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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hommage-무진, 남겨진 이야기 "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3.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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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소현 기자

서너 해 전에 김승옥 선생이 동행하는 순천 여행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를 만난 일은 (앞으로 밝힐) 여러 이유로 내 인생의 특별한 사건이었다. 우선, 그가 어떤 작가인가. 1964년 이래 한국 현대문학 사상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로 꼽히는 <무진기행>의 작가. 그의 소설을 통째로 필사하는 일은 소설가 지망생들의 흔한 공부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진’이라는 지명은 (작가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관이 건립된) 순천시내의 여러 간판에서 발견된다.
2009년 발표된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도가니>에서 그 암울한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의 이름이 무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김승옥 선생에게 바치는 공지영 작가의 오마주였다. 나는 내 방식의 오마주를 바쳤다.

그의 소설처럼 ‘무진 10km’라는 (존재하지 않는) 이정표로 시작해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던 원고는
어느 대기업의 사보에 게재됐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때 나는 마음을 다했었다.

그러나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순천 여행의 일행은 김승옥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온라인 카페의 회원들이었다. 존경하는 작가의 친필 사인을 담아 갈 <무진기행>을 한두 권씩 가지고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민 것은 빛바랜 노트였다. 색색의 형광펜이 칠해져 있고 연필로 빼곡하게 뭔가가 쓰여 있는 대본 노트였다. 제목도 <무진기행>이 아니라 <1964년 겨울>이었다. 

1995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학 2학년이 되던 그 겨울에 나는 선배 Y의 밥 한 끼에 넘어가 학과 연극패의 창단멤버가 됐다. 그가 내민 첫 대본이 <1964년 겨울>이었다. 교과서 밖에서 김승옥 선생의 작품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매일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었고, 복식호흡과 발성연습만으로도 탈진이 되곤 했다. 한 장 한 장 노트에 나눠 붙인 대본은 수백 번을 읽고 또 읽다가 달달 외울 지경이 되었었다. “파리를 사랑하십니까?”로 시작되는 연극의 첫 대사는 아직도 생생하다(프랑스 파리가 아닌 날아다니는 파리에 대한 질문이다). 

그 뒤 두어 편의 연극을 무대에 더 올렸지만 연극패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쓰고 있던 희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Y는 호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야 이 미친년아, 뭐 하냐. 보고 싶다. 한국에 가면 소주나 한잔 하자”는 Y의 전화도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연극 같았던 동아리도 멈추어 버렸다. 

나는 아직도 대본 노트를 간직하고 있다. 김승옥 선생의 서명이 더해진 것만 빼면 20년 전 그대로다. Y의 유골이 양수리에 뿌려지지 않았다면 그의 무덤에 찾아가 노트를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소주 한잔 부으며 내가 만난 김승옥 선생 이야기를 조근조근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P선배 이야기를 해야겠다. 친구 Y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P 역시 연극패의 창단멤버였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무대에 서 보지 못했다. 창단 직후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다시 복학했을 때에는 후배들 뒤치다꺼리가 그의 몫이었다. 특별히 연극에 대한 재능이나 애정이 있다기보다는 친구와 후배들에 대한 애정 어린 도움이었다. 그러나 Y의 죽음 후 들은 P선배의 졸업소식은 그가 극단에 입단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택이었다. 5~6년이 지난 후 P선배를 만났을 때 나는 Y 때문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던 마음을 꼭 눌렀다. 어떻게 시작했든, 그 세월이면 연극은 P의 인생이 된 것이므로.
남은 인생이야 모르는 일이지만 P선배도 나도 후대의 누군가로부터 오마주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누구보다 뜨거웠던 Y의 열정을
기억하며 그가 살고 싶었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어느 무명의,
예비 연극인에 대해 P와 내가 일생을 통해
바치고 싶은 오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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