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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이야기 1

  • Editor. tktt
  • 입력 200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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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天茶廬 이야기

내가 보길도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동천다려 때문이다. 보길도가 좋아서 동천다려를 좋아하게 됐는지, 동천다려가 좋아서 보길도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닭이 먼저냐 닭알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오묘한 것이므로 따지지 말자.

동천다려는 찻집이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이름처럼 전통차를 파는 찻집이다. 그러나 어떤 어떤 종류의 전통차를 파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다실(茶室)에 앉아있을 때 오신 손님들은 다들 ´차 한잔 마시러 왔습니다´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주인아저씨는 차를 내온다. 손님은 무슨 차냐고 묻지도 않고 마신다. 손님과 주인의 마음이 서로 통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 미스테리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메뉴판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나 역시 주인아저씨가 주신 차를 군말없이 받아마시기는 했지만 꼭 이름을 물어보았다. 두 번 다 당연하다는 듯이 ´홍차´라고 대답하셨으니 손님들에게 나간 차도 홍차일지 모르겠다. (앗! 그럼 홍차가 전통차일까?)
동천다려 규칙 하나! 동천다려에 차를 드시러 오는 손님들은 그냥 주는 대로 마시자. 그렇지 않으면 홍차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실 안 기둥 윗부분에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갈라진 게 아니라 깎을 때 껍질이 남아서 그런 것이니, 주인아저씨께 따지지 말자. 화내실지도 모른다.

동천다려는 민박집이기도 하다. 사실 민박집으로서의 동천다려는 그다지 시설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작고 아담한 방에는 그 흔한 거울도 시계도 쓰레기통도 없다.(TV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달랑 이불과 베개와 대나무로 만든 옷걸이 하나만 있을 뿐이다. 재떨이가 국그릇이 되기도 하고 다기(茶器)가 국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열악한 시설에도 불구하고 동천다려는 이곳에 짐을 푸는 숙박객들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서로 친구가 되게 하는 마력(魔力)을 지닌 곳이다. 그 마력의 근원은 이곳 주인장이신 강제윤 시인이다.

잠깐 주인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강제윤 시인은 시인은 시인인데, 서점에서 그의 시집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1989년 문학과비평사에서 출판된 ´오래 기억나지 않는 겨울을 위하여´라는 책이 한 권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절판되어 지금은 제목조차 구경하기 어렵다. 그게 첫 시집인데, 그 이후 두 번째 시집이 나왔는지 안나왔는지, 앞으로 나올건지 안나올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여간 강제윤 시인의 글을 읽고 싶으면 ´보길도에서 온 편지´라는 산문집을 보면 된다.(그 안에는 시도 몇 편 들어있다.) 난 이 책이 두 권 있다. 한권은 ´드림´이라는 도장이 떡하니 찍혀있는 증정본이고, 한권은 작가의 친필싸인이 담겨있는 것으로서 이번에 보길도에 다녀오면서 받아왔다. 당연히 작가의 친!필!싸!인!이 있는 책을 더 좋아하.......ㄹ거다. 이 책은 강제윤 시인이 고향인 보길도에 들어와 손수 집을 짓고, 먹거리를 마련하고. 손님들을 맞으며 생활하는 모습과 그 속에서 느낀 생각들을 글로 그려놓은 것인데, 따뜻한 문체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가끔 보길도가 그리워질 때면 이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한다. 감히 이런 비교를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스콧니어링·헬렌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같은 책을 읽을 때면 ´보길도에서 온 편지´가 떠오른다. 글이 지닌 편안함처럼 강제윤 아저씨(본인은 ´오빠´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심) 역시 딱 보기만 해도 인자함과 따뜻함이 펄펄 풍기는 분이시다. 그 작은 눈이 어떻게 그런 커다란 푸근함을 품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제 다시 동천다려 이야기로 돌아가자.
동천다려에 묵는 숙박객들에게 ´친구가 되라´는 마법을 걸기 위해 강제윤 마법사가 주로 사용하는 주문(呪文)은 ´다실에서 같이 차 한 잔 하자´는 것이다. 동천다려에 처음 묵는 손님들은 마법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차 한 잔´의 주문을 주의하자. 그 ´차 한잔´은 말 그대로 차가 아니라 술일 확률이 높으며, 처음에는 정말 차로 시작하더라도 곧 술로 바뀔 확률이 더욱 높다. 간혹 ´저녁 먹자´고 하면서 바로 술자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매순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 찻집에서는 차를 마시는 사람보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며, 주인장 역시 ´차는 떨어져도 술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바 있으니, 동천茶려는 동천酒려로 이름을 바꾸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주인장 강제윤 마법사는 본디 심성은 악한 것 같지 않으나, 고약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열매건, 잎이건, 나뭇가지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따다가 술로 담가 손님들을 실험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실험대상이 되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객들은 자신이 마실 술은 각자 지참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옆 테이블에 계시던 한 아저씨는 선생님이 술 한잔을 권하자, 자기 방에서 ´산사춘´을 가져오셔서 그것만 드셨다.) 하지만 내가 그 동안 실험해본 유자술, 앵두술, 매실술, 호랑가시나뭇잎술, 사유자술, 쟈스민차술 등등은 모두 반응이 괜찮았다. 다만 나처럼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독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다음날 마취제에 담가놓은 개구리처럼 뻗어서 꼼짝 못할 수도 있으니, 이 글을 읽고 동천다려에 묵게되는 분들은 먼저 실험 당한 이 선배의 안타까운 사례를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내공을 쌓으시라.

