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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이야기 4

  • Editor. tktt
  • 입력 2005.06.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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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내가 온라인상에서 주로 쓰는 아이디는 ´가을아침´이다. 사시사철·아침점심저녁 가리지 않고 늘 쓰는 아이디건만, 유독 가을이 되면 내 아이디에 대한 문의가 많다. 겨울이 되면 겨울아침으로 바뀌느냐, 왜 하필 가을아침이냐, 저녁은 싫어하는가 등등등. 물론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이디가 참 예쁘네요´하는 칭찬이다.*^^*

각설(却說)하고, 오늘 아침이야말로 정말 내 아이디가 딱 어울릴만한 아침이다. 햇살은 눈부시고 하늘은 높고 푸르고 청량한 아침 바람이 살랑살랑, 게다가 어제 내 머리 속에 잔뜩 드리워있던 먹구름까지 맑게 개어, 그야말로 짙어진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상쾌한 아침이다.
일어나서 눈꼽만 겨우 떼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가을아침을 만끽하고 있는데,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날씨가 왜 이렇게 좋은거야? 열받게...... 당초 2박3일을 예상하고 보길도에 들어온 나였다. 첫날은 날씨가 너무 나빠 하루를 버리고, 둘째날은 사람들과 도치미 끝에 가느라 결국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가보지도 못하고, 오늘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라 아쉬운 맘 굴뚝 같은데, 날씨마저 이 모양으로 좋으니 사람 속 뒤집어질 수 밖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늘도 바람이 심해서 배가 끊겼다고 거짓말을 할까, 아니면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고 무작정 하루 더 버텨볼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집에 전화를 걸어 솔직히 얘기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집에 못가겠다고. 그런데 이게 왠일일까. 너무나도 쉽게 허락을 해주시는거다.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일정표와 예상시간소요표, 숙박시설 예약현황을 모두 확인하신 후에야 허락을 해주시는 꼼꼼한 부모님께서, 계획에도 없던 외박을 이토록 쉽게 받아들여주시다니... 기뻤다. 너무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질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으악∼ 어떡해 어떡해?"
어제 바람이 너무 심해서 배가 뜨지 못해 섬에 갇혔던 병진언니의 목소리다. 원래는 오늘 출근해야 하는 날인데, 미리 회사에 전화하는걸 깜빡 잊었단다. 사람들의 걱정스런 눈빛 속에서 언니는 전화를 했다. 다행이 아직 사장님이 출근하시기 전이란다. 말씀 좀 잘 드려달라는 부탁의 말로 전화통화가 끝났다.

이젠 내 차례다. "와하하하∼ 엄마가 저 여기서 하루 더 있어도 된데요."
나는 사람들이 병진언니에게 걱정의 눈길을 보내주던 것처럼 나에게도 다행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같이 기뻐해 줄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 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엄마한테 허락을 받냐?
어차피 백수라 시간도 많으면서...
인희언니: 어머님께서 영옥씨가 보기 싫으신가봐요.
한다. 윽! 이럴수가... 왜 나만 미워하는 걸까...ㅠㅠ

그래도 난 꿋꿋할테다. (주먹 불끈!)

아침을 먹고 병진언니는 집에 갈 채비를 하고, 난 열심히 걸어다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방을 나왔다. 선생님께서 마침 우체국에 갈 일이 있으셔서, 청별항까지 태워다 주신단다.
나의 오늘 계획은 보옥리 해변과 예송리 해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 두 곳은 직선거리로는 가까우나 길이 나있지 않아서 보길도를 한바퀴 돌아야 갈 수 있다. only 나의 두 다리만 의지한다면 오늘 하루로는 좀 빠듯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고 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일단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선생님 차를 타고 청별항까지 나왔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11시 30분에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와보니 텅 비어있다. 12나 되어야 출발한다고 한다. 30분을 또 버렸다. 병진언니가 타고 나가야 할 배는 11시 40분이 아니라 12시 40분 배라고 한다. 언니는 자그마치 한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언니랑 나란히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연락처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버스 출발 시간이 되었다.

