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GERIA-섬, 사막 그리고 이방인의 알제리"
"ALGERIA-섬, 사막 그리고 이방인의 알제리"
  • 트래비
  • 승인 2012.03.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ESERT  ALGERIA

섬, 사막 그리고 이방인의 알제리   

1년에 한 번 있는 큰 축제 스비바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쟈네트 마을의 투와레그족 소녀들


•국명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면적 2,381,741km2, 한반도의 10.7배
•인구 3,600만명(2011년 1월 기준)
•언어 아랍어(국어), 베르베르어(공용어), 프랑스어(상용어)
•시차 한국시간 8시간 늦음
•기후 지중해성(북부), 초원성(연안평야), 사막성(남부)
•수도 알제(인구: 약 300만명, 면적 363km2, 서울의 1/2)
•GDP(1인당) 4,845미국달러(2010년)
•통화 알제리 디나Dinar/ 74.65디나=1미국달러(2012년)


알제리는 섬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 말은 알제리가 북쪽으로 1,200km의 지중해변을 끼고,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을 안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 크기의 국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엉성한 궤변이다. 하지만 알제리의 수도 알제가 아랍어로 ‘작은 섬’을 뜻한다거나 사하라사막의 별칭이 ‘모래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럴 듯한 비유가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에게 알제리는 마치 미지의 ‘섬’처럼 멀고 낯선 곳이니 말이다. 비슷한 영감을 받았던 것인지 장 그르니에는 알제리에서 <섬>을 썼고, 까뮈는 <결혼·여름>과 <이방인>을 남겼다. 나는 지금부터 ‘이방인’의 시선으로 알제리라는 ‘섬’에 대해 써볼 참이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찬  주한알제리대사관 www.algerianemb.or.kr

알베르 까뮈Albert Camus(1913~1960)
1943년 세상에 내놓은 소설 <이방인>으로 문단을 술렁이게 했던 까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출생한 프랑스인이다. 학창시절을 알제에서 보낸 그는 앙드레 말로와 지드의 책을 탐독했고 알제 대학에서 은사 장 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혼·여름> 등의 시적 산문집뿐 아니라 <페스트>, <이방인> 등의 소설, <반항적 인간> 같은 철학적 에세이를 발표해 사회참여(앙가주망engagement)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1898~1971)
프랑스의 작가 겸 철학자로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성장했으며 알제 대학에서 철학교수를 지냈다. 시적 명상과 풍부한 서정이 가득한 에세이집과 철학서적을 냈으며 대표작으로 <섬>, <지중해의 영감>, <자유와 선용에 관한 대화>, <알베르 카뮈에 대한 회고>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섬>은 지드의 <시장의 양식>, 카뮈의 <결혼·여름>과 함께 20세기 프랑스의 시적 산문집 중 3대 걸작으로 꼽힌다.

·국명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면적 2,381,741km2, 한반도의 10.7배
·인구 3,600만명(2011년 1월 기준)
·언어 아랍어(국어), 베르베르어(공용어), 프랑스어(상용어)
·시차 한국시간 8시간 늦음
·기후 지중해성(북부), 초원성(연안평야), 사막성(남부)
·수도 알제(인구: 약 300만명, 면적 363km2, 서울의 1/2)
·GDP(1인당)  4,845미국달러(2010년)
·통화 알제리 디나Dinar/ 74.65디나=1미국달러(2012년)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이메일함을 열어 본다. 밤사이 무슨 비보가 있을 리 없겠지만 직장인들의 아침 의례가 그러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주한알제리대사관에서 온 ‘급보’가 하나 있었다. 오락가락,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알제리 여행의 이티켓이었다. 출발 날짜는 ‘내일’, 그러나 카타르항공의 이륙 시간은 새벽 0시30분. 사실상 당일 밤이었다. 그것이 알제리 여행 내내 지속됐던 불확실성을 예고하는 전초전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날짜가 변경됐을 뿐 아니라, 일정이 3일이나 늘어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깨달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짐을 꾸렸고 자정 즈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로써 나는 순식간에 알제리에 초대받은 이방인이 되었다. 

‘초대받은 이방인’이 되다   

카타르 도하를 경유해 알제리의 수도 알제Algiers에 도착했다. 출발에 비하면 도착은 너무나 느릿하게 이뤄졌다.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1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고 다시 짐 검사를 하는 ‘철두철미’함 때문에 2시간 만에 공항을 탈출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호텔이 불과 10분 거리라는 점이다. 한국의 대우건설에서 세운는 알제 힐튼 호텔은 썩 괜찮은 호텔이지만 한참 늦어진 점심 식사가 끝났는데도 방이 준비되지 않아 1시간을 로비에서 서성여야했다. 하지만 인천공항을 떠난 지 16시간 만에 다시 만난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 덕에 사람들은 무한한 인내심의 소유자들이 됐다. 

