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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세계테마기행> 탁재형 PD-그의 지도에 국경은 없다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9.07.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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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마테호른 


EBS <세계테마기행> 탁재형 PD
그의 지도에 국경은 없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 기자가 여행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눈여겨본 프로그램이 있으니 EBS <세계테마기행>이다. 쉬이 갈 수 없는 남미, 알래스카 등 전세계를 넘나드는 것도 좋았지만 자유로운 시선으로 찬란한 문명과 광활한 자연 그리고 때묻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을 담아내는 것에 더욱 마음이 갔다. 급기야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오지 깊숙한 곳까지 발을 뻗는 <세계테마기행> 제작진을 부러워하게 됐고 프로그램 PD이자 스위스와 페루 편의 주인공으로 낯이 익은 탁재형 PD를 수소문하기에 이른다.

글  이민희 기자   사진제공  탁재형


자칭 유목민 PD, 탁재형

EBS <세계테마기행>은 4개의 외주 제작사에서, 열 명이 넘는 PD가 돌아가며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중 누구에게 ‘프로그램 뒷담화’를 들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나름의 뒷조사를 하던 찰나 ‘김진혁 공작소’의 탁재형 PD에게 ‘필’이 꽂혔다. 해외 프로그램 전문 프로덕션이라는 타이틀도 구미를 당겼지만 스스로를 ‘유목민 PD’라 자각하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 “처음엔 편집 일을 하다가 <도전! 지구탐험대> 감독님의 권유로 조연출을 맡게 됐어요. 돌아다니는 게 천성에 맞긴 했지만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을 가는 편은 아니었는데 <KBS 월드넷>, <세상의 아침> 등 이상하게 해외 프로그램과 연이 닿았네요.”

지금까지 가본 나라만 40여 개국. 세계를 누비는 여행자들이 넘쳐나는 지금 ‘40’이라는 숫자가 뭐 대단할까 싶겠지만 남들은 한 번도 가기 힘든 남미 땅을 세 번이나 밟았고 내전 당시의 수단에서 목숨 건 취재를 감행했으며 EBS 다큐프라임<안데스> 촬영을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만 두 달 반을 살기도 했다. 지금도 <세계테마기행> 촬영을 위해 한번 나갔다 하면 보름 이상 현지에서 머문다고. 상황이 이쯤 되니 자칭 ‘유목민 PD’라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짐은 물론, 단 한 번의 통화로 그를 만났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다.

좌충우돌 촬영기

무릇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것이 NG장면이요, 역사 속 정설보다 흥미로운 것이 야사(野史)인 법이다. 한 편의 여행 프로그램을 위해 짧게는 몇 주부터 길게는 몇 달씩 오지를 표류하는 그가 차곡차곡 모아 온 이야기보따리엔 역시 <톰 소여의 모험>보다 흥미롭고 공포영화보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2003년에 내전지역이었던 수단으로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도시가 반군으로 둘러싸여 저녁 7시 이후엔 숙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정말 위험했거든요. 그렇게 취재를 끝내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공항으로 가는데 전쟁시 미사일에 맞아 추락한 비행기가 거꾸로 처박혀 있지 않나, 정기노선으로 편성되어 있던 비행기가 머리 위에서 세 바퀴 돌더니 그냥 가 버리질 않나…. 볼리비아에서도 비행기가 안 뜨는 바람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로 꼽히는 ‘죽음의 길’을 십수시간 달린 적도 있고, 산적이 출몰한다는 라오스 산골 한가운데에서는 차가 고장나서 4시간 넘게 떨며 기다린 적도 있어요.” 

촬영 갈 때마다 여행자보험도 열심히 들지만 본의 아니게 아슬아슬한 지역만 골라 가고,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는 탓에 웬만한 귀책사유엔 다 저촉이 된다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런 좌충우돌 취재에서도 분명 얻는 것은 있다. 지도상에 나와 있지 않은 마을과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에게 있어 여행은 고생이기보단 사람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페루에 가면 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있어요. 결혼식에서 대부를 섰거든요.”