버스에 올랐다. 보옥리까지 가는 버스는 우리가 흔히 보는 큰 버스가 아니라 미니버스다. 그런데 오늘이 마침 장날이라(보길도는 5일마다 장이 선다. 2, 7로 끝나는 날이 장날이다. 오늘은 7日^^) 그 작은 버스 안에 사람보다 짐이 더 많다. 의자건 좁은 통로건 짐이 가득가득 쌓였는데 밖에는 아직도 실어야 할 짐이 많다. 조마조마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라면 당장 기사아저씨의 짜증 섞인 고함소리가 터지고도 남았다. 언제쯤 화를 내실까 기대에 찬(?) 눈으로 기사아저씨를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아저씨는 내 기대를 무너뜨리려는 듯 연신 싱글벙글하며 오히려 ´여기도 자리 있어요, 짐 이리로 주세요´ 하며 운전석 옆자리 보조의자까지 올린다. 서울과 많이 다른 곳이구나... 딴 세상에 와있는 것 같다.
버스가 출발한다. 잠시 후에 서울과 이곳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주머니(일명 아줌마)들의 커다란 이야기소리...너무너무 시끄럽다. 누구누구네 누가 바람났다더라, 누구누구네 누가 어떻다더라. 이야기 소재도 비슷하다. 자, 그러면 이제 기사아저씨도 조용히 좀 하라고 화를 내시겠지? (씨익∼ 회심의 미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저씨의 호통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따금씩 아주머니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시기까지 한다. 짐 많은 아주머니들이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가기 편하시도록, 정류장이 아니더라도 내려달라는 데서 세워주신다.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따라 뛰어다녀야 하고, 차가 너무 막혀 좀 세워달라고 해도 꼭 다음 정류장이 되어야만 내릴 수 있는 서울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서울은 교통 사정이 복잡하니까 아무데서나 차를 세울 수 없는 버스기사님들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승객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인정이 넘치는 시골 장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자꾸자꾸 삭막한 서울살이가 떠오른다.
"거기 아가씨!! 저기 좀 봐요. 제주도 보이네."
앗!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깜짝 놀라 아저씨가 가리킨 쪽을 보니 바다 저쪽에 흰구름을 고슬고슬 머리에 쓰고 있는 커다란 섬이 보인다. 제.주.도. 그 섬이 제주도란다. 어제 도치미 끝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날이 좋으면 제주도도 보이는데 오늘은 안보이네´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오늘은 제주도가 보이는 구나. 시작이 좋다. 어쩐지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보옥리에 도착했다. 얼마냐고 버스비를 묻는 내게 아저씨는 친절한 관광안내까지 빼먹지 않으신다. 다음 버스가 3시 20분에 있어요. 저 슈퍼 쪽으로 돌아가면 바닷가가 나오거든요. 그거보고 뾰족산 올라갔다 내려오면 딱 시간 맞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버스에서 내렸다. 절로 웃음이 나게 하는 곳이다, 보길도는.

