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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재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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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 위드 무비>

재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글 영화 칼럼니스트 최광희



지난여름 러시아에 놀러 갔을 때 일이다. 모스크바에서 빼째르부르그 행 밤 기차를 탔다. 침대칸에서 한창 자고 일어나보니 해는 거의 중천에 떠 있는데 기차가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멈춰 서 있는 것이다. 예정대로였다면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모스크바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어 노어가 능통한 선배가 동행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로 24시간을 꼬박 열차 안에 갇혀 있을 뻔했다. 이유는 앞서 달리던 열차에 테러 사건이 벌어져 열차 한 량이 탈선했기 때문. 아마 체첸 반군의 소행이 아니겠냐는 추측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선배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TV 뉴스를 통해서만 접했던 테러 사건이 내가 탄 열차의 바로 앞에서 벌어졌고, 그 여파로 우린 뻬째르부르그를 향해 느릿느릿 구불구불 우회로를 찾아 나선 기차에 운명을 의탁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식당 칸에서 넉넉한 식량과 음료수를 확보한 일행은 그 지루하고도 지루한 시간을 마치 모험에 나선 톰 소여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꽤 흥겹게 보냈다. 선배는 우리의 그런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내 안절부절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선배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 러시아는 자신의 일상을 영유하는 공간이었으므로, 그런 불편함이 더욱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객의 입장이었던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그 돌발적인 불편함이 오히려 여행의 흥을 돋우는 각별한 이벤트와도 같이 느껴졌던 것이니, 같은 상황이 입장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계기였다. 

이를테면, 재난 영화를 관람할 때 느끼는 재미란 것 역시 아마도 내가 러시아에서의 기차 안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재해의 현장은 등장인물들을 극단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우리는 그런 살풍경을 손에 땀을 쥐며 바라보지만 만약 스크린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그 재난에 동참할 수 없는 객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면, 아마 10분도 못 견디고 극장 문을 뛰쳐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재난 영화를 즐기게 만드는 진짜 심리적 기제는, 객석에 앉아 있는 나만큼은 안전하다는 보장이다.

다시 러시아의 기차 안으로 돌아가 본다면, 나는 그 때 우리 스스로는 안전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선배는, 체첸 반군과의 시가지 교전 현장에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사이를 기어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로선 불안이 엄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잇따라 무너진 뒤, 내가 지하철 타기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중국 쓰촨성에서 일어난 대지진 소식이 연일 뉴스를 달구고 있다. TV를 통해 전해오는 현장의 모습은 참혹해 보이지만 브라운관은 여전히 내 일상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의 안정적 거리감을 확보해주고 있다. 굳이 역지사지의 미덕을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러시아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그들이 당하고 있을 고통을 조금이나마 가늠하기 위해 노력해 보기로 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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