3,600만명 인구의 99%가 수니파 이슬람교인 나라와의 만남은 호텔방에서 시작됐다. 서랍 바닥에 붙어 있는 나침반 스티커가 정확히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언어와 종교를 지켜냈고, 8년간의 격렬한 독립전쟁 끝에 1962년 공화국을 설립한 나라다. 알제리관광청에서 일행을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이 바로 그 대불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현충탑Sanctuary of the Martyrs이었다. 군사박물관이 있다는 내부에는 들어가 볼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농업, 공업, 군인들을 상징하는 세 개의 휘어진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허공의 정점에서 만나는 탑은 엄숙한 건축물이었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어둠이 내리는 와중에도 가이드의 손끝은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한 듯 사방으로 움직이며 이런저런 설명을 쏟아냈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설명했던 보태니컬 가든은 중국,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지원으로 조성되었고 영화 <타잔>의 촬영장소였다고 했지만,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짧은 투어에도 불구하고 8시간의 시차를 견뎌 낸 몸은 식당에 도착했을 즈음 녹초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어와 아랍어로만 작성된 메뉴 해석을 포기하고 쟁반 가득 배달된 날생선 샘플에 자극받아 모두의 선택은 일종의 ‘피시 정식’으로 통일됐다. 담백한 지중해가 입 속에서 파닥거렸다. 



1 휴일 오전 카스바의 골목길에는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했다 2 카스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마을의 공동샘물은 식수로 사용해도 될 만큼 깨끗하다 3 수도 알제의 구시가지인 카스바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 매력적이다 4 카스바에 남아 있는 ‘유대의 별’은 유태인들이 살았던 흔적이다. 대불 독립전쟁 당시 유태인들이 배신하고 프랑스 편에 서자 알제리는 카스바에 살던 유태인들을 쫓아냈다 5 복잡하게 얽힌 골목이 무섭거나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어딜 가나 천진한 아이들이 놀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바에서 길을 잃다 

수도 알제의 구시가지 성벽 위에 세워진 카스바Casbah1)는 미로였다, 퍼즐이었다. 집과 집이 아주 좁은 골목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혼자 나섰다가는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의 요새 도시는 16세기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수도였고,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종종 할리우드 영화 추격신의 단골 배경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지속됐던 알제리 전투2)에서 프랑스군이 가장 곤혹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이 미로와도 같은 도시에 숨어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저항군들이었다. 요새화된 도시는 숨고자 하는 자들의 그림자마저도 감춰 주는 천혜의 은신처였다. 그때 이름을 날렸다는 알리 라 뿌앙트Ali La Pointe, 라르비 벤 미히디Larbi Ben M’hidi 같은 전설적인 독립군들의 얼굴을 작은 골목카페에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젊고 뜨거웠던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찻물을 끊일 때마다 함께 데워지고 있었다. 

사실 후미진 골목의 연속인 ‘카스바’는 우범지역 중 하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골목에서 더 진도를 나아가 주택의 내부로 들어갔다. 일요일 아침, 아직 손님맞이 준비가 되지 않은 시간에 불쑥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행의 무례를 참아 주었다. 현관을 통과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건물 한가운데는 지붕이 없는 사각형의 마당Pathio이 있었다. 작은 마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면 다른 층의 테라스는 저절로 가장 좋은 관람석이 되었을 것이다. 층마다 구조는 비슷했지만 여러 세대가 사는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개조를 금지하고 있어 낡고 칙칙한 건물 외부에 비해 내부는 오히려 화사하고 밝았다. 대가족이 함께 살 경우 안주인이 한눈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기 좋은 구조라고도 했다. 여성들은 집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나이 든 건물은 많이 약해져 있어서 옥상에 떼지어 올라가려 하자 안주인의 호통이 터졌다. 연약해진 집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외출을 잘 하지 않는 여인들과 달리 남자들은 골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하루 실업 수당 6디나르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도 차 한 잔의 휴식을 위해 카페 맞은편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알제의 시원’이 되었다는 작은 섬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섬’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은 해안의 돌출부는 그나마 커다란 빌딩으로 빽빽해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섬, 혹은 한 점이었겠지. 알제의 시민군들이 조국을 위해 꽃 같은 젊음을 버릴 수 있었던 것도 뚜렷한 ‘시원’이 그들의 눈앞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주)
1)카스바Casbah 
알제의 역사지구를 뜻한다. 그 기원인 카스바Kasbah는 북아프리카의 요새화된 도시와 마을을 일컫는 말로 돌벽 지구와 미로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2)알제리 전투La Bettaglia Di Algeri·1966년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이 알제리 독립 4년 후에 제작한 영화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알제리 독립의 비극적 유혈과정과 프랑스측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바를 주 무대로 벌어졌던 도시 게릴라전을 세밀하게 재연하여 CIA 등 각국 정보부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음악을 맡았다. 