슈퍼 앞 좁은 시멘트길을 따라 보옥리 바닷가에 도착했다. 바닷가엔 아무도 없다. 이 바닷가가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말도 안되는 허영에 젖어든다.
보옥리 바닷가는 매우 개성적이다. 여느 해변들처럼 모래가 쫙 깔린 곳이 아니다. 이곳의 해변은 돌멩이들로 꽉 차있는데, 그 돌멩이들은 주먹만한 것부터 머리통만한 것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간혹 엉덩이만한 것도 있다. 그리고 색깔도 거무튀튀한 것, 불그르죽죽한 것, 점점이 박힌 것 등 제각각이다. 모양도 또한 여러 가지이나, 대체로 타원형으로 둥글둥글하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알(卵)같다. 그래서 이 바닷가의 별명이 ´공룡알 해변´이다. 어쩜 그렇게 어울리는 별명을 지었는지, 공룡알 해변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곳 정경이 단번에 떠오른다. 또 이곳을 ´뽀래기 해변´, ´뽀리기 해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보옥리´라는 지명의 발음이 변해서 뽀래기·뽀리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되었든 보옥리(甫玉里)라는 딱딱한 한자어보다 훨씬 정겹고 귀엽게 들려서 좋다.
공룡알 해변의 중간쯤 평평한 돌을 골라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면 바로 앞에 갓 구워낸 폭신폭신한 쉬폰케이크 같은 작은 섬이 보인다. 해변의 모양은 그 섬을 중심으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고 있어, 그 모양이 마치 쉬폰케이크를 담으려는 둥근 접시 같기도 하고, 케이크를 잡으려는 아이의 두 손 같기도 하다. 오른쪽 손이 바로 뾰족산이다.(이 곳의 이름은 다들 재미있다.) 뾰족산은 그 이름 그대로 그냥 뾰족한 산이다. 올해 봄에는 산의 뾰족한 형상 밖에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좀더 가까이서 보니 푸른 나무들이 빽빽이 목까지 들어차 있다. 나무옷을 입고 있는 뾰족산이 따뜻해 보인다.
공룡알 위에 앉아서 바다를 마냥 바라보았다. 섬 옆으로 배 한 척이 지나간다. 수평선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수평선에서부터 내가 있는 곳까지 물결이 햇살을 반짝반짝 실어나른다. 파도가 쳤다가 돌멩이들 사이를 졸졸졸졸 빠져나간다. 돌 앞에 작은 소용돌이가 생긴다. 파도에게 씻김을 당한 공룡알들은 더욱 빛난다. 하늘이고 바다고 돌이고 온통 빛으로 환하다. 맑은날 보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뽀래기 해변은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날 더욱 장관이란다. 커다란 돌덩이들이 이쪽 해변 끝에서 저쪽 해변 끝까지 굴러다닌다고. 물론 직접 바닷가에서 볼 수는 없단다. 날아다니는 돌에 맞아 죽으니까. 진강이 아버지께서 바다에서 배를 타고 보셨다고 한다. 진강이 역시도 아버님께 듣기만 한거니까 진실은 오직 진강이 아버님만이 알고 계실 뿐.
그럭저럭 한시간 가량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이제 아까 그 기사아저씨의 조언대로 뾰족산에 올라가볼까. 돌멩이들 위를 깡충깡충 뛰고 뒤뚱뒤뚱 걸어 뾰족산 쪽으로 갔다. 그런데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 도 없다. 별 수 없이 아침에 예정했던 대로 예송리 바닷가로 가야겠다. 버스는 3시 20분이나 되어야 온다고 했으니 걸어가야 한다.

보옥리를 나와 도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산이 있고, 왼쪽으로는 바다가 보여 혼자 걷는 길이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 노래를 불렀다. 주위에 듣는 사람도 없으니 맘이 편하다. 그렇게 조용히(내 노랫소리 빼고..^^;)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망끝 전망대에 거의 다 와가고 있던 차라, 망끝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야지 마음 먹고 있었는데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 한자락이 처참히 속살을 드러낸 채 해부당하고 있었다. 멀쩡한 생명을 저렇게 잔혹하게 짓밟아도 되는가 싶었다. 하얗게 드러난 바위를 덜컹거리며 올라가고 있는 포크레인이 살을 뜯어먹는 기생충·구더기 같이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공사인가. 옆에 세워진 공사안내표지판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사업은 정부의 공익사업으로서 자연환경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환경 영향 평가를 실시하고 보옥항 어항 건설과 해안도로 선형 완화 공사를 동시에 시행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건 또 무슨 코미디인가. 회생(回生)이 전혀 불가능한 결정적인 파괴를 자행하고 있으면서, 그 이유가 자연환경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니... 이 공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우둔한 머리로도 한번 파손된 자연은 되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아는데...
마침 옆에 차 한 대가 와서 선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해서 청별항까지 간다고 하고 얻어탔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망끝 전망대가 멀어져간다.

