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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男子, 그 男子] 길은 당신을 기다린다 "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1.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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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저마다의 인생은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끊어질 듯 이어진 자리가 곧 길이 된다. 그것은 그 어떤 사람도 같은 길을 걷지 못하는 이유이자, 한 점 바람 같은 이 생애의 비밀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길이 오랜 시간 우리를 기다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희한하게도 세상의 많은 길은, ‘길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길을 앞서 걸어간 남자들, 그들 중 두 사람을 만났다. 왜 그 길이었냐고 묻는 동안, 우리는 저절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그 男子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한 이형모
사랑의 바퀴를 굴렸던 두 男子
 

4,810km 죽음의 레이싱, 나눔이 되다 

한때 이형모(32세)씨는 수직의 사나이였다. 전문 산악인으로 에베레스트 같은 세계의 고봉들을 수차례 등정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함께 2009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라는 새로운 등반 루트를 개척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고, 철인삼종경기에 출전해 기록을 갈아치우며 단기간 내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의 지인 사이에서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 훈련과 운동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4월 초, 그가 자전거를 타다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비골(골반과 무릎 사이에 뻗어 있는 넙다리의 뼈)과 허리의 횡돌기뼈가 골절되었다는 소식은 우울한 비보였다. 당시 그는 미국 대륙횡단 자전거 대회인 RAAMRace Across America을 준비 중이었다. 장장 8일 동안 4,810km(3,000마일)을 달려야 하는 악명 높은 죽음의 레이스가 바로 RAAM이다. 대회 시작이 6월18일이었으니 대회를 불과 두 달 반 앞둔 시점이었다. 50여 일 이상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그가 완쾌되지 않은 몸(뼈가 70%만 붙은 상태였다)으로 RAAM 출전을 강행한다는 소식이 걱정스러운 놀라움이었다면, 2명으로 구성된 그의 팀이 2인조 50세 이하 부문에서 1위의 기록(8일 1시간 15분)을 거두었다는 것은 기쁨의 놀라움이었다. 밤낮없이 교대로 자전거를 달려야 하는 RAAM의 혹독함은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회를 경외해 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구미에서 핸드폰 대리점을 운영하는 김기중(38세)씨다. 사실 이형모씨를 RAAM으로 끌어들이고 크루Crew를 모집하여 출전 자체를 성사시킨 장본인은 김기중씨다. 어린 시절 고도 비만이었던 그는 무리한 다이어트의 후유증으로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15년 이상을 고생했었다. 정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증세가 심해 약에 의존해야 했던 그의 병을 낫게 한 것이 자전거였다. 자전거 동호회 활동을 통해 좋은 코치를 만나면서 실력과 체력도 갖추게 되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대회 출전을 결심한 그에게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RAAM은 첫 출전자에게는 솔로 출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2인이나 4인, 혹은 8인팀을 구성해야 했다. 팀 인원이 많을수록 완주에 유리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도전을 함께할 단 한 명의 파트너를 물색하던 그의 귀를 솔깃하게 한 추천이 있었다. 이미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입소문이 났던 이형모씨였다. 2010년 10월 평창의 자전거 대회에서 조우한 두 사람의 마음은 금방 통했다. 하지만 서울과 구미라는 물리적 거리와 형모씨의 교통사고로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는 훈련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형모씨의 퇴원 후 2주 정도의 합숙 훈련이 본격적인 대회 준비의 전부였다. 두 명의 경주를 지원할 크루 4명(박재완, 박원기, 이형구, 박대규)과의 첫 전체 미팅은 한국을 떠나는 당일 인천공항에서야 이뤄질 수 있었다. 보통 몇 년씩 준비하는 다른 팀에 비하면 모든 상황이 아슬아슬했다.  

RAAM은 극한의 레이스이자 고독한 레이스다. 미서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오션사이드부터 동부 메릴랜드주의 아나폴리스까지 장장 4,810km로 이어지는 미대륙 횡단 코스는 록키산맥을 넘고, 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도는 콜로라도 사막도 건너고, 다시 아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야 한다. 3시간의 시차가 있는 거리다. 2인 이상 팀을 구성해도 달리는 동안에는 교대로, 철저히 혼자만의 경주가 밤낮없이 계속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중간 구간들을 통과하지 못하면 실격이 되고, 솔로는 12일, 여성과 60세 이상 솔로는 13일, 2명 이상 단체는 9일 안에 전 구간을 완주해야만(하루 평균 500km를 달려야 한다) 기록이 인정된다. 미국의 지리에 익숙하고, 영어에 능숙하고, 많은 크루(보통 1팀은 8명의 크루로 구성된다)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중도 포기하거나 탈락되는 지원자가 적지 않다. 게다가 RAAM은 우승자에게 상금을 주는 대회도 아니다. 그래서 더 명예롭다. 

