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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동진-당위의 압박에서 벗어난 여행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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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동진
당위의 압박에서 벗어난 여행

아무래도 여행은 미래 준비형일 때 더 설렌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다.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 속에 자연스레 품게 되는 ‘기대’는 상상 이상의 활력으로 삶을 살찌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글이 그렇다. 영화 마니아들은 그의 리뷰를 본편보다 즐기며, 촌철살인 같은 비수와 충만한 감수성이 공존하는 20자평을 더 없이 고대한다. 이 명석한 필력의 소유자가 영화와 여행이 결합된 여행에세이를 내놓았을 때, 모두는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특별함을 부여했다. 사변적인 여행기마저도 이동진이기에 특별해지는 이유들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박나리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곽은정



1 <시네마 기행> <시네마 레터>에서 최근작 <필름 속을 걷다>까지. 영화를 테미로 한 그의 글쓰기는 전방위적이다 2 사무실 한 켠에 자리한 아담한 200리터짜리 냉장고는 세계 전역에서 모은 마그네틱 기념품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다


이번 인터뷰 기사는 ‘기자’라는 3인칭 대신, ‘나’라는 1인칭 시점을 빌기로 한다. 일찌감치 인터뷰어의 입장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팬이 되리라 마음먹고 보니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그저 영화를 테마로 세상을 누비는 ‘여행가 이동진’이 된다. 적어도 우리가 만나는 몇 시간  만큼은 그랬다.

이제 15년차에 접어든 화려한 필담의 영화 평론가 앞에 인터뷰어로서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부담스런 일이다.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을 막론하고 긴긴 시간 심도 깊은 인터뷰를 나누는 노련한 기자 앞에 거추장스러운 자기 방어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러느니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라디오를 통해 익히 들어 오던 담백한 음성이 곧 이동진 기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예전엔 제가 인터뷰이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죠. 근데 지금 제가 제일 중요시 하는 건 그 사람의 말을 가급적 살려주는 거예요. 어쨌든 그건 인터뷰어로서의 소임을 80%는 다한 거니까. 그러다가 요새 입장이 바뀌게 되니 아,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이겠구나 알게 됐어요. 오늘 같은 인터뷰는 재미있어요. 책이나 여행처럼 다른 데서 안하는 이야기를 하면 좋죠. 왜냐면 그건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까. 자꾸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꾸미는 느낌이 들어요.” 나는 그제야 인터뷰 장소인 그의 사무실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입구 맞은편 끝으로 매일 원고를 집필하는 책상, 그 양 옆으로 빼곡히 자리한 책장들이 이동진의 소소한 일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작가의 방이란 누구나 기웃거리게 만드는 보다 내밀한 공간 아니던가. 14년간의 문화부 편집국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작업실을 낸 그에게선 직장인과는 다른 여유가 묻어났다. 자그만한 사무실엔 은은한 커피향이 맴돌고  스피커에서는 경쾌한 팝이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개인 홈페이지 ‘이동진 닷컴(www.이동진.com)’이 운영되고, 여러 매체의 원고가 완성되며, 몇 가지 단행본 작업이 진행 중인 공간. 나는 갑자기 수많은 질문들로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총 5권의 저서 가운데, 지난 해 발간된 영화 에세이 <필름 속을 걷다>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보다 대중적인 반열에 올려 놓았다. 논쟁과 비평을 잠시 접고 누구에게나 친숙한 여행 속에 영화를 녹여낸 글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글루미 선데이>의 부다페스트, <러브 액츄얼리>의 런던, <러브레터>의 오타루 등 영화의 배경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여행의 기술에 또 다른 챕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 스스로도 영화보단 오히려 여행에세이에 가깝다고 말하듯 책은 작품 줄거리의 나열에서 벗어나 여행지에서 받은 작가의 주관적인 감수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행기 특유의 호들갑이 싫어요. 조금만 멋있어도 지구 최후의 낙원이고, 지역 사람들을 이상화하잖아요. 그래서 가급적 호들갑은 안 떨려고 노력해요. 아니었는데 마치 그걸 엄청난 여행인 것처럼 쓰는 건 정직하지 못한 것 같고요."


