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Belle Epoque! 이토록 스위스적인 풍경, 루체른"
"스위스- Belle Epoque! 이토록 스위스적인 풍경, 루체른"
  • 트래비
  • 승인 2009.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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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 Epoque!
이토록 스위스적인 풍경, 루체른


벨 에포크. 몽트뢰에서 루체른으로 이어지는 골드패스라인 기차 안에서 만난 이 프랑스어는 스위스 여행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다. 행복한 시절 그리고 한없이 그리운 풍경.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확신할 수 있는 여행이란 흔치 않지만 스위스, 루체른에선 다르다. 카펠교의 서정과 구시가지 프레스코 벽화의 동화적인 분위기, 하루 종일 거닐어도 질리지 않는 피어발트슈테터 호반. 필라투스의 전설과 엔틀레부흐의 그림 같은 산책. 이 시간들은 천년만년을 내리 지키는 알프스 산의 눈처럼 여행자의 마음 속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리잡는다. 복귀한 일상에서 더욱 치명적이 돼 버린 여행, 루체른을 만났다.

글·사진  도선미 기자   취재협조  스위스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


루체른, 카펠교 연가

스위스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잘 사는 만큼 땅도 넓은 나라일 거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남한의 반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나라고, 그나마 국토도 대부분 알프스 산지 아니면 호수가 차지하고 있다.   
스위스가 가진 천혜의 여행 자원은 사실 알프스도 호수도 아니고 퐁듀도 맥가이버 칼(스위스 아미 나이프)도 아닌 26개의 ‘칸톤’이다. 칸톤은 미국의 ‘주’와 같은 개념의 지역자치구인데 제멋대로 뽐내며 살아가는 이 스위스 속 작은 나라들이야말로 다양한 여행지를 발굴하고 발전시켜 온 장본인이다. 스위스에서는 어디를 가도 ‘단위 면적 내 볼거리 밀도’가 높아, 걸으면서 여행하기 적합하다.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루체른은 특히 도보 여행에 적합하다. 중앙역에 내려서면 오른쪽으로는 피어발트슈테터 호수가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로이스강이 첫 물길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피어발트슈테터호는 ‘루체른호’라고 불리는 게 일반적일 정도로 이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지만 사실 루체른의 매력을 팔방으로 보여 주는 장소들은 로이스강 주변에 포진돼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카펠교다. 청명한 하늘을 등지고 푸른 강물에 잠긴 카펠교. 고깔 모자를 쓴 것처럼 앙증맞은 워터타워와 오두막 지붕을 인 목조다리. 사전조사를 많이 해온 여행자들이라면 이미 눈에 익은 풍경이라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뷰파인더 안의 카펠교를 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사진을 찍는 위치에 따라, 그날 그날 햇빛과 구름의 양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카펠교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멀리서만 카메라에 담다가 카펠교가 ‘다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14세기 중엽에 세워진 이 다리는 사실 호수 쪽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요새의 일부였다. 눈썰미를 발휘하면 호수 쪽 난간이 반대편 난간보다 훨씬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군인들이 소총을 쉽게 올려놓게 하기 위한 것이었단다. 중간에 우뚝 솟은 워터타워 역시 파수대 역할을 했다.  

다리를 건너며 패널화를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그림들은 대체로 스위스와 루체른의 전설, 역사와 관련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 비어 있거나 검게 그을린 패널도 있다. 지난 1993년 화재로 110여 점 중 3분의 1이 소실된 탓이다. 이 다리가 불에 타 반잿더미가 됐을 때 루체른 사람들의 슬픔은 아마 숭례문을 잃은 우리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사실 루체른에 묵었던 3일 중에 쨍한 날은 하루뿐이었다. 스위스 하면 빛나는 총천연색 이미지가 강하지만 비오는 날이 외려 운치가 있었다. 비가 오면 카펠교의 지붕 아래는 아코디언과 기타, 색소폰이 어우러진 애절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빗방울이 파문을 일으키는 로이스강에서 유유히 떠 가는 백조들에 둘러싸여 슬픈 비가를 듣는 기분. 그건 유럽에서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낭만이다.      