30년이나 이어온 RAAM 대회에서 한국팀이 참가한 것은 이번이 최초였고, 아시아에서는 1990년 일본의 철인삼종경기 챔피언이 완주한 이후 두 번째였다. 정보도 부족했고, 환경도 열악했다. 게다가 이형모씨는 교통사고에서 완치되지 않은 몸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김기중씨가 대회 도중 자동차에 무릎을 부딪치는 사고를 당해 회복될 때까지 이형모씨가 연속으로 9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은 예상 외로 좋았다. 한국팀의 이러한 사정이 대회본부와 선수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관심과 응원이 모아졌다. 크루가 최소인원인 4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두세 시간씩 토막잠을 자고 먹는 것도 자전거 패들을 돌리며 때워야 했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완주에 성공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 남자에게는 꼭 완주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대회를 준비하며 각자 후원단체를 정하고 후원자를 모집했다. 1km당 후원금을 책정해서 적립하는 방식이었기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이형모씨는 강릉 ‘자비원’의 아이들을, 김기중씨는 외국인 노동자, 북한 이주민들을 돕는 구미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런 모금 이벤트는 RAAM 참가 선수들에게 흔한 일이다. 상금이 없는 대회이기에 더 많은 후원자들이 동참한다. 다양한 계층과 직종의 사람들이 각자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대회에 참가하는데, 이번 대회의 경우 일본에서는 에이즈 환자로 구성된 팀이 출전했고, 전쟁에서 몸을 다쳐 의수와 의족에 의지해야 하는 미군 상이용사팀도 있었다. 또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둔 사람이 친구와 함께 출전해 자폐 아동을 위한 성금 모금을 하는가 하면 아프리카에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하는 여성 솔로 출전자도 있었다. 현재 RAAM이 보유하고 있는 최고 기록은 당뇨병 환자들에 의해 수립된 것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바이시클 드림’이라는 RAAM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김기중씨는 대회 출전을 결심했고, ‘모금’이라는 아이디어도 얻었다. 자전거 동호회원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뜻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응원했고 1,248만원의 후원금이 적립됐다. 

대회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들은 몸을 추스르기 무섭게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서울에서 출발해 구미를 거쳐 강릉까지 가는 한국판 미니 RAAM에는 뜻이 맞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무박 3일의 일정으로 동참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형모씨가 거듭 강조한 말은 이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도전하고 싶은 이벤트로만 생각했는데, 교통사고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의미를 가지니까 훈련도 훨씬 수월해지더라고요. 모금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저희는 아마 완주하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에 돌아와 제가 후원하는 자비원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타기 행사를 했는데, 그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완주했던 순간보다 더 기뻤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형모씨는 미래의 방향을 고민 중이고, 김기중씨는 구미에서 평범한 생활인의 삶으로 복귀했다. 대회참가자가 화제가 되어 많은 인터뷰와 방송까지 출연했지만, 항상 그러하듯 이 일은 사람들에게 곧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후원에 참가하며 두 사람과 잠시라도 같은 길을 달렸던 사람들의 인생은 분명히 그 방향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혼자 달리고 있지만 혼자가 아닌 길. 세상엔 그런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Race Across America 미 대륙 횡단 자전거 대회 

올해로 30회를 맞이한 미대륙 횡단 자전거 대회는 전세계 자전거 동호인들이 꿈꾸는 대회지만 그 혹독함 때문에 ‘죽음의 레이스’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 서부의 캘리포니아의 해안도시부터 동부 메릴란드주의 해안도시까지 총 4,810km(3,000마일)의 거리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산맥을 넘고, 사막도 지나야 한다. 솔로 출전의 경우 12일 안에 완주해야 기록을 인정한다. 처녀 출전의 경우 반드시 2인 이상 팀을 꾸려야 하는데, 2인, 4인, 8인까지 선수팀을 꾸리고 한 팀당 보통 8명의 크루가 2대의 차량으로 선수를 지원한다. 우승자에게 상금을 주는 대회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참으며 RAAM에 도전한다. 올해 대회는 6월18~27일까지 진행됐으며 솔로로 출전한 선수가 47명, 2인조 9팀, 4인조 31팀, 8인조 12팀으로 선수만 285명이었고, 크루까지 합하면 총 1,000여 명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한국에서 팀이 출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2인조 50세 이하 부문에서 8일 1시간 12분으로 가장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다. 생생한 레이스의 기록은 김기중씨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kijung31



