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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석제-카메라로 농을 거는 재담꾼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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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석제
카메라로 농을 거는 재담꾼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곳 앞에선 마음의 빗장을 열기 마련이다. 고향땅 ‘상주’를 밟은 소설가 성석제 역시 어느 때보다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그 따뜻한 여행의 동행인이 되어 가까이에서 그를 관찰했다. 한바탕 꿈결 같던 겨울 초입의 인터뷰. 

에디터  박나리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류진   취재 협조   문학사랑 교보문고

성석제는 우아하다. 그것은 번쩍번쩍한 시계를 차고 고급 세단을 타고 다니는 그런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새하얀 피부와 중후한 목소리 때문도 아니고, 남들이 죄다 인정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라서도 아니다. 비록 단출한 차림새일지언정, 그는 조근조근한 말씨와 서두름 없는 행실만으로도 우아한 아우라를 뿜는다. 그것은 ‘격의 없는 사람’과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을 구분짓는 일시적 우아함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정금같이 단련된 한결같은 우아함이다. 그 아우라는 그의 소박한 옷과 태어난 고향까지도 우아하게 감싸는 힘이 된다. 

어디 그뿐이랴. 성석제는 대궐 같은 집에서 옥색 비단으로 몸을 감싼 ‘양반’이 아니라 시골 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기품이 넘치는 ‘선비’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권력과 탐욕이 없다. 독자에게 자신이 의도한 무언가를 전달하고픈 글쟁이로서의 욕심이 있을 법도 한데, 단호히 “엄청난 깨달음을 주거나 각성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간 인터뷰에서 “소설은 그저 만들어질 뿐, 중요한 건 작가의 의도나 생각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에 달려 있다”고 밝힌 것처럼, 그의 글에 마음을 무겁게 하는 메시지란 찾기 어렵다. 

이야기꾼, 진지한 농담가가 되다

“인간은 농담하는 존재이다. 나는 우리의 선조들이 어딘가에 농담을 기록해 놓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무문토기와 돌도끼를 쓰던 시대에도 적당한 도구, 가령 문자가 있었더라면 인류가 농담과 함께 번성해 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략) 농담 유전자는 인류의 조상이 후손에게 물려준 생존에 불가결한 유전자이다. 농담 유전자는 개인에게는 건강을 선물하고 공동체의 활기를 높여 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원래 건강하고 수준 높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  - 산문집 <농담하는 카메라> 중

그러나 그 농담은 그저 웃고 마는 농담에 그치지 않는다. 성석제의 실(實)있는 농담에는 웃음과 함께 눈물 한 방울의 페이소스가 있다. 그건 마치 입담 좋은 할머니의 옛날 얘기와 같아 그의 소설 곳곳에서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나는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맥주를 마시기도 전에 코끝이 찡해졌다. 코끝이 찡해진 것을 감추기 위해 맥주를 따서 마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걸 감추려고 했을까?”

그가 캐나다 로키 산맥으로 향하던 여정에서 만난 숙소 주인의 잊을 수 없는 친절을 추억하며 쓴 여행담의 마지막 문장은 주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독자의 코끝까지 찡하게 만든다. 그 어떤 연으로도 얽히지 않은 작가에게 단지 같은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정을 베푼 이 초로의 주인 부부는 누군가에겐 부모님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어린 시절의 은사를 떠올리게 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으로 확대시키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을 뻗치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익히 알아 온 ‘수다스러운 이야기꾼’ 성석제는 그렇게 ‘우아하고 따뜻한 농담가’로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카메라를 통해 풀어낸 또 다른 이야기

존재와 삶 자체가 카메라인 동시에 필름, 혹은 메모리카드, 인화지임을 명심하고 있는 작가로서, 성석제는 시대의 기록자라는 소설가의 숙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 만큼 카메라 얼리어댑터를 자처하며 ‘찍는 일’을 좋아하는 그에게 ‘어떤 것’을 찍느냐고 물었다.