로이스강 주변에 걷기 좋은 코스는 강의 우안이다. 물길을 따라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어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겨도 좋고, 바인마르크트 광장 쪽으로 들어가서 개성 넘치는 프레스코 벽화와 분수, 상점마다 내건 길드 로고를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다. 쇼핑을 원한다면 베기스가세(Weggisgasse) 거리와 헤르텐슈타인(Hertenstein) 거리를 누비자. 메인 거리에는 브랜드 옷가게와 기념품점, 시계점 등이 있고 골목 안쪽에는 보세숍들이 있는데, 가격은 비싸도 디자인 면에서는 흡족하다.

여유 시간 혹은 남는 발품이 있다면 시 외곽의 무제크 성벽, 빈사의 사자상을 찾아가 는 것도 좋다. 빈사의 사자는 루체른에서는 카펠교 다음으로 유명한 명물로 <허클베리 핀>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조각’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부르봉왕가에서 고용했다가 프랑스혁명으로 희생된 스위스 용병 786명의 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죽어 가는 사자의 방패에는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백합이 새겨져 있다.

TIP
루체른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거나, 지친 상태로 이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시티투어 열차도 고려해 볼 만한다. 루체른역과 호수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슈바이처호프(Schweizerhof)호텔에서 탑승한다. 6월부터 8월까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매시 정각 출발하고 오디오가이드를 들으며 로웬그라벤(Lowengraben)거리, 반호프(Bahnhof)거리 등을 거친다. 소요시간은 40분으로 요금은 성인 기준 12CHF.      



1 내부장식이 아름다운 예수회 교회 2 건축미가 돋보이는 루체른 우체국 건물 3 로이스 강변 양안에는 매주 금요일 오전 노천시장이 열린다. 신선한 치즈와 갓구운 빵, 싱그러운 꽃들을 만날수 있다 4 호숫가에 자리한 호프교회.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이다 5, 6 루체른은 일년내내 축제가 끊이지 않는 도시다 7 루체른 시내의 대표적인 쇼핑 거리인 베기스가세(Weggisgasse) 8 키오스크는 스위스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편의점. 초콜릿이나 머그컵 등 간단한 기념품을 사기에도 좋다 9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지닌 빈사의 사자

로맨틱한 야만인?
빌더만 Wilden Mann 호텔
 

스위스에는 재즈 호텔, 디자인 호텔, 감옥 호텔 등 다양한 테마의  호텔이 있다. 이들 호텔은 사실 규모나 외관, 내부 인테리어로만 봐서는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역사적인 내력과 독특한 개성 때문에 프리미엄급으로 우대받는다. 

루체른의 빌더만 호텔도 그중 하나다. 이 호텔의 가장 큰 특징은 처음 들어섰는데도 반나절 외출했다 돌아온 하숙집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 시설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공간 자체의 오밀조밀한 분위기가 그렇다. 아무리 좋은 여행이라도 객지살이에 집 생각나기 마련인 여행자들에게는 남의 집 같은 호텔보다는 친근한 하숙집이 더 매력적인 법. 빌더만호텔에서는 향수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빌더만(Wilden Mann)은 사실 와일드맨(Wild Man)을 뜻하는 독일 말이다. 루체른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야만인 전설을 차용한 것으로, 카펠교에 걸린 첫 번째 패널화로도 유명하다. 루체른에서 야만인이란 포악하다거나 미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강제와 관습에 저항하는 야생의 힘, 자유를 뜻한다. 로맨틱 호텔을 자신하는 현재와는 썩 어울리지 않지만 이 호텔의 전신이었던 16세기 ‘펍(Pub)’에는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던 건 확실하다.   


1 베기스가세 골목 안쪽의 보세숍들은 가격은 비싸도 디자인 면에서는 흡족하다 2 엔틀레 부흐는 자전거 여행에도 적합하다 3 체실로흐의 약수물은 석회질이 많다 4 민들레가 흐드러진 엔틀레부흐에서 자란 소들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엔틀레부흐, 꿈엔들 잊힐리야

스위스에서 기대하는 목가적인 풍경들은 엔틀레부흐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엔틀레부흐는 루체른에서 기차로 40분,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하는데 높은 산과 습지, 초원 등이 공존해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아직 낮고 평탄한 초지를 이루는 알프스는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남부로 갈수록 높고 험준해진다.

