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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와 바다거북의 땅 야쿠시마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3.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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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屋久島’를 아는 한국인은 소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원령공주>의 배경지라고 하면 혹시 ‘아, 거기’라고 할 사람들이 일부 있을 테고, 당연히 가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본을 잘 아는 이들은 그곳을 일본 여행의 종결지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 궁금했다. 그곳에 있다는 7,200살 최고령의 삼나무 ‘조몬스기繩文杉ㆍ신석기시대부터 생존한 나무란 의미’ 때문인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일본 최남단 남규슈 가고시마에서 60km 떨어진 그 섬을 향해 떠났다.



높이 20m의 윌슨 그루터기를 볼 수 없는 건 슬픈 일이지만 덕분에 주변 삼나무들은 햇볕을 넉넉히 받아 쑥쑥 자라고 있다




야쿠시마엔 사슴 2만 마리, 원숭이 2만 마리, 사람 2만 명이란 말이 정도로 야생사슴이 많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300년 전 벌채된 윌슨 그루터기는 수령이 3,000년으로 추정되며 둘레가 13m에 달하고 안에서 보면 사랑의 ‘하트’가 숨겨져 있다


#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가고시마항에서 야쿠시마까지는 괘속선으로 1시간 45분이면 닿는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계산하면 불과 3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에 비해 심리적 거리는 상당히 멀다. 일본 본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토피라고 부르는 여객선은 연평도나 백령도를 갈 때 타는 고속선과 거의 같은 구조와 속도를 가졌다. 파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배의 흔들림도 편차를 보일 때 문득 창밖으로 유영하는 작은 돌고래 수마리 무리와 눈이 마주쳤지만 카메라를 꺼낼 사이도 없이 이내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환영인사였는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토피가 멈춰 선 미야노우라항의 하늘은 잔뜩 안개를 드리웠고 빗줄기도 흩뿌렸다. 야쿠시마에는 ‘일주일에 8번, 한 달에 35번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며칠간 온몸으로 그 말을 체험했다.
야쿠시마는 제주도의 5분의 1 크기로 산림이 90%고 해안선을 따라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됐다. 둘레 130km에 직경이 30km에 불과한 이 섬의 중앙부에 규슈에서 가장 높은 미야노우라다케(1,936m)가 버티고 서 있고 그 주변으로 1,000m가 넘는 고봉 30여 개가 포진해 있다. 그 덕에 산 정상 부근은 연 평균기온이 8도 정도고 해안 부근은 20도 정도를 유지한다. 이것은 산 중심은 일본 최북단 북해도와 유사하고 해안마을은 오키나와와 유사한 식생분포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 중 하나는 연강수량이다. 해안부는 연강수량이 3,000mm고 섬 중심 고지대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하는데 산악부는 8,000∼1만mm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가고시마시의 연강수량이 약 2,000mm, 서울이 1,300mm라는 걸 감안하면 대충 감이 온다. 그러니 366일 비가 내린다고 해도 헛소리는 아니다.

# 야쿠 삼나무 이야기

야쿠시마는 섬 전체가 커다란 화강암이다. 그 위에 모래와 이끼가 생기면서 토양이 되었는데 섬의 평균 토양은 두께가 겨우 30cm 정도라고 한다. 그 척박함이 ‘야쿠스기屋久杉’라고 하는 야쿠 삼나무의 생존 비밀이다. 삼나무는 일본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수목이다. 2차 대전 직후 민둥산이 된 일본의 산야를 메운 것이 삼나무와 노송이었고 현재 일본의 산림을 울창하게 하는 인공림의 일등공신이자 건축자재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야쿠시마에서 삼나무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그 몸집을 마음대로 키울 수가 없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숙명은 적은 양의 영양분으로 스스로 왜소화의 길을 걷는 것뿐이었으리라. 그래서 다른 곳의 500년 된 삼나무보다 2,000년 된 야쿠스기가 더 작고 볼품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1년에 겨우 0.1mm만 나이테를 키우며 생존을 유지해 온 이 삼나무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자아낸다. 야쿠스기라는 말은 1,000년 이상 된 삼나무에만 해당된다. 그 이하는 작은 삼나무라는 뜻의 ‘고스기小杉’라고 부른다. 가고시마 에비노고원에서는 500년 된 삼나무가 보호수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흔한 삼나무에 불과하다. 시간 개념이 다른 것이다. 자유로운 성장을 포기해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렇게 오늘까지, 또 앞으로도 살아내야 한다.

