 칠흑 같은 동굴 끝에서 실명을 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매우 잔인하고 가학적인 방법들로 무장되어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원 위의 성터라 무더위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땀을 흘리며 정상까지 오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데칸 고원의 풍경은 장엄하기 그지없는데, 그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순간 인도의 대자연과 만났다는 감동이 밀려온다.

“Don’t Give Tips?”
다올라타바드에서 산 정상에 닿으려면 반드시 어두컴컴한 바위 동굴을 관통해야만 한다. 천장 위로는 수백 마리의 박쥐들이 작은 놀람에도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발아래 습기찬 돌계단은 미끄럽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절대공포의 순간, 이때 10루피 정도를 기부하면 상주하는 인도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가 손전등을 비춰주는 방향을 따라 동굴을 빠져나오면 되는데, 이때 가급적이면 의연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도록 한다.


엘로라 석굴군
신앙의 힘이 피워낸 종교예술 

아무리 새로운 감동을 찾아 서인도행을 결심했다 해도, 인도는 궁극적으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것은 오체투지를 통한 수도의 길도 아니며 단순한 성지순례를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종교를 자연스레 체득하는 일, 그러니까 열린 마음으로 되도록 많은 것들을 찾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종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유기적으로 촘촘히 얽혀 있는 인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종파의 공존.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인들은 10%의 무슬림을 존중하며, 소수의 자이나교와 희미한 흔적으로 기억되는 불교조차도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종교라고 여긴다. 이처럼 여러 종교들이 나란히 공존하는 석굴이 있으니 ‘엘로라(Ellora)’가 그것이다. 

6~8세기 굽타왕조시대에 조성된 이 석굴은 아우랑가바드 북동쪽 29km 지점, 차로 족히 2시간 거리에 위치한다. 데칸 고원의 황량한 기후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 더위를 피해 신앙심을 키울 동굴을 만들게 했던가. 세계가 엘로라 석굴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칭송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앙심으로 빚어낸 ‘장엄함’ 때문이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초자연 적인 신앙심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원 구축 방법은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석굴이라 하면 공간을 파고 그 안에 조각상을 모시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엘로라 석굴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통째로 조각해 완성했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의 균형과 신상의 정교함에는 전혀 손색이 없으니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총 34개 석굴 중 불교 석굴은 12개, 힌두교 17개, 자이나교는 5개를 차지한다. 6세기경부터 시대 순으로 불교(1~12번)에서 힌두교(13~29번), 힌두교에서 자이나교(30~34번)로 순서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들은 기존 종교가 완성한 석굴 옆으로 자신의 종교 양식을 세웠는데, 대단한 것은 같은 장소에 여러 종교가 거쳐 갔음에도 전혀 타 종교 유물에 훼손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엘로라의 정수는 단연 힌두 사원. 네루의 말대로 ‘불교가 자연사한 뒤 이날까지 영구불변하게 인도인들의 반석이 되었을 힌두’의 사원이라 극적 생명이 흘러넘친다. 그중에서도 거대한 암벽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뚫어 나간 16굴 카일라쉬 사원(Kailash Temple)이 압권. 히말라야 산에 있는 시바의 신전 카일라사를 재현한 것으로 그 크기만 해도 아테네 파르테논 일대의 두 배에 달한다.

반면, 가장 먼저 만들어진 불교 석굴은 매우 단조로운 양식을 띠며 편평한 천장 아래 사각형의 홀과 스투파(Stupa; 유골을 매장한 인두의 화장묘) 뒤쪽에 후진을 갖추고 있다. 자이나교 동굴 사원들은 조각의 내용만 다를 뿐, 초기 브라만교의 디자인과 장식을 따르고 있다. 

엘로라 투어
화요일을 제한 수~월요일 오전 9시30분~오후 5시30분 사이 관람할 수 있다. 엘로라를 즐기는 가장 쉽고 정직한 방법은 오로지 ‘도보’로 1.6km에 걸쳐 차례로 늘어선 석굴들을 종교 순으로 훑어보는 것이 좋다. 편안한 신발과 생수, 모자를 반드시 챙기도록 한다. 


1 엘로라 석굴군 가운데 16번째 힌두교 카이라사나타 사원. 깊이 83m, 폭 46m, 높이 35m의 거대한 조각상이다 2 여인들이 차려 입은 화사한 사리는 석굴을 배경으로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아잔타 석굴군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불교 회화  



1819년, 아우랑가바드로부터 107km 지점. 호랑이를 잡아 오라는 명령에 사냥을 나선 영국군인 존 스미스는 와고레강 기슭에서 길을 잃고 만다. 사방은 온통 첩첩산중인 데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던 그때, 그는 절벽 위의 풍경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친 수풀 속에서 잠자던 1,100년 전 불교 미술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곱게 덮인 먼지를 걷어내자 아름다운 벽화 무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교의 쇠퇴와 함께 자연 속에 묻힌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이 다시 세상과 조우한 건 채 200여 년이 되지 않는다. 기원전 2세기부터 650년까지 조성된 석굴은 아래 와고레 강을 굽어보며 나선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늘 한 점 없는 한낮의 더위는 석굴을 감상하는 데 상당한 체력을 요하므로 출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가파른 암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낸 굴은 모두 28개. 내부에는 불교 경전과 관련된 벽화들을 빼곡하게 그려뒀는데, 그림의 정교함은 물론 색감 또한 빼어나 실존하는 불교 회화 가운데 가장 경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왔던 아잔타는 미숙한 복구 작업으로 인해 현재 훼손상태가 상당히 심각한 편이다.

이 동굴들은 초기 불교 건축 양식과 벽화, 조각 등의 가장 완벽한 표본이다. 동굴군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9,10,19,26번 동굴은 차이티야(Chaitya, 사리가 없는 탑)이고 나머지는 비하라(Vihara, 절)이다. 아잔타 동굴 벽화는 부처의 생애와 다양한 부처의 신성을 묘사하였다. 불상, 보살상은 물론, 부다의 전생 이야기와 그의 이복동생 난다와 아내 순다리의 이야기 등 상상력이 가미된 종교 속 벽화들이 흥미롭다.

아잔타 동굴 벽화들은 이와 같은 종류와 시기의 인도 회화가 드물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인도 석굴 건축 발전 연구를 위한 교육적인 토대를 제공하며, 내부의 조각들은 불교의 원천인 인도인들의 신앙심과 그 기품을 짐작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 아잔타 석굴군의 전경. 총 28개의 동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1 2 불교 성전과 관련한 다양한 신화
들이 회화로 남아 있다

아잔타 투어
월요일을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30분 사이 관람할 수 있다. 석굴 내부가 상당히 어둡기 때문에 손전등을 대여해 관람하는 것이 좋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차로 3시간 거리.  아잔타에서는 다리가 아플 때면 언제고 사람이 직접 끄는 가마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구경이 끝난 뒤 입구로 돌아갈 때 이용하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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