 

까뮈가 사랑한 태양의 지중해

알제에서 오랑Oran으로, 사실 그건 작은 소동이었다. 이동 수단이 비행기임을 알려주지 않은 탓에, 터무니없이 늑장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 혼이 빠질 만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오랑은 그런 난리북새통을 모두 잊게 만들었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근대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랑 시내는 우아했다. 파리, 마르세유 등 로마가 세운 초기 도시들 중 다섯 번째 도시가 오랑이었다. 16~17세기까지 주로 유럽인들이 거주했던 도시였기에 무어인들의 스타일과 결합한 건축물들은 묘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내재된 우아함이 자본과 만나 극대화된 것이 우리가 머문 로열 호텔www.royalhoteloran.com이었다. 오랑이라는 이름은 ‘두 마리의 사자’라는 뜻의 아랍어 오랑Ouahran에서 유래된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 살았다는 두 마리 사자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대신 이름을 남겼고, 또 1886년에 세워진 시청사 앞에 두 개의 사자상을 남겼다. 

유서 깊은 도시를 감상하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산타크루즈 성당과 수호성모상Our Lady of Safety은 훌륭한 전망대였다. 9세기에 설치됐다는 군사항과 무역항의 풍경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1849년 1,6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을 막아준 성모상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산 정상에 거대한 성모상을 세웠다.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전까지는 가장 중요한 가톨릭 성지순례지 중 하나였지만 이슬람 국가에 남겨져서인지 타 종교의 성지는 어딘가 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역의 시민단체가 역사문화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이벤트로 매년 산 정상까지 수만명이 참가하는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었다. 오래전 이 지역을 침입했던 반달족Vandal에 의해 횡행했던 ‘반달리즘’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긴 역사 동안 알제리에 정박했던 문명은 로마뿐 아니라 반달, 비잔틴, 스페인, 무슬림, 오스만, 프랑스까지 변화무쌍했다. 그 문명의 흔적이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는 건축물과 종교 유적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알제리의 보물들임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오랑에서 틀렘센Tlemcen으로 가는 여정에서 차를 멈추었던 곳은 아인 테뮤센트Ain Temouchent지역의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절경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페르시아어로 ‘항구’를 뜻하는 마닥Madagh은 알제리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라서 여름이 되면 휴가객들로 붐빈다고 했다. 전날 점심을 먹었던 오랑의 해변 콤플렉스 ‘안달루시아(www.andalouses.com)’의 호텔과 125실의 콘도로 저렴하게 여름 휴가를 즐기기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겨울의 바닷가는 제 아무리 지중해라고 해도 쓸쓸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여정의 끝에 도착한 틀렘센에서 상상치 못했던 선물은 맛있는 알제리 전통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마라케Marrakech(0771-226779)였다. 갈비찜을 연상시키는 양고기 요리뿐 아니라 하트 모양으로 잘 다져진 허니 쿠스쿠스3)는 배고픈 여행객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미흐라브 궁전이 더 아름답게 보인 이유도 그것이 훌륭한 식후경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모로코에서 온 왕자가 세운 궁전의 내부는 페르시아의 발달된 타일 기술이 총동원되어 흙 묻은 신발로 함부로 밟기가 황송할 정도였다. 경주를 하다시피 궁전을 둘러보고 나오는 동안 ‘사이드 카’의 경호를 받으며 도시에 진입한 우리 버스 주변에 작은 인파가 모여들어 있었다. 알제리를 여행하는 내내 일행을 실은 버스는 경호원의 호송을 받았고, 또 지역이 바뀔 때마다 경찰들이 나와 교통을 통제했다. 감시인지 배려인지 모르는 채로 ‘국빈 대접’을 받고 있자니 처음에는 바늘방석 같았지만 웬만한 해외 손님들에게는 꼭 호송차량을 붙이는 것이 이들의 ‘의전적 관례’라고 했다. 게다가 며칠 전에도 남부 국경변의 사막에서 여행객들이 납치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나니, 거부감은 감사함이 됐다.