이곳 보길도에서는 자가용이 없어도 돌아다니기에 좋다. 주민분들이 친절하기로 유명하다. 걸어다니는 여행객을 보면 선뜻 차를 세워 태워주신다. 뒷모습이 예쁘지 않더라도 말이다. ^^
내게 차를 태워주신 아저씨(총각?)는 보옥리에 사신다고 한다. 역시나 친절하시다. 내가 차를 타자마자, 거기 귤 먹어요 하며 의자랑 바닥에 굴러다니는 귤을 주워주시더니 차를 출발시킨다. 이곳 귤은 초록색 귤이다. 초록이 곱게 깔린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서 선명한 주황빛의 귤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인희언니는 "그럼 수박 먹을 때는 더 신기하겠네? 초록 껍질 속에 빨간 과육이 들었으니까."하고 놀렸지만, 어쨌거나 난 흔히 덜 익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초록 귤 속에 이렇게 잘 익은 상큼한 알맹이가 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어제 저녁에 병어회를 먹었다고 했더니 ´어! 어제 우리 동네에서 잡은 건데´하고 너무 좋아하신다. 참 순박하신 분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라죠(그렇죠).´하고 대꾸를 해주신다. 질문을 해도 참 열심히 대답해 주신다. 사투리가 재밌다.
왜 보길도에는 단풍이 들지 않는지 아냐고 물으신다. 보길도에 있는 나무는 대게가 상록수인데다, 그나마 조금 있는 낙엽수들도 단풍이 들만하면 바람이 불어서 잎이 다 떨어지니 보길도는 절대 단풍이 들 수 없단다.
또 보길도 사람들은 이 섬을 나가면 운전을 못한다고 하시길래, 왜요? 하고 되물었다. 보길도는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어서 차를 세울 필요 없이 그냥 쭉 목적지까지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다들 도시에서는 신호대기하느라 차를 자꾸 세워야 하기 때문에 보길도 사람들은 성질이 나서 못한단다.
이번에는 보길도에 언제 들어왔냐고 물으신다.
영옥: 월요일이요. 아저씨: 구경 다 했어요?
영옥: 네, 거의요. 아저씨: 예송리는 가봤어요?
영옥: 지금 가려구요. 아저씨: 어? 나도 지금 예송리 가는데...
우왓!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았다. 역시 오늘 나는 운이 좋은게다.
청별을 지나 예송리 쪽으로 향하면서 아저씨는 예의 그 재미있는 말투로 보길도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이야기가 너무 길고 역사적·지리적 전문성을 띠고 있어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쉽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원래 보길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보길도와 백도. 그런데 보길도와 백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 그 이유가 잘 기억이 안난다.^^;) 백도(白島)는 백도리(白島里)가 되었고, 통리는 백도리로 통하는 마을이라서 통리(通里), 중리는 그 사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중리(中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아저씨 역시도 추측에 기반한 논리이지만,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는 강한 자심감에 가득 찬 아저씨가 하도 진지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바람에, 나 역시도 꽤 그럴듯한 주장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게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 걸었으면 네시간도 넘게 걸렸을 예송리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예송리 해수욕장 맨 끝에 세워주셨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껌 하나를 답례로 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지난 번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아쉬움에 쓰린 속을 달래야만 했던 바로 그곳이다. 감격스러웠다.
예송리 해수욕장의 모습은 중리·통리·보옥리와 또 다르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이 섬에 이렇게 다양한 얼굴의 바닷가가 여럿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곳은 모래도 아니고 공룡알도 아닌 작고 까만 조약돌로 가득 차있다. 그 까만 조약돌은 ´갯돌´이라고 하는데, 보통 ´깻돌´이라고 부른다. (대구에서 온 병진언니는 ´콩돌´이라고 불렀다.) 이 깻돌들은 보길도에서도 예송리에만 있는 희귀한 돌이다. 때문에 예송리 해수욕장 주변에는 ´해변의 갯돌을 한 개라도 가져가거나 갯돌 위에 불을 피우지 맙시다´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이곳 주민들의 자발적인 철저한 감시 속에서 관광객들에 의한 외부 반출이 금지되고 있다.
그러나 물론, 관광객들이 섬을 나갈 때 공항의 출국장처럼 짐가방을 수색하거나 자동깻돌탐지기 같은 것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져가고자 하는 굳은 의지와 민첩한 손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만 그 이후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감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갔으면서도 깻돌들을 보는 순간 너무 예뻐서 저절로 한주먹 가득 쥐어지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바다에 흩뿌렸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고 귀여운 깻돌들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거다. 하지만 깻돌 몇 개를 주워온다고 해서 보길도를 통째로 마음 속에 담아오는것만 하겠는가.
깻돌밭을 걷기 시작했다. 저쪽 집앞에 모닥불이 있길래, 아까 먹었던 귤껍질을 던져넣었다. 그랬더니 그 앞에서 그물을 손질하시던 할아버지 한분이 뭐라뭐라 하신다.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네?! 몇 번을 되물으니 곁에 계시던 할머니 보다 못해 소리를 치신다. "아, 글씨. 태울 것 버려줘서 고맙다구!" "아, 네∼" 나는 멋쩍게 웃는다. 할아버지께서 왜 젊은 처녀가 혼자 다니냐고 물으신다. 누가 업어가면 어쩌냐고. 내가 대답했다. "저 무거워서 못업어가요." 내 대답을 들으신 할아버지 曰, "늙은 나도 업겄다."

