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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 Wine - 빈티지에 속지 않기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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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은 종종 빈티지(Vintage)의 노예가 된다. 스스로 중급자 정도의‘내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 더 흔하다. 빈티지를 ‘가려’ 마시게 됨으로써 와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년산 생테밀리옹이 어떠니 토스카나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때쯤이다.

솔직히 금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2000년산 보르도 그랑크뤼가 열광과 숭배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필자는 적지 않은 냉소를 가지고 있다. 2배의 가격에 물건도 없다는 소위 ‘수퍼 빈티지’에는 거품이 없는 것일까. 과연 2~3배의 값어치를 하는 것일까.

이런 놀라운 빈티지들에 끼어 있는 거품은 다분히 와인 중개업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일부 언론이나 전문가들의 농간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빈티지이기에 매년 같은 포도밭에서 똑같은 보살핌을 받고 자란 와인 값이 2~3배의 값을 보이느냐는 것이다. 특히 세계 와인 값을 좌지우지한다는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말 한마디에 가격이 널뛰기를 하는 현상을 적잖이 봐왔다.

이런 뒷정황을 살펴보면, 보르도 2000년산 그랑크뤼가 꿀맛이라서기보다 향후 값이 무섭게 뛸 가치가 있다는, 즉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 ‘파이낸스’로 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값 상승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와인을 수십병이나 수백병씩 쟁여 두고 20~30년 후에 되팔려는 야심가가 아니라면 그런 보르도 와인을 2~3배의 값을 주고 마실 필요는 없는 셈이다.

평범한 와인 애호가들이 사토 라투르나 샤토 오브리옹 같은 어마어마한 값의 그랑크뤼를 골라 1999년, 2000년, 2001년산을 두루 갖춰 놓고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 빈티지별 테이스팅)을 한다면? 2000년산을 꼭 집어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최고급 와인들은 근래 10년간 가장 좋지 않은 빈티지라고 말하는 1997년산조차도 매우 뛰어난 맛이니까 말이다.

필자는최근1997년산 샤토 마르고와 샤토 오브리옹을 마셨는데, 왜 이 빈티지가 천대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빈티지를 따지는 태도는 와인이 생활의 일부가 된 서양에서는 다분히 의미있기도 하다. 집에 와인 저장고를 갖추고 수십년 후에 마실 와인까지 고려하는 서양 사람들(물론 그들조차도 부자들에게나 해당되지만)에게는 오래 묵혀도 힘을 잃지 않고 때로는 더 빛나는 가치를 발할 빈티지와인을 찾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변변한 와인 셀러도 없고 그나마 사들인 와인을 제 맛이 나기도 전에 마시기 일쑤인 우리네에게 빈티지가 주는 의미와 가치는 다른 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역시나 ‘속지’ 않기 위함이다. 앞서 말했듯이 보르도, 부르고뉴 같은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토스카나의 와인들은 빈티지에 따른 품질과 가격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가격 반영의 첫 번째 기준이 되는 소비자들의 빈티지 차트는 지역별로 기록되어 있지만, 생산자나 소 생산지역별로 세분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모든 보르도 2000년산이 다른 빈티지보다 비쌀 이유는 없다.

“이 와인은 보르도 2000년산입니다. 당연히 비싼 값을 치르셔야 합니다.” 이 문장은 모호하다. 그러나 와인숍이나 레스토랑에서는 절대 명제로 둔갑하기도 한다. 필자가 들른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시중가보다 훨씬 비싸게 매긴(바가지를씌운) 2000년산 보르도 와인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와인을 잘 아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당신이 와인에 대해 뭘 알겠어), 보르도 2000년 수퍼 빈티지 와인입니다(알아서 기는게 좋을 것 같은데?). 수입량이 적어 희귀합니다(지금 마시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걸?).”

보르도 2000년산 와인의 대부분이 농사가 잘된 것은 맞지만 모든 와인 값이 비싼 것은 아니다. 오래 묵힐 수 있을 만큼 힘이 있고, 묵혀서 맛이 더 좋아지며, 나중에 되팔더라도 값이 많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와인에만 해당된다.

글을 쓴 박찬일은 요리하고 글쓰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주부생활>, <우먼센스>의 기자 생활 뒤 홀연히 요리와 와인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의 거침없는 사고와 자유분방함은‘맛있는 세상’을 요리하는 그만의 독특한 레시피다. *위 글은 넥서스에서 출간한 <와인 스캔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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