1 긴 여정의 출발을 앞두고 각오를 다지는 김기중(좌), 이형모(우) 2 시합 4일째 갑자기 끼어든 차량에 김기중씨의 자전거가 두 동강 났지만 다행이 큰 부상은 피했다 3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전거 위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4 콜로라도 사막 지대를 지나는 코스에서 두 선수가 교대하고 있다 5, 6 두 선수는 각각 후원 단체를 지정해 킬로미터당 후원금을 적립하는 모금 행사를 했다.함께 자전거 타는 시간을 가졌던 강릉 자비원 아이들과 구미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 두 단체에 1,248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했다 7 대회 후까지도 이형모씨의 다리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틈틈이 라이딩을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 RAAM 팀코리아

그 男子  

안면송 숲길을 만든 박철한
길을 돌보는 세 男子의 도전



안면도의 모든 것, 안면송길에 담았다

산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하지만, 열병처럼 퍼진 길 신드롬은 사실 별로다. 이제 전국의 산하에 걸어야 할 길이 너무 많아져 오히려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안면송길도 이런 유행을 따라 만들어진 ‘그저 그런 길’이면 어쩌나, 그것이 서해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품었던 고민이었다. 하지만 휴가철 교통체증을 뚫고 그곳까지 기어이 찾아갔던 이유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 그리고 세 남자의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철한(48세)씨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가 운영하는 여행사인 ‘안면도 여행 이야기’의 컨테이너 사무실에서였다. 오른쪽 팔에는 안면도의 이니셜 A, 왼쪽 팔에는 ‘안면송길’의 로고, 왼쪽 가슴에는 태극기가 새겨진 연두색 셔츠는 제법 격식을 갖춘 것이었다. 이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두 사람 더 있다. 모터수리기술자이자 (사)안면발전협의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오호일(46세)씨와 식당을 운영했다가 지금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김철준(42세)씨가 그들이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세 남자는 길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이전까지 안면도는 1년에 관광객이 100만명씩 늘어나서 2007년에는 500만명이 섬을 찾았었다. 하지만 바다가 오염되자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가 조금씩 회복되어 지난해에야 다시 250여 만명이 안면도를 찾았다. 그런 안타까운 시절을 지켜봐야 했던 세 사람은 안면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안면송길’을 구상했다. 길라잡이를 한 것은 오호일씨였다. 모터 수리일을 하는 그는 안면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섬의 거의 모든 길을 꿰고 있다. 2006년부터 고향에 내려와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갯벌 체험, 초경량 항공기 비행 체험, ATV 체험 등을 진행하고 있는 박철한 대표가 안면송을 중심으로 한 안면도의 역사이야기를 준비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변산 마실길 등을 답사하며 벤치마킹도 했다. 2010년 ‘공공근로사업’에서 8명의 인력을 지원받아 본격적인 길 닦기가 시작될 수 있었고, 5개월 가까운 정비 작업 끝에 드디어 ‘안면송길’이 완성됐다. 