1 로마 유적지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티파사의 로마나 레스토랑에는 연인들이 많았고, 길고양이도 많았다 2 오랑 시내의 광장. 무어풍이 가미된 아르데코 스타일의 도시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3 아인 테뮤센트의 해안도로에서는 태양의 결을 보여주는 지중해의 풍경이 오래 이어진다 4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홍차. 민트 잎으로 향을 더하기도 한다5 신선한 생선요리는 지중해의 선물이다

비밀을 간직한 티파사 

‘봄철에 티파사Tipaza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로 시작되는 까뮈의 작품, <티파사에서의 결혼>을 줄줄 외던 옛사랑이 있었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나지막이 읊조리던 그 목소리 때문에 티파사가 알제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지중해변의 도시인 줄 모르던 시절부터 이 도시는 내게 특별했다. 그는 가끔씩 ‘까뮈처럼 쓸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겠다’며 티파사를 궁금해 했다. 그 도시로 홀로 떠나며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티파사에 가요.’ 몇년 만의 연락이었다. 

바로 그 티파사였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로마유적지가 많다는 아프리카 지중해변의 도시. 그래서 알제리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라고도 했다. 티파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로마나 레스토랑Romana Restaurant이었는데, 로마시대의 공중목욕탕 터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본 공중목욕탕은 41~54년(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임 시기) 사이에 건설되어 430년경에 파괴된 로마 도시 유적지의 일부였다.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로열패밀리들은 2km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 그들만의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막상 투어를 시작하자 신성한 여행의 기분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 이곳에 신들이라도 살고 있는 것일까. 공원 관계자들은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제한하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모리타니 왕족의 묘4)에서 마음껏 촬영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다. 지금의 폐허를 기록하는 대신 카메라를 내려놓고 해변에 앉아서 그 옛날 바다에서 배를 타고 티파사로 접근했을 때 이 도시가 뽐냈을 아름다운 자태를  상상하는 일은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편한 기류 때문에 내가 놓쳐 버리고 지금까지 아쉬운 것은 카뮈의 문학비였다. 까뮈가 내게 그냥 소설가가 아닌 것처럼, 티파사에게 로마의 유적지들은 그냥 ‘폐허’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극구 촬영을 막는 그들의 단호함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준 것은 항구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물을 손질하고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는 어부들, 해질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오가는 포구는 아름다웠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이나 해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장 그르니에가 <케르겔렌 군도>에서 써내려간 그 마음을, 나는 티파사에서 느꼈다. 좋아하는 글을 암송하듯,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저녁의 풍경이었다. 

각주)
3)쿠스쿠스Couscous 
돌돌 말린 밀로, 파스타 중에서 가장 작다. 중동과 인도 등지에서 흔히 사용하는 식재료인데, 알제리에서도 고기나 야채스튜 등에 곁들이거나 꿀을 바른 디저트 등 다양한 쿠스쿠스 요리를 만날 수 있다. 

4)모리타니 왕족의 묘 Mausolee Royal De Mauretanie 
기원전 1세기경 세워진 이 건축물은 사방으로 난 4개의 문과 십자가 장식 때문에 막연히 어느 기독교인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제리 누미디아 왕국의 주바 2세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 8세(우리가 아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딸)의 무덤으로 일컬어진다. 높이 50m의 원형 돌무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치고는 관리가 소홀한 느낌이다.





1, 3 스비바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에서 탈출시킨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축제로 오아시스 마을 쟈네트의 최대 축제다. 지금은 투아레그족의 용맹함을 과시하고 청춘남녀들에게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2, 4 천연염료로 물들인 푸른 망토와 두건은 ‘블루맨’이라고도 불리는 투와레그족의 상징이다



사막별 여행자, 투아레그족 

역시 알제리 여행의 정점은 ‘사막’이었다. 국토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하라 사막Sahara Desert에 대한 기대는 ‘거대한 미지’에 기울어진 열정이었다. ‘사하라’는 세계 최대의 사막이 아닌가. 사막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아틀라스Atlas5) 산맥을 건너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관문 도시인 티미문Timimoune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동쪽으로 700km를 날아간 최종목적지는 타만라세트Tamanrasset였다. 항공편 연착이 큰 이유였지만, 어쨌든 오랑 공항에서 타만라세트 인근 도시인 자네트Djanet의 호텔 테네르 보야지Tenere Voyages6)까지 걸린 시간은 꼬박 12시간이었다. 새벽 3시에 입실한 방은 2개의 침대와 에어컨, 작은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두 다리를 뻗고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사막에서는 그 어떤 귀빈이 와도 마찬가지라며 누군가 미안해했지만 전기가 있고 따뜻한 샤워가 있으니 충분한 호강이었다. 