예송리 해수욕장을 걷다보면 한 2m 간격으로 배가 묶여있다. 배는 바다에 떠있고 줄이 연결되어 바닷가에 말뚝을 박아 메어놓았는데, 줄이 팽팽한 게 무릎 높이 정도 된다. 속으로 이건 허들이야 생각하고는, 달려가면 뛰어넘고 걸려서 넘어지고, 또 혼자 난리를 친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도 잘 논다.)
그러다가 사람들이랑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앉았다. 깻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고 까맣고 윤기 나는 게 꼭 쵸코볼들을 쌓아놓을 것 같다. 햇빛이 좋다.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파도 치는 소리가 들린다. 철썩... 떼그르르륵... 철썩... 떼그르르륵... 파도가 치면 그 물살에 깻돌들이 떼그륵떼그륵 굴러 내려간다. 소리가 너무 앙증맞다.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을 했다. 그러나 들어보니 그 귀여운 소리가 잘 안들린다. 예송리 해수욕장의 깻돌밭에 올 때는 카메라보다 고성능 녹음기가 필수다. 안그럼 두고두고 그리울테니...
굴러가는 깻돌을 쳐다보았다. 물이 맑아서 바닥의 깻돌까지 다 보인다. 물이 너무 맑아서 정말 바닷물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밀려오는 바닷물을 손으로 찍어 먹어보았다. 음.... 바닷물 맞다.