첫 여행에 대한 기억.  1991년 겨울. 제대 뒤 친구와 대만에 갔죠. 근데 영어로 말을 붙이면 사람들이 도망가는 데다 음식 때문에도 고생을 했어요. 첫날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는 3층 침대가 5개쯤 되고… 결국 다음날 저녁에 근처 여관으로 갔죠. 재미있는 건, 남자 둘이 간 것에 주인이 오해를 하고 더블 침대를 준 거에요. 게다가 천장에는 거울까지 붙어 있고. (웃음) 누워서 눈을 뜨면 친구와 마주치는 통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기억이 있죠.  

국내 여행지 가운데 좋았던 곳.  부산에 대한 기억이 남달라요. 매회 영화제 때문에 내려가면 날씨도 좋을 때고 또 축제 분위기인 데다 사람들도 친절하거든요. 근데,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간 인터뷰이 가운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두 번째 사람이다.  여행 중엔 집에 가고 싶어요. 다 끝나고 나면 그 여행이 좋았단 느낌이 드는 거지, 여행을 즐기지 못해요. 제주도도 제대로 못 가봤으니까. 그것도 몇 시간 잠깐? 여행을 당연히 좋아해야 한다는 그런 당위적인 압박들이 싫어요. 

영화 배경지가 기대보다 미화된 경우, 집필에 문제는 없는지.  저는 여행기 특유의 호들갑이 싫어요. 조금만 멋있어도 지구 최후의 낙원이고, 지역 사람들을 이상화하잖아요. 뉴질랜드인이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인도인의 눈이 얼마나 깊은지, 아프리카인의 삶이 얼마나 순박한지… 그게 보는 사람이 읽어내는 허위의식 같아요. 여행기의 대부분이 ‘나 여기 가서 좋았고 깨달음 얻고 돌아왔다’인데 어떻게 모든 여행이 다 그러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여행기를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가급적 호들갑은 안 떨려고 노력해요. 만약 갔는데 썰렁했다면 그렇게 쓰겠죠. 아니면 다른 표현을 쓰든지. 아니었는데도 마치 그걸 엄청난 여행인 것처럼 쓰는 건 정직하지 못한 것 같고요. 

그래서 <필름 속을 걷다>에 ‘티베트 여행기’를 넣은 건가.  맞아요. 사실 그건 실패한 기록이거든요. 기자로선 빵점짜리 짓을 한 거죠. 딱 3일 머물러 있었는데 취재 제대로 못하고 빌빌댄 게 전부잖아요. 그런 패배의 기록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죠. 

사실 여행기자의 입장에서도 매번 여행기사는 고민되는 부분이다.  어떤 나라를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으로 바라보고 깔보는 것도 나쁘지만 그 못지않게 신비화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사람들이 전자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티베트, 인도 같은 곳이 환상으로만 도출되는데… 저는 특별히 인도만 영적인 나라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중국에 가도 영적인 체험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영화 촬영지는 자료가 많이 없는데 주로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하나.  당연히 먼저 그 영화를 챙겨 보는데 어디서 촬영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일단 디카로 그 장면을 찍어 가죠. 가서 현장에서 대조하기도 하고. <원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체코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같은 건 누구도 모르는 데거든요. 택시를 대절해서 운전사한테 계속 그 장소를 보여 주면서 1시간 정도 헤맸어요.  

여행갈 때 필수품.  아이팟 주로 가져 가고(저도 많이 개화됐죠), 책도 챙기고.  

기내에서 무료함 달래기.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요. 영화 기자니까 영화 많이 볼 것 같지만 오히려 책을 보든지 아예 자요, 필사적으로. 보통 그 전날 엄청난 야근을 하고 비행기 타면 퍼지는 거죠. 