알제리 여행이 무리하게 추진되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투아레그Tuareg족의 전통 축제인 ‘스비바Sbiba Festival’가 개최되는 시기에 자네트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100여 년 전부터 경사진 화강암 지형을 따라 아름다운 돌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자네트는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오아시스 마을이었다. 1만5,000명 주민의 대부분은 투아레그족으로 그들이 이슬람력으로 음력 1월1일부터 열흘 동안 똘똘 뭉쳐 가장 열광하는 축제가 바로 ‘스비바’였다. 축제의 유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가이드 무하메드는 기독교의 중요한 사건을 이렇게 이슬람교도들이 경축하고 있는데도, 곳곳에서 종교와 인종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 의한 납치와 테러가 알제리의 치안과 관광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깊이 사무친 말인 듯도 했다.  

축제는 흥겹다기보다는 진지했다. 여러 마을 중에서 대표로 선발된 2개의 마을(알미한느Almihane과 젤루와스Zaloazf)사람들은 하루 종일 타코바Takoba라는 긴 칼과 스카프를 흔들며 춤을 추거나 대형을 지어 회전을 했다. 힘을 과시하고 겨루는 행위였다. 귀족과 전사, 자유민과 노예라는 사회계층에 따라 복장이 다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뜨거운 사막에서 온몸을 가리는 푸른 망토와 두터운 터번이었다.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릴라’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염료로 물들인 푸른 옷은 귀족만 입을 수 있었던 투아레그족의 상징이다. 베르베르계의 백인족인 투아레그족은 혼혈이 많아지면서 차츰 검은 피부를 가지게 되었고, 푸른 옷감에 피부가 물들어 ‘블루맨’, ‘복면을 쓴 전사들’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해 읽었던 <사막별 여행자>7)란 책에서 소년 무사가 묘사한 대로 투아레그족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이 부족의 남자들은 키가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무엇보다 미소가 아름다웠다. 길이가 4m나 된다는 베일에 가려졌던 남성들의 얼굴이 살짝살짝 공개될 때마다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무사들을 응원하는 역할은 여인들의 몫인데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강력한 모계사회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통제가 적지 않다고 했다. 사실 이 축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젊은 남녀들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베일에 가려진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축제는 쓰러지는 사람이 발생하고, 여인들의 목이 쉬어 버린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더 많은 구경꾼이 몰린 쪽이 자연스럽게 승자가 됐다. 축제가 끝나자 긴장과 소란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사막의 고요만이 오후의 햇살처럼 가라앉았다. 낮 동안 보았던 그 모든 복면과 망토의 춤사위가 신기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위는 고요에 젖어들었다. 오늘밤 이 오아시스에서는 새로운 연인들이 탄생해 사랑의 샘물을 마실 것인가. 비밀을 간직해서 더 아름다운 사막의 평화였다.