상황인즉슨 이러하다. 페루의 께로족에겐 일명 ‘시험결혼’, 즉 결혼식을 하기 전에 동거를 하는 풍습이 있다. 일단 살아 본 뒤에 마음이 맞으면 결혼을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미련 없이 헤어진다고. 마침 그가 이 부족을 찾았을 땐 한 커플이 결혼에 대한 계시나 계기를 기다리며 무려 7년째 동거를 하고 있었고,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 걸 큰 길조로 여겼던 이들 부족과 커플은 그의 출현을 계기로 비로소 결혼식을 올렸다. “당연히 결혼식에 대부를 섰죠. 서류에 정식으로 제 이름이 들어가 있다니까요.”


1 결혼식 대부를 섰던 페루 께로족 디오니시오와 리비아 부부의 가족사진 2 탁PD가 가장 좋아하는 촬영지로 꼽은 볼리비아 소금사막 잉카와시섬


뷰파인더가 아닌 눈으로 세상을 보고파

<세계테마기행>은 영화평론가 이동진, 소설가 김영하, 여행생활자 류성룡,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등 여행에 조예가 깊은 유명인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에 제작진으로는 연출자와 카메라맨 혹은 조연출이 동행한다고. 하지만 열혈 시청자이거나 눈썰미가 탁월한 독자라면 스위스와 페루 편에 등장한 탁PD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페루 편은  취재비용이 너무 비싸서 한 사람이라도 줄여야 했고요. 스위스 편은 촉박한 일정과 잇따른 돌발 상황으로 섭외가 되지 않았던 경우예요. 출연하고, 섭외하고, 촬영하고, 연출하고…. 일인다역을 하면서 급기야 정신분열이 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모든 역할엔 그에 따른 입장이 있기 마련인지라 연출자와 카메라맨 그리고 출연자의 각기 다른 욕심이 매번 그의 머릿속에서 싸우곤 했단다. “축제 장면을 찍는다고 하면 출연자 입장에선 마을사람들과 흥겹게 어울리지만 연출자의 입장에선 다음날 어디로 가서 무엇을 찍으려면 당장 여길 떠야 한다는 계산을 하구요, 카메라맨 입장에서는 조연출 녀석이 지금 나를 제대로 찍고 있는 건지 계속 신경을 쓰는 거죠.”

사진 기자가 농구 경기를 취재하면 그 내용이나 결과가 기억에 남기보다 어떤 선수가 덩크슛하는 걸 찍었고 못 찍었는지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도 마찬가지 아닐까. 경치 좋은 곳에 앉아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는 여행자의 시선과 촬영 분량, 출연자의 동선 등을 끊임없이 계산해야 하는 PD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해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죽하면 매번 길 위에 서고, 하늘 아래 잠드는 그가 ‘여행을 못해, 여행에 한이 맺혔다’고 말했을까. 

“꿈이 있다면 지금까지 촬영했던 곳을 아무런 기록용 매체 없이 가보는 거예요. 촬영 중에 만났던 세계 곳곳의 사람들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인터뷰 직후 그는 2년 만에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다. “베트남은 그 자체로도 좋지만 그곳엔 전쟁 당시 남겨진 우리 아버지 세대의 한국분들이 계셔서 더욱 정이 가는 곳이에요. 취재차 만났던 어르신들도 찾아 뵙고, 물론 제가 너무 좋아하는 동남아 음식도 원 없이 먹고요. 하하.”

실로 오랜만에 카메라 뷰파인더가 아닌 두 눈으로 만난 그의 여행은 어땠을까. 비록 스펙터클한 무용담과 좌충우돌 촬영기는 없을지언정 정겨운 이들의 일상과 소소한 이야기,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했을 그의 여행이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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