관록 있는 유럽 여행 전문가나 스위스의 웬만한 관광도시들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배낭족에게도 엔틀레부흐는 낯선 지명이다. 2001년부터 유네스코 지정 환경 보존 지역으로 관리돼 왔지만, 여행지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올해는 스위스관광청이 ‘자연 친화적인 여행’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엔틀레부흐를 꼽으면서 주목받고 있다. 

엔틀레부흐에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체실로흐(Chessiloch) 트레킹이고, 다른 하나는 수(水)치료의 일종인 크나이프 체험. 하나는 산, 하나는 물이다. 엔틀레부흐 지역의 중간 즈음에 자리한 시골 마을 프뤼힐(Fluhil)에서 교회당을 중심으로 길이 나뉘는데 교회당 방향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크나이프 체험장으로, 지나쳐서 포스트버스를 타거나 표지판을 따라 이차선 도로를 걸으면 체실로흐로 갈 수 있다. 오전에 트레킹으로 찌부둥한 몸을 깨우고, 오후에 크나이프로 피로를 풀면서 갈무리 하는 것이 좋다. 

체실로흐로 가는 길에는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스위스의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초원과 들꽃 만발한 벌판, 듬성듬성 눈에 띄는 그림 같은 집들, 샬레식 오두막과 야트막한 언덕에 방목되는 젖소들. 사람 한 명 보기 힘들 정도로 인적 드문 길에는 눈앞의 잠잠한 풍경과 어울리는 햇살만이 고요하게 내리쬔다. 

적막한 아침 산책을 깨우는 것은 엠므(Emme)강의 물소리다. 물소리가 커질수록 체실로흐도 점점 가까워진다. 트레킹 코스는 생각보다 평이한데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산길이라 체력이 약한 사람이라도 숨찰 일은 드물다. 그렇게 반시간 정도 녹음을 헤치며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사방이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분화구 같은 골짜기, 체실로흐에 이른다. 체실로흐는 ‘소쿠리 모양의 바위’라는 뜻. 하늘을 향해 치솟은 침엽수와 우뚝 선 암벽이 비장감을 느끼게 한다면 하늘과 맞닿은 데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이를 거부하듯 수직 활강하고 있어 통쾌함을 준다. 

동양에 온천이 있다면 서양에는 크나이프가 있다. 독일의 가톨릭 신부인 세바스찬 크나이프가 창시한 수치료법이 이웃나라인 스위스에도 건너온 것인데, 온천이 뜨거운 물을 통해 몸을 치유하는 것과 달리 크나이프는 차가운 물을 통한 테라피다. 크나이프 신부는 건강을 위해 다섯 가지 요소를 강조했는데 바른 식생활, 허브 차, 운동, 생활의 질서 그리고 ‘물’이다. 

특히 엔틀레부흐 크나이프 체험장에서는 설산이 품었다가 내보낸 계곡물을 이용하는데 그 온도가 항상 6~7도로 유지된단다. 6도라고 하면 실감이 안 날 테지만 손발을 담그고 10초도 채 참기 어려운 ‘끔찍한’ 온도다. 그건 엔틀레부흐 크나이프에 마련된 코스 중 하나인 워킹에어리어를 걸어 보면 알 수 있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 속을 고작 왕복으로 6m 정도 걷는데도 눈물이 찔끔 나고 스위스에 와서는 입에도 한번 안 올렸던 ‘엄마’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반바퀴까지는 고상한 표정으로 갈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아마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고서는 마지막 몇 발자국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와야 정상일 테다. 엔틀레부흐의 크나이프 체험장에 갖춰져 있는 각탕(脚蕩)과 어퓨전(affusion, 호수를 이용한 냉수 마시지) 등은 실제로 크나이프가 발견한 주요한 수치료 방법이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심장과 혈관 질환뿐 아니라 두통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건지 진짜로  치료 효과가 있는 건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게 좋겠다.