이동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가.  운전하는 건 괜찮아요. 음악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전 음악 듣기 제일 좋은 장소가 자동차라고 생각하거든요. 욕심이 과해서 오디오 살 돈으로 CD를 사는데, 책이 1만권, CD는 1만1,000장 정도? 어떤 사람은 제 사무실이 비디오 가게 같다고도 해요. 

여독을 푸는 법.  잠. 여행 중간에 힘들면 오후 6시부터 한 13시간을 쭉 자요. 만약 삼일 굶고 이틀 안 잤는데 저한테 밥 갖다 주면 아마 잠부터 잘 걸요. 

여행 다니면서 마그네틱을 모으는 걸로 아는데, 이유는.  세계 어딜 가도 있고 값도 저렴하니까. 나중에는 없는 모양을 사게 되는 거죠. 애드벌룬 모양 위로 키패드 모양이 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제일 좋아하는 건 뉴질랜드 마그네틱인데, 키위 새가 번지점프를 하는 문양이 참 맘에 들어요. 이게 300개 정도 되는데 더 붙일 데도 없고… 마그네틱은 냉장고에 붙일 때 제 맛인데. 

소년적 감수성이 많은 것 같다.  유치해서 그래요.(웃음) 마흔 된 남자가 여행지마다 마그네틱을 사 모은다는 게 유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죠. 빨간 안경도, 이게 마흔 넘은 남자가 유치하니까… 

본인의 라이프스타일.  느리게 살고 싶지만 본능적으로 가만히 있는 걸 못해요. 일을 할 때도 항상 허덕여서 하는 거예요. 떠밀려서 일을 하는 거죠. 느긋하게는 안 돼요.

평생 글을 쓰고 싶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고, 다만 지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은 거죠. 미래는 열어두고 싶어요. 제가 어느 날 칼국수에 꽂혀서 지방 유학을 다녀와 칼국수 집을 차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만 상대적으로 지금 제가 덜 못하는 것이 글 쓰는 거니까. 나는 글쟁이로 뼈를 묻으리, 이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들으면 욕심이 참 없는 것 같다.  욕심? 아주 많죠. 특히 돈 욕심. (웃음) 살면서 꿈이라는 걸 자꾸 생각하게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중요하지 않단 생각이 들어요. 전 꿈 없어도 얼마든지 유의미하고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보거든요? 하루하루 밥 먹고 행복하다, 그러면 그 삶이 내가 뭐가 될 거야 하고 매진하는 삶보다 덜 가치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니라는 거죠. 

현재 계획 중인 책 & 여행.  제가 한 인터뷰 내용을 모은 책을 집필 중인데 분량이 엄청나서 진도를 못 내고 있어요. 아마 내년쯤 <필름 속을 걷다> 시리즈도  낼 계획이고. 6월 말 20일 정도 인도에 가요. <EBS 세계 영화 기행-튀니지편>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시 가게 됐어요. 그 밖에 계속 포털 사이트에 연재하는 기사를 위해 취재갈 거고요. 

누구나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결국 ‘당위의 압박’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취향도 취미도 학습되고 그러는 거니까. <리플리>라는 영화를 보면 맷 데이먼이 가난한 집 출신이에요. 이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상류사회에 편입되는데 그들이 재즈를 들으니까 맷 데이먼도 그 음악을 들으려 하게 되는 거죠. 나중에 정체가 탄로난 뒤 사람들이 “너 재즈 듣는 척했지?” 하고 물으니까 맷 데이먼이 “정말 좋아하려고 하니까 좋아졌어”라고 말해요. 취향이란 그런 거거든요. 자기가 좋아질 필요가 있으면 그 취향이 진짜 자기 취향이 되요. 본인은 그게 본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사람의 욕망이었던 거죠. 여행도 싫은 이들이 분명 있어요. 전체가 그러니 나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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