“재밌는 것을 찍지요. 웃음이 나는 풍경이나 사물은 물론이고,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뷰파인더 안에 담아요. 남다른 기준이나 특별한 대상이 정해진 것은 아니고 그저 내가 보기에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찍습니다. 내게 있어 사진은 일종의 기억 보존 장치에요. 소설에 담고 싶은 이야기의 어느 순간을 시각적으로 기록해 놓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삶 속에서 잊기 아까운 어떤 것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수많은 일상과 여행의 나날을 거치면서 찍은 사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을 꼽아 달라는 부탁에도 머뭇거림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미국 여행을 하던 때였어요.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만난, 뉴욕 주립 공원 애디론댁 도로변에 죽 늘어선 자작나무를 찍은 사진이 잊히지 않네요. 메마른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 죽음 같은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있는 나무를 보며 짜릿한 기분을 느꼈어요.”
여행하는 스타일 역시 작가의 글, 혹은 인품과 꼭 닮아 있다. 목적과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기를 쓰고 달리는 여행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에서 보람을 얻는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여행을 하거나 산에 오르다 보면 내가 보기에, 내 마음에 좋은 곳을 발견하는 순간을 만납니다. 바라는 걸 얻는 순간이지요. 그러면 거기에 만족하고 여정을 멈춥니다. 굳이 끝까지 가려고 기를 쓰지 않아요.” 

또 그는 깊은 곳을 찾아 흘러들어가는 여행을 좋아한다. 고향인 경북 상주의 ‘남장사’는 평소에도 그가 자기 집 드나들 듯해 왔던 고찰. 그 고찰에서 산 속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땅과 하늘의 중간쯤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궁중암’이라는 이름이 붙은 암자가 보이는데, 고즈넉하고 깊어 자주 찾아가는 장소 중 하나라고. ‘삶 자체가 여행이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소설집 <지금 행복해>에서도 고단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단절과 해방을 꿈꾸는 주인공이 산신령이 은둔하고 있을 만한 깊은 산속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당신이 떠난 ‘깊은 곳’ 중 누군가에게 추천해 줄 만한 곳을 알려주기를 청하니 안경 너머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빛이 반짝인다.

“강원도 인제에 ‘아침가리’라는 계곡이 있어요. 다른 곳보다 인적이 드물어 원시림 같은 골짜기를 품고 있는 곳이죠. 고단한 삶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고통을 식히고 싶을 때 찾아가면 좋을 만합니다. 남미의 토레스 델파이네 국립공원 트레킹은 젊은 시절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여행지입니다. 일 년 내내 눈이 쌓인 숲과 습지, 강과 호수, 기암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태초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지요.”

언젠가 그는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일상에 진실은 있지만 신비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떠나는 순간 여행지에서의 하루도 곧 일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성석제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여행과 일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 순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일상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 어느 순간도 같은 것이 없어요. 같은 날, 같은 곳을 같은 시각에 여행해도 매번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똑같은 것에서도 다른 무엇을 찾아내는, 지루한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농담을 뽑아낼 줄 아는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친절한 이야기꾼의 본능은 사실 여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상마저 설렘 가득한 여행으로 변모시킨다. 파리 한 마리로도 웃음기 가득한 장문의 여행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섬세한 관찰과 예민한 감성, 성실한 묘사는 성석제라는 카메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다. 능력과 스피드가 우선시 된 시대에 이 여유 넘치는 농담가의 뷰파인더를 공유할 수 있는 건 우리에겐 작지만 엄청난 행운이다.

Photo by 성석제

카메라 얼리어댑터, 사진 찍는 소설가로 유명한 성석제가 <트래비>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록’ 두 장을 보내 왔다. 우리가 늘 보아 온 빛바랜 풍경이지만, 그 속에 숨은 성석제의 따뜻한 시선을 감상할 수 있다.

위 등대가 보이는 사진 <광물-퇴행과 풍경>
아래 노을이 저녁 하늘을 수놓은 사진 <달콤한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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