TIP
엔틀레부흐 가는 길 루체른에서 슈프하임(Schupfhim)행 버스나 기차를 타고, 슈프하임에서 다시 프뤼힐로 가는 포스트 버스를 타면 된다. 


1 체실로흐로 가는 길 2, 6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엔틀레부흐 마을 3 호수를 이용한 냉수마사지인‘어퓨전(affusion)은 크나이프 수치료의 주요한 방법 중 하나다 4 크나이프 워킹 에어리어. 차가운 물이 뼛속까지 시리다 5 체실로흐의 세찬 폭포수


어디든지 간다, 포스트버스!

걸어서 갈 수 없는 외딴 지역이라면 일반 버스로는 가기 힘들다. 이럴 때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란색 우편 버스(Post bus)! 포스트 버스는 스위스 전역을 속속들이 헤집고 다니는 기특한 교통수단인데, 1849년에 시작돼 스위스 철도망 길이의 3배에 달하는 노선과 2,000대가 넘는 버스를 확보하고 있단다.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처럼 근거리 이동수단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포스트버스는 차 시간을 조회할 수 있고 기차와 마찬가지로 출발, 도착 시간이 정확하다는 점. 포스트버스를 통해 갈 수 있는 여행지와 배차대조표는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www.postbus.ch

필라투스, 두 가지 매력

필라투스는 리기, 티틀리스와 함께 루체른 인근에서 가장 명봉으로 꼽히는 알프스 산이다. 필라투스 산이 재미있는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산을 오르는 가지각색의 방법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산에 서린 전설 때문이다. 물론 산정상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루체른의 풍경과 한껏 솟아 오른 건장한 알프스의 산들을 열외로 친다면 말이다. 

필라투스는 ‘가는 방법’에 따라 ‘오르는 방법’이 달라진다. 루체른에서 버스나 기차, 배를 이용해 갈 수 있는데 버스를 타면 15분 만에 케이블카 선착장인 크리엔스에 도착하고 기차나 배를 타면 각각 30분, 1시간 반 만에 톱니바퀴 열차 승강장인 알프나흐슈타트에 도착한다. 이왕이면 ‘배’를 타고 알프나흐슈타트에 간 다음 톱니바퀴 ‘열차’로 산에 오르고 하산시에 반대편 사면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방법을 권한다. 교통수단 3종 세트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크리엔스에서 케이블카 라인을 따라 난 트레킹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대신 등산이든 하산이든 필라투스의 명물 톱니바퀴 열차는 꼭 타 보길 권한다.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기로 유명한 이 열차는 겉보기엔 한량짜리 꼬마 기차지만 그 추진력이 놀랍다. 속도 이야기가 아니다. 48도의 급경사를 알프나흐슈타트에서 정상인 필라투스 쿨름(2,132m)까지 약 30분을 오르는데 톱니와 톱니가 어찌나 정교하게 맞닿아 있는지 전혀 뒤로 쏠리는 느낌이 없다. 이 안정적인 열차 안에서는 스릴을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도가 높아질수록 제 모습을 드러내는 루체른의 6개 호수와 눈 덮인 알프스 고봉들로 눈요기하는 편이 즐겁다. 또 처음에는 침염수림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관목림과 초지, 민둥산으로 변하는 필라투스의 변신도 신기하다.  

천장이 낮은 여러 개의 동굴을 지나면 드디어 필라투스 정상에 도착한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알프스의 풍경이 연출되므로 ‘인증샷’을 최대한 많이 남기자. 알프스 염소 슈타인보크를 끌고 다니는, 타이즈를 신고 베레모를 쓴 소년과 프릴 달린 치마를 입고 주근깨 난 두 볼에 가득 웃음을 담는 소녀. 적어도 2m는 됨직한 알펜 호른을 불며 필라투스의 정기를 음률에 담는 사람들. 태양과 가까워진 만큼 효과 만점인 알프스 선탠을 즐기는 비키니족도 있다. 