이 정도의 배경 설명을 듣고 나서 신발끈을 단단히 맸다. 박철한씨가 안내한 안면송길을 걷는 동안 하늘로 쭉쭉 뻗은 적송들이 내내 길을 함께했다. 안면도 주민들의 운명은 안면송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롭게 휘어져 자라는 소나무는 보기에 멋스럽지만 목재로서는 활용범위가 좁았다. 그래서 곧게 자라는 안면송은 궁궐의 목재로 적합했기에 조선시대에 이미 국유림으로 지정됐다. 산림보호원을 두어 사람들이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을 해안으로 이주시키는 등 엄격한 보호정책을 펼쳤다.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안면도의 역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름드리 소나무에 감탄하며 길을 가다 보면 몸통에 V자 모양의 홈이 패인 소나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군용항공기 연료 확보를 위해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들이다. 그런 이유로 훼손된 중경목 이상의 안면송이 10여 만 그루나 됐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는 안면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는 것. 조선 인조 때 곡식 수송을 위해 육지와 연결된 부분을 끊고 수로를 뚫으면서 안면도는 섬이 됐다. 그래서 섬의 나이가 이제 370년 정도라고 했다. 또 원래 안면도는 생선가시처럼 해안선이 들쑥날쑥한 섬이었지만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마치 고구마처럼 둥근 섬이 됐다. 세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외지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문화유산해설사 자격까지 취득하고 총 5시간 코스 중 2시간 정도를 해설하며 동행하는 걷기여행 프로그램도 진행했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보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연꽃이 가득한 승언1호 저수지다. 해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왕래할 수 있었다는 이곳은 이제 물길이 막혀 버렸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경이 되었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연꽃 저수지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에 벤치를 설치한 이유도 혼자만 알기에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위한 길’은 평탄치가 않았다. 2010년 7월에 길을 개통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에 태풍 곤파스가 찾아오면서 8,000그루의 안면송이 쓰러져 버렸다. 수령 70~100년 사이의 우람한 소나무들이 맥없이 꺾여 버렸다. 조선 인조 때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을 위해 ‘소나무 위안제’를 올려 주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소나무 위안제’를 올리기도 했다. 당연히 안면송길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다시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때 쓰러져 아직도 치우지 못한 나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오호일씨는 숲의 모습이 아예 달라져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 예산이나 정책들은 여러 가지 악재로 번번이 이들을 비껴갔고, 홍보 부족으로 찾는 사람이 많지 않자 애써 가꾼 길은 조금씩 훼손되고 있다. 

“안면송길은 안면송 휴양림, 저수지, 꽃지 해변, 안면 염전 등을 모두 통과하기 때문에 안면도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고 있는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국립공원에서 개발한 태안 해변길이 조성되면서 안면송길이 그냥 묻혀 버릴 위기에 처했죠. 지자체의 도움 없이는 홍보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최근에 천수만 안길 100km를 개발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으니 거기에 다시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직접 걸어 본 안면송길은 여전히 숲이 울창하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사람과 자연, 모두를 섬세하게 고려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못 쓰는 가지를 깎아 만든 안내 표지판이라든가, 통나무를 듬성듬성 놓아 만든 자연스러운 계단은 인위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실 도보 여행자에게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세 남자의 땀과 정성을 모르더라도 안면송길은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부드러운 흙, 상쾌한 솔향, 그리고 그동안 몰랐던 안면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길은 이미 풍성하다. 



1 박철한씨는 안면송길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길을 사랑하고 있음이 전해졌다 2, 3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숲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소소한 것들을 찾는 것이 트레킹의 재미이기도 하다




1 사람도, 자연도 편안한 길을 만들고자 고민했던 흔적들이 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2 승언1호 저수지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세곡선이 드나들던 곳이지만 지금은 수련이 가득한 저수지가 됐다 3 안면송길 개척에 앞장섰던 세 남자 중 오호일씨가 박철한씨의 사무실에 들렀다.

 

안면도의 축소판, 안면송길

안면도 꽃지에서 승언1호 연못을 지나 자연휴양림 뒷길을 따라 걷다가 염전을 지나 다시 꽃지 해변을 통과해 돌아오는 총 13km 정도의 트레킹 코스로 지난해 안면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조성되었다. 바다, 안면송 숲, 염전, 연못, 목장 등을 지나는 코스라 안면도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아 놓은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전체 코스(13km) 꽃지→방포저수지→여뱅이마을→조각공원→초망수골→안면도 시장 장터→비석골→땅골망→안면중·고→1호 저수지→자연휴양림→큰바탕→안면염전→이주단지→꽃지 펜션마을→논골→동답→꽃지(꽃다리)

해설사 동행 프로그램 

안면송과 관련된 안면도의 흥미로운 역사, 갯벌과 숲에 대한 살아있는 배움을 얻으려면 해설사가 동행하는 2시간 정도의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현재는 코스안내 표지판이 훼손되기도 해 혼자서는 길을 헤매게 될 수도 있다. 매주 토·일요일 안면숲 입구에서 출발하며 2시간(비석골~큰바탕), 4시간, 6시간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참가비 2시간 코스 기준, 성인 7,000원, 어린이 5,000원
문의 041-673-0118 www.anmyeondo.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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