예송리 해수욕장을 나와 도로를 따라 걸었다. 뜻하지 않게 방향이 같은 차를 얻어타게 되어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송시열 글씐바위에도 가봐야 겠다. 이 길은 양 옆이 숲이다. 새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외딴 섬에 와 있는 것 같다. 내가 로빈슨 크루소가 된 건 아닐까, 또 허황된 공상에 잠긴다. 열심히 걷다보니 너무 덥다. 땀이 삐질삐질 솟는다. 아직 글씐바위까지는 9km나 남았다. 휴∼ 예송리 해수욕장이 보이는 정자(亭子)에서 발을 식혔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옆에 택시가 한 대 와서 선다. 어쩜 이렇게 시기 적절하게 차를 타게 되는지. 보길도의 택시는 참 웃기다. 보통 승용차가 아니라 무쏘나 갤로퍼 같은 사륜구동차가 택시다. 그 큰 덩치에 조그만 택시 표시 모자를 쓰고있는 모습이란 며칠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고 웃음이 난다.
택시를 타고 글씐바위까지 가자고 했더니, 거기는 비포장도로라 엄청 비싸다고 겁을 주신다.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그럼 비포장도로 앞까지만 태워다 주세요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글씐바위까지 태워주셨다. 글씐바위로 올라가는 비포장도로는 너무 험해서 이곳 택시들이 사륜구동차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글씐바위로 가는 도중 아저씨가 어디서 묵느냐고 물으시길래, 세연정 근처요 했더니, 아∼ 동천다려? 하신다. 동천다려 주인장이 왜 글씐바위가 생겼는지 이야기해 줍디까?라는 질문에 ´아니요´ 했더니 차에서 내려 글씐바위까지 따라오셔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이 곳 주민들은 모두 관광가이드인데다가 대단한 애향심(愛鄕心)의 소유자들이다.
글씐바위는 조선 숙종 때 귀양가던 송시열이 풍랑을 만나 잠시 상륙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시를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정식 명칭은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시암(嘆詩巖)」인데, 역시 이 바위도 보통은 ´글씐바위´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글이 쓰여진 바위´라는 뜻이다. 여러 차례 말하지만 이곳의 이름들은 너무 서민적이다.
글씐바위에 새겨져 있는 시는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탁본을 해서 까맣게 먹물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았다. 글씐바위 앞의 널찍한 바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부러워보인다.
택시아저씨가 담배 한 대를 파우시고 다시 차로 오셨다. 돌아내려오는 길 옆의 갈대가 멋있다. 뽀송뽀송한 베이지색 물결이 바람따라 출렁인다.

글씐바위까지 보고도 시간이 남아 집까지 걸어가려는 심산에 중리 해수욕장에서 세워달라고 했다. 보길도의 택시회사와 택시끼리는 서로 무전기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저씨들의 대화가 재미있다.
택시회사: 00에 손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택시A: 네. 00번 택시 그곳으로 갑니다.
택시B(내가 타고 있는 택시다): 야!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는구마∼잉
택시A: 니가 아주 염장을 지르는 구마.
잠시 후,
택시C: 청별항 앞에서 안전벨트 단속하고 있습니다.
택시B: 감사합니다∼잉. 하지만 우리 모두 지킬 것은 지킵시다∼잉.
영옥: ??? (정작 이 아저씨도 안전벨트 안하고 계심)

중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지갑을 주섬주섬 뒤지며 얼마냐고 물었다. 아까 되게 비싸다고 그러셨는데, 혹시 몇 만원 하는게 아닐까... 속이 바짝바짝 탄다. 잠시 고민하시던 아저씨, 원래는 이만원 받아야 되는데 나만 특별히 육천원 받겠다고 하신다. 동천다려 주인장에게 안부 전해달라시며 가신다. 동천다려 덕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짜잔∼ Lucky Girl, 윤영옥!

여기서부터는 어제 도치미 끝에 가느라 한번 왔던 곳이라 눈에 익다. 이제 무작정 걷기만 하면 된다.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렇게 걷다보면 에덴동산바위가 나온다. 나무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산 여기저기에서 띄엄띄엄 염소 울음 소리도 들린다. 저 앞에 모처럼 풀렸는지 기뻐서 날뛰는 커다란 개도 보인다. 차 한 대가 또 선다. 태워다 주겠다고 하셨지만 공손히 사양하고 계속 걸었다. 청별항에 다왔다. 근처 학교의 하교시간이 되었나보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제각기 친구들과 조잘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나도 지금 집으로 가고 있다. *^^* 이제 조금씩 어둑어둑 해진다.

근데 내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뚜벅뚜벅... 무섭다. 언뜻 돌아보니 검은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남자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뭘까? 점점 더 무서워진다. 주위를 둘러봐도 집 한 채 보이지 않고, 도움을 청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까 그 차를 타고 갈 걸 그랬나 후회가 된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너무 겁에 질려, 그만 제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발자국은 내게로 점점 다가오더니............... 나를 스쳐지나갔다. 하아, 잠시 잊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고 보길도다.