사막에 쏟아지는 비, 바람, 별  

영상 44℃와 영하 3℃, 낮과 밤의 온도 차이는 컸다. 밤이 되자 사람들은 모닥불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마을에서 온 투와레그족 악단의 민요가 반주였다. 초저녁부터 숯불 위에서 통째로 돌아가던 양고기 바비큐 ‘메슈이’가 구워진 그 모양 그대로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각 부위를 손으로 뜯어 먹는 것이 이 독특한 양고기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했다. 특수 부위는 정중하게 사양했고, 내 구미에 맞는 것은 바싹하게 튀겨진 껍질 부분이었다. 소금양념으로만 구워낸 담백한 맛은 야채와 어우러져 별미였다. 늦게까지 이어진 사막의 파티는 별과 달의 조명으로 충분했다. 하늘에 뿌려진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수천, 수만개의 별등급을 지닌 호텔, 그것이 사막의 야영이었다. 간이침대 위에 펼쳐놓은 두꺼운 침낭으로 쏙 들어가자 추위도 견딜 만했다. 간만에 숙면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에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높은 장소를 찾아 모래 언덕을 향해 걸었다.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거리에 있는 사구들을 오르는 동안 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더 힘들었다. 그런 노고에 비하면 사막의 일출은 그리 드라마틱한 장관이 아니었다. 정작 아름다운 변신은 뒤통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해의 고도에 따라 사구와 괴석들의 빛깔이 달라지고 있었고, 그림자는 모래위에 강렬한 무늬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해가 뜨자 지난밤 추위가 무색하게 대지가 다시 가열됐다. 사막투어가 3월까지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지중해의 겨울과 상관없이 한낮의 사막은 혹독했다. 하지만 지프차로 모래 언덕을 달리는 사막 투어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그만큼 사막의 얼굴은 다양했다. 사하라는 화산지형Hoggar massif, 달 지형Tassili N’ajjer, 바위 언덕Regs, 돌투성이 언덕Hamada, 모래 언덕Ergs이 교차하는 풍경을 품고 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야자수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달을 연상시키는 지형을 보여주는 타실리나제르Tassili N’Ajjer국립공원 지역에는 BC 6,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를 포함해 1만5,000점의 벽화들이 흩어져 있다. 이런 사하라 미술8)은 기후변화와 생태계, 인류학 등 사하라의 모래 사이로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우리가 방문했던 이센딜렌Issendilen 지역은 사막 위의 기암괴석부터 물이 흐르는 계곡 지역까지, 사막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다양한 장관을 선사했다.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가 아예 정착해 버렸다는 외국인 부부가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는 집터도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는 우리와 함께 동행했던 투아레그족들을 통해 가까이서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하면 투아레그 사내들은 의례히 모닥불을 피우고 비스듬히 누워 차를 마시곤 했다. 의외의 사실은 그들이 즐겨 마시는 차가 중국산 녹차라는 사실이었지만 ‘데낄라’라는 이름의 빵 반죽을 모래에 묻고 그 위에 불씨를 올려서 모래 오븐을 작동시키는 생존의 기술만큼은 선조들의 ‘사막표’ 지혜가 분명했다. 

사막이라고 아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리는 강우량보다 증발량이 많으니 물이 땅에 머무르지 못할 뿐. 사하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샐러드용 야채를 경작하는 농장지대도 있었다. 지난해 11월에는 5년 만에 큰 비가 찾아와 3주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아직도 넓은 대지를 덮고 있었다. 이 자리를 수천년 동안 지켜 왔던 돌과 모래는 그 옅은 ‘푸름’을 보고 오래전 사하라에 물이 많았던 ‘녹색사하라’ 시기가 꽤 그리워졌을 것이다. 지금 사하라의 대지 위에 고정되어 버린 고기압층이 이동하게 되면 언젠가 이 땅에도 강이 흐르고 녹음이 무성하던 녹색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될 만큼 지구의 기후는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가 변하고 이 땅에 꽃이 피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저마다 둥글고 검은 그림자테를 껴안고 있는 사구가 점점 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래바다 위를 유영하는 섬들. 그 위에 모래알갱이처럼 작은 사람들이 신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사막만큼 신의 존재가 분명한 곳이 있을까. 신들이 사는 알제리의 마지막 여정이 모래바람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각주)
5)아틀라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신으로 천공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틀라스가 괴물 고르곤의 머리를 보고 놀라서 돌로 변한 것이 아틀라스산맥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대서양Atlantic Ocean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틀라스산맥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에 걸쳐 있는 길이 2,000km의 산맥으로 최고봉은 투브칼산(4,167m)이며 지중해변의 농경지로 이어지는 북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6)테네르 보야지Tenere Voyages 
자네트 시내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는 사막 호텔로 심플한 시설이지만 사막의 한적함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이틀 정도의 짧은 투어도 있지만 길게는 15일의 사막투어 프로그램도 제공하는데, 호텔 숙박과 식사는 물론 사막 야영과 투어, 가이드 비용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숙박비는 4~8만원 사이, 투어비는 일정에 따라 다르지만 30만원 선이다. 문의 029-470049 www.tenero-voyages.com

7)<사막별 여행자> 
난생 처음 접한 책, <어린 왕자>를 읽고 그 저자를 만나고 싶다는 꿈을 키운 투아레그 부족의 소년 무사 앗사리드가 훗날 프랑스로 이주하여 쓴 에세이집. 유목민의 눈으로 바라본 문명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도시인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2007년 <사막별 여행자>(문학의숲)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사막별 여행자, 투아레그족 

역시 알제리 여행의 정점은 ‘사막’이었다. 국토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하라 사막Sahara Desert에 대한 기대는 ‘거대한 미지’에 기울어진 열정이었다. ‘사하라’는 세계 최대의 사막이 아닌가. 사막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아틀라스Atlas5) 산맥을 건너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관문 도시인 티미문Timimoune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동쪽으로 700km를 날아간 최종목적지는 타만라세트Tamanrasset였다. 항공편 연착이 큰 이유였지만, 어쨌든 오랑 공항에서 타만라세트 인근 도시인 자네트Djanet의 호텔 테네르 보야지Tenere Voyages6)까지 걸린 시간은 꼬박 12시간이었다. 새벽 3시에 입실한 방은 2개의 침대와 에어컨, 작은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두 다리를 뻗고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사막에서는 그 어떤 귀빈이 와도 마찬가지라며 누군가 미안해했지만 전기가 있고 따뜻한 샤워가 있으니 충분한 호강이었다. 