동천다려의 특이한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바로 봉순이네 식구들이다. 품종은 진돗개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누렁이(黃狗)나 흰둥이(白狗)가 아니라 얼룩덜룩 검은털이 섞여있는 호피무늬의 개다.(범구 또는 호구라고 부른다고 한다. 얼룩 강아지랑은 다르다.) 현재 동천다려에서 살고 있는 봉순이네 식구는 모두 넷이다. 봉순이, 꺽정이, 부용이, 길동이... 올해 봄에 갔을 때 유난히 사람을 잘 따르던 조그맣고 귀엽고 털이 복실복실한 강아지가 있었는데, 고녀석이 이제는 엄청나게 커져서, 지금은 넷 중에 가장 한 덩치하는 ´길동이´이다. 강아지 이름을 아직 안지으셨다고 하길래, 내가 동천다려 홈페이지 게시판에 감자나 고구마로 하자고 건의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리고 붙여진 이름이 ´길동이´인데, 이번에 가보니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으시고도, 모두들 합쳐서 ´돼지들´이라고 부르고 계셨다. 이 ´돼지들´은 어찌나 똑똑한지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처음에는 짖어도 이 집에 묵는 손님인걸 알면 그 뒤로 짖지 않는다.(그러나 마을 주민이 집에 오면 항상 짖는다고 하다. 왜 그럴까.) 한번은 마루에 앉아 있는데 개들이 한꺼번에 짖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데 왜 짖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3분쯤 시간이 흐른 뒤에, 외출하셨던 선생님의 차가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선생님의 차가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이다.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사람 각각의 체취를 맡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에서부터 들어오는 차를 알아차리는지 신통하다. 강제윤 선생님도 이 애들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셔서 툭하면 싸움을 걸거나, 가끔 밥을 모두 길동이에게로 몰아주신다.

이 밖에도 동천다려에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정원과 하얀 돌이 멋들어지게 깔려있는 주차장 겸 마당과 세연정까지 이어져 있는 오솔길이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깔끔한 집과 다실을 꼼꼼히 구경하는 재미도 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이 직접 기거하고 계신 안채의 대나무로 만든 처마와 기둥을 좋아한다. 그리고 별채의 손님방에 한지로 바른 벽과 대나무 양쪽에 실을 묶어 만든 옷걸이도 좋아한다. 문을 열다 잘못해서 칸칸마다 구멍이 뽕뽕 뚫린(그 중 하나는 내 소행이다.) 안채의 삐그덕 부엌문과 손님들이 묵는 아담한 별채의 드르륵 방문도 좋다.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니 다시 보길도에 가고 싶어진다.
아... 보길도...그곳엔 동천다려가 있다.

 

<글/사진= 가을아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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