다시 기운을 되찾고 혼자 헤벌쭉 웃으며 동천다려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었는데, 방안이 썰렁하다. 아침에 빨아서 널어놓은 양말이 아직도 축축하다. 내가 나간 사이에 선생님께서 보일러를 꺼 놓으셨나보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덮어썼다. 근데 그래도 춥다. 방이 넓어서 더워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려나보다. 그렇게 떨고 있는데 선생님 오시더니 하시는 말씀. 벨브를 착각해서 내 방 대신 내 앞방 보일러를 열어 놓으셨다나... 방이 썰렁한 이유는 넓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녁 먹으러 오라셔서 안채로 건너갔다. 부엌문을 여는 순간 선생님과 함께 낯선 여인 한 분이 반갑게 맞으신다. 그분은... 일 때문에 서울에 잠시 올라가셨다는... 선생님의 부인되시는... 그러니까 사모님이셨던 것이다. 참 차분하고 분위기있는(나와는 전혀 반대인) 분이셨다. 두분이 너무 잘어울리신다. 경어(敬語)를 쓰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연인상 아니던가)
저녁메뉴는 오전에 장에서 사오셨다는 조개로 끓인 조개탕이었는데, 무교동 낙지 골목에서 파는 조개탕은 비할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무교동의 낙지볶음과 조개탕보다 이곳의 낙지요리와 조개탕이 훨씬 맛있다고 열변(熱辯)을 토하신다. 그럼요,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요. 속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겉으로는 밥그릇에 붙은 밥풀떼기까지 박박 긁어 정성껏 밥을 먹었다.(그랬더니 나중에 사모님께서 밥 많이 먹는다고 놀리셨다. --;)
저녁을 다 먹고 다실에 모였다. 오늘이야말로 여인천하의 절정이다. 사모님, 인희언니, 나, 진강이, 진강이 친언니의 학교 선배언니, 병진언니가 나간 방에 새로 들어온 여자 손님. 이렇게 여자 여섯이다.
어제 밤에 진강이가 집에 가면서 ´안녕히 가세요.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이제 못뵙겠네요´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또 보게 되어 서로 민망하게 웃었다. 진강이는 오늘, 같이 온 선배언니와 함께 또 도치미 끝에 갔다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오신 손님과 오늘 나간 병진언니, 인희언니, 나 모두 처지가 비슷하다. 전부 직장을 그만 두었거나 그만 둘 예정이고, 여자이고, 이곳에 혼자 왔다. 이 사실을 상기하며 모두 웃었다.

선생님께서 차를 내오셨다. 술이 아니라 차라서 조금 놀랐지만, 아... 사모님이 계셔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차를 마시면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맥주를 내오신다. 그러자 사모님을 더욱 놀랍게도 맥주는 못드신다고 소주를 달라신다.
선생님의 어설픈(?) 관상법으로 웃음소리 높아지고, 뜻은 모르지만 진강이의 러시아 노래 한곡으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 해져갔다. 소주도 맥주도 떨어지자, 이번에는 새롭게 쟈스민차술이 등장했는데, 이 술 때문에 화제가 ´술´로 넘어갔다. 이게 화근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 했던 얘기, 자주 가는 술집 얘기 할 때마다 모두들 나를 술꾼으로 몰아가면서, 혹시 가을아침도 술집이름 아니냐, 맨날 술만 먹고 사냐, 다녔다는 학교도 술집의 애칭이냐 놀려댔다. 억울하다. 알고보면 내가 얘기했던 건 전부 한 곳의 이야긴데... 나는 무슨 동천다려 구박댕이인가, 엉엉엉. 내가 생긴건 이렇게 우락부락(?)해도 마음은 소심한데, 다들 너무한다.(눈물 뚝뚝...ㅠㅠ)
그래도 이 한몸 바쳐, 모두가 즐겁다면 나 역시 즐거운 희생(?)이리라.

한참을 재미있게 놀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들어왔다. 이불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은 정말 알차게 보낸 하루였다. 뿌듯하다.

내일 서울로 돌아가면, 이곳에서의 추억의 여파가 얼마나 오래갈까..
눈이 가물가물 감겨온다. ZZZ...

<글/사진 = 가을바람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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