알제리 여행이 무리하게 추진되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투아레그Tuareg족의 전통 축제인 ‘스비바Sbiba Festival’가 개최되는 시기에 자네트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100여 년 전부터 경사진 화강암 지형을 따라 아름다운 돌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자네트는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오아시스 마을이었다. 1만5,000명 주민의 대부분은 투아레그족으로 그들이 이슬람력으로 음력 1월1일부터 열흘 동안 똘똘 뭉쳐 가장 열광하는 축제가 바로 ‘스비바’였다. 축제의 유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가이드 무하메드는 기독교의 중요한 사건을 이렇게 이슬람교도들이 경축하고 있는데도, 곳곳에서 종교와 인종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 의한 납치와 테러가 알제리의 치안과 관광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깊이 사무친 말인 듯도 했다.  

축제는 흥겹다기보다는 진지했다. 여러 마을 중에서 대표로 선발된 2개의 마을(알미한느Almihane과 젤루와스Zaloazf)사람들은 하루 종일 타코바Takoba라는 긴 칼과 스카프를 흔들며 춤을 추거나 대형을 지어 회전을 했다. 힘을 과시하고 겨루는 행위였다. 귀족과 전사, 자유민과 노예라는 사회계층에 따라 복장이 다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뜨거운 사막에서 온몸을 가리는 푸른 망토와 두터운 터번이었다.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릴라’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염료로 물들인 푸른 옷은 귀족만 입을 수 있었던 투아레그족의 상징이다. 베르베르계의 백인족인 투아레그족은 혼혈이 많아지면서 차츰 검은 피부를 가지게 되었고, 푸른 옷감에 피부가 물들어 ‘블루맨’, ‘복면을 쓴 전사들’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해 읽었던 <사막별 여행자>7)란 책에서 소년 무사가 묘사한 대로 투아레그족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이 부족의 남자들은 키가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무엇보다 미소가 아름다웠다. 길이가 4m나 된다는 베일에 가려졌던 남성들의 얼굴이 살짝살짝 공개될 때마다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무사들을 응원하는 역할은 여인들의 몫인데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강력한 모계사회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통제가 적지 않다고 했다. 사실 이 축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젊은 남녀들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베일에 가려진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축제는 쓰러지는 사람이 발생하고, 여인들의 목이 쉬어 버린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더 많은 구경꾼이 몰린 쪽이 자연스럽게 승자가 됐다. 축제가 끝나자 긴장과 소란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사막의 고요만이 오후의 햇살처럼 가라앉았다. 낮 동안 보았던 그 모든 복면과 망토의 춤사위가 신기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위는 고요에 젖어들었다. 오늘밤 이 오아시스에서는 새로운 연인들이 탄생해 사랑의 샘물을 마실 것인가. 비밀을 간직해서 더 아름다운 사막의 평화였다.