한 켠에는 ‘필라투스의 혼’이라는 목각 기념품을 파는데 그 유래는 ‘악마의 산’이라는 이 산의 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2,000년쯤 전에 필라투스 산 정상에도 호수가 있었단다. 사연이 많은 산 ‘필라투스’는 그 이름부터가 반전인데, 바로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라틴어식 발음이다. 필라투스가 정적인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강에 버려졌다가 다시 묻힌 곳이 바로 이 산 정상에 있던 호수다. 하지만 필라투스의 시신이 묻힌 후 산에는 수시로 벼락이 떨어지고, 조난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필라투스의 망령 때문에 산이 저주받았다고 믿고, 산에 오르는 것을 금기시 했다. 16세기가 지난 이후에야 루체른의 성직자들의 용기로 산의 호수가 메워졌고 사람들도 예전처럼 다시 산을 찾게 됐다.   

사실 이곳 사람들은 다소 꺼림칙한 빌라도 이야기보다는 필라투스의 엠블럼이기도 한 ‘용의 전설’을 더 알리고 싶어한다. 특히 홍보담당자들은 필라투스 용에 관한 이야기를 15분 남짓한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서 상영할 정도로 애착이 크다. ‘롱 타임 어고’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필라투스에는 두 마리 용이 살았다. 1421년 어느 가을날, 나무통을 만드는 스템플린이라는 농부가 산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다가 발을 헛디뎌 깊은 동굴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겨울잠을 자고 있던 두 마리의 용 사이에 떨어졌는데 용들은 다행히도 이 불청객을 해치지 않았다. 스템플린은 용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굴 한 쪽의 둥근 돌을 핥으며 겨울을 보냈다. 봄이 오자 한 마리는 동굴을 떠났고, 나머지 한 마리 용이 그를 동굴 밖으로 구출해 주었다. 하지만 용은 농부의 친구인 윙켈리드가  던진 창에 맞아 슬픈 최후를 맞았다. 속설에 의하면 당시 로이스강에서 용이 목격되기도 했고, 동굴에서 용의 뼈도 발굴됐다고 한다. 1509년 시정부가 용의 존재를 공식으로 인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엠블럼에서 보듯이 필라투스의 용은 한국의 용과 달리 몸피가 가늘고 다리가 4개나 달렸다. 그 몸이 자유롭게 훑고 지나간 흔적처럼 좁고 기이한 용동굴은 탁 트인 야외로 이어져 루체른 시내를 관망하기 좋다. 동굴을 따라 필라투스의 최정상까지 오르면 루체른을 둘러싼 6개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고 알프스 봉우리들이 높다랗게 지평선을 이룬다. 내려오는 길에 남은 체력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곤돌라와 케이블카보다 도보로 하산하는 것도 괜찮다. 특히 중간중간 로프파크, 터보건, 놀이터 등 즐길거리가 많아서 지루하지 않다.

TIP
필라투스 가는 길 |  버스 루체른에서 크리엔스행 트롤리 버스 1번을 타고 Linde/Pilatus 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10분·기차 루체른역에서 베른행 기차를 타고 알프나흐슈타트 역 하차. ·배 루체른 중앙역 앞 2번 선착장에서 출발. 




1 필라투스의 정상 쿨름에서는 루체른 전역이 한눈에 보인다 2 알프스 남매와 슈타인보크 3 톱니바퀴 열차에서 차창으로 미리 만난 알프스 4 필라투스에서도 바캉스를 즐긴다 5 필라투스 쿨름에서 보낸 한때


필라투스 정상에선
아이 호프(Eich Hof) 한잔!


아이호프는 필라투스산의 생수로 만들어진 루체른의 대표 맥주다. 필라투스의 아이젠탈(Eigenthal) 지역은 최적의 마그네슘과 칼슘의 조합으로 부드러운 물맛을 자랑하는데 이 점이 맥주의 바디(Body), ‘물’을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한 아이호프와 들어맞았다. 물론 루체른 시내의 맥주집에서도 아이호프 맥주를 맛볼 수 있지만 본가에서도 종갓집에 왔으니 필라투스 정상에서 한 모금은 꼭 마셔 보자. 더욱이 필라투스 정상에는 동전만 넣으면 필라투스의 신선한 폭포수가 맥주로 변신하는 수도꼭지(아이호프 맥주 탭)가 있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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