사막에 쏟아지는 비, 바람, 별  

영상 44℃와 영하 3℃, 낮과 밤의 온도 차이는 컸다. 밤이 되자 사람들은 모닥불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마을에서 온 투와레그족 악단의 민요가 반주였다. 초저녁부터 숯불 위에서 통째로 돌아가던 양고기 바비큐 ‘메슈이’가 구워진 그 모양 그대로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각 부위를 손으로 뜯어 먹는 것이 이 독특한 양고기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했다. 특수 부위는 정중하게 사양했고, 내 구미에 맞는 것은 바싹하게 튀겨진 껍질 부분이었다. 소금양념으로만 구워낸 담백한 맛은 야채와 어우러져 별미였다. 늦게까지 이어진 사막의 파티는 별과 달의 조명으로 충분했다. 하늘에 뿌려진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수천, 수만개의 별등급을 지닌 호텔, 그것이 사막의 야영이었다. 간이침대 위에 펼쳐놓은 두꺼운 침낭으로 쏙 들어가자 추위도 견딜 만했다. 간만에 숙면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에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높은 장소를 찾아 모래 언덕을 향해 걸었다.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거리에 있는 사구들을 오르는 동안 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더 힘들었다. 그런 노고에 비하면 사막의 일출은 그리 드라마틱한 장관이 아니었다. 정작 아름다운 변신은 뒤통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해의 고도에 따라 사구와 괴석들의 빛깔이 달라지고 있었고, 그림자는 모래위에 강렬한 무늬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해가 뜨자 지난밤 추위가 무색하게 대지가 다시 가열됐다. 사막투어가 3월까지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지중해의 겨울과 상관없이 한낮의 사막은 혹독했다. 하지만 지프차로 모래 언덕을 달리는 사막 투어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그만큼 사막의 얼굴은 다양했다. 사하라는 화산지형Hoggar massif, 달 지형Tassili N’ajjer, 바위 언덕Regs, 돌투성이 언덕Hamada, 모래 언덕Ergs이 교차하는 풍경을 품고 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야자수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달을 연상시키는 지형을 보여주는 타실리나제르Tassili N’Ajjer국립공원 지역에는 BC 6,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를 포함해 1만5,000점의 벽화들이 흩어져 있다. 이런 사하라 미술8)은 기후변화와 생태계, 인류학 등 사하라의 모래 사이로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우리가 방문했던 이센딜렌Issendilen 지역은 사막 위의 기암괴석부터 물이 흐르는 계곡 지역까지, 사막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다양한 장관을 선사했다.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가 아예 정착해 버렸다는 외국인 부부가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는 집터도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는 우리와 함께 동행했던 투아레그족들을 통해 가까이서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하면 투아레그 사내들은 의례히 모닥불을 피우고 비스듬히 누워 차를 마시곤 했다. 의외의 사실은 그들이 즐겨 마시는 차가 중국산 녹차라는 사실이었지만 ‘데낄라’라는 이름의 빵 반죽을 모래에 묻고 그 위에 불씨를 올려서 모래 오븐을 작동시키는 생존의 기술만큼은 선조들의 ‘사막표’ 지혜가 분명했다. 

사막이라고 아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리는 강우량보다 증발량이 많으니 물이 땅에 머무르지 못할 뿐. 사하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샐러드용 야채를 경작하는 농장지대도 있었다. 지난해 11월에는 5년 만에 큰 비가 찾아와 3주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아직도 넓은 대지를 덮고 있었다. 이 자리를 수천년 동안 지켜 왔던 돌과 모래는 그 옅은 ‘푸름’을 보고 오래전 사하라에 물이 많았던 ‘녹색사하라’ 시기가 꽤 그리워졌을 것이다. 지금 사하라의 대지 위에 고정되어 버린 고기압층이 이동하게 되면 언젠가 이 땅에도 강이 흐르고 녹음이 무성하던 녹색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될 만큼 지구의 기후는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가 변하고 이 땅에 꽃이 피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저마다 둥글고 검은 그림자테를 껴안고 있는 사구가 점점 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래바다 위를 유영하는 섬들. 그 위에 모래알갱이처럼 작은 사람들이 신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사막만큼 신의 존재가 분명한 곳이 있을까. 신들이 사는 알제리의 마지막 여정이 모래바람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각주)
8)사하라 미술 
사하라 사막 지대에는 암면채화, 각화 등이 널리 분포한다. 중석기 시대부터 아랍인이 사하라에 유입된 이후까지 수천년간 제작된 것으로 시대별로 야생동물, 수렵민, 소, 말, 낙타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선사시대의 역사를 짐작하는 사료가 되고 있다. 


1 모닥불과 사막의 모래를 오븐삼아 빵을 구워내는 유목민의 지혜 2 사막에서도 여성들은 다양한 옷감과 디자인으로 멋을 낸다 3 사하라 사막에는 의외로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중에는 독성을 지닌 식물도 있다 4, 5 최대 크기의 사막 사하라에는 다양한 풍경이 존재한다. 괴석들이 즐비한 화산지형 중에는 달의 풍경과 비슷한 것도 있다 6 아프리카 최대국인 알제리는 국토의 80%가 사막이다. 사막 한가운데 포장도로를 내고 그 길을 낙타와 공유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중구 무교로 16, 5층 (주)여행신문
  • 대표전화 : 02-757-8980
  • 팩스 : 02-757-898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홍렬
  • 법인명 : (주)여행신문
  • 제호 : 트래비 매거진
  • 등록번호 : 서울 라 00311(2009-10-13)
  • 발행일 : 2005-05-30
  • 발행인 : 한정훈
  • 편집인 : 김기남
  • 트래비 매거진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트래비 매거진.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ktt@traveltime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