야쿠시마의 삼나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 사찰을 신축하면서 벌목이 시작됐다. 1970년대까지 80%의 산림이 파괴되었다. 수령 3,000년 된 윌슨그루터기로 명명된 거목이 잘려나간 것도 300년 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건축자재용으로 조달됐기에 쭉쭉 곧게 뻗은 미인삼나무가 주로 채벌되어 못생긴 나무들만 현재까지도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4 조몬스기를 만나러 가는 우중산책의 진수는 홀로 숲의 소리를 벗 삼아 고요함을 유지한 채 걸을 때 펼쳐진다 5 일부 산림철도 다리엔 난간이 없어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들의 산행을 힘들게 한다

# 7,200살의 ‘조몬스기’를 만나다

초대형 극장판 스크린을 통해 항공촬영된 야쿠시마 자연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고 섬의 역사와 식생, 동식물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환경문화촌’과 야쿠스기의 모든 것을 체득할 수 있는 ‘야쿠스키 자연관’을 둘러 사전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산행을 위해 눈을 뜬 새벽 4시, 창문을 열자 전날 예고된 것보다 더 거세게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해발 600m의 아라가와 등산구 입구 간이휴게소에서 선 채로 호텔에서 싸준 두 개의 도시락 중 하나를 입 속에 구겨 넣으면서 계속 하늘을 바라봤다. 조몬스기는 11km 떨어진 해발 1,300m의 산 속에 있다. 부지런히 걸어도 왕복 9시간은 족히 걸린다. 멈출 줄 모르던 비는 조몬스기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여전했다. 처음 8.5km는 벌채를 위한 산림철도길로 그나마 평탄했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인 산행은 굴곡과 가파름, 미끄러움이 교차하며 한 걸음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일행 중 일부 여성들은 힘겨운 사투를 벌였고 그에 보조를 맞추느라 발걸음은 느려졌다. 

조몬스기를 앞두고 빗 속에서 다시 점심을 꺼낸다. 군대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중오찬은 당시엔 낭만적이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모으며 최종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그래서 마침내 도착했어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더 가야 할 것 같은, 끝이 아닌 풍경이었다.

조몬스기는 상당히 가파른 산비탈에 자생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서 나무 주위 흙이 유실되고, 고사 우려가 커지자 산비탈에 나무 계단을 만들고 스테이지를 만들어 관람하게 했다. 확실하게 보기 힘드니 감동도 덜하다. 솔직히 보존을 위해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부러질 위험이 있는 가지 탓에 정면의 공간을 폐쇄하고 비스듬이 바라보는 조몬스기와의 첫 대면. 글쎄 이건 뭘까. 

농부이자, 시인, 철학자인 ‘야마오 산세이’ 식으로 말하면 산 속에는 성스러운 노인이 서 있었다. 거칠거칠한 그 피부에서 멀고 깊은 신성한 느낌이 스며나온다. 성스러운 노인은 이 지상에서 삶을 부여받은 이후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서 계셨다. 조몬스기에게 나는 한갖 스쳐가는 바람 같은 존재이리라.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과 동물, 비바람과 눈보라가 그 앞에 같이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으리라 생각하니 불현듯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비대한 욕망과 가녀린 현실이 부질없는 한바탕 꿈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은 조몬스기를 벗어나 더 거세진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내맡겨 버린 하산길에서 스쳤다. 하산길, 카메라를 가방 깊숙이 집어놓고 오로지 그 공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와는 이미 한몸이었다.


1 조몬스기의 옆모습은 분명히 인생사에 달관한 현명한 할아버지를 닮았다 2 높이 25m, 둘레 16m의 조몬스기의 수령이 진짜 7,200년인지는 모른다. 2,500~4,100살까지 다양한 과학적 추정이 있지만 섬사람들은 그냥 7,200살이라고 믿는다

# 바다거북과의 조우

야쿠시마의 나가타이나카 해변은 현재 일본에서 유일한 바다거북의 산란지다. 지구에 존재하는 8종류의 바다거북 중 붉은바다거북과 푸른바다거북이 이곳까지 올라와 알을 낳는다. 보통 5월부터 7월 중순까지 수많은 암컷거북들이 3차례 정도 해안 모래사장에 올라와 한번에 100여 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부화하기까지 60여 일이 걸리기 때문에 8월까지 이 해변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된다. 산란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현지 보호단체인 우미가메관찰회에 사전예약 후 오후 8시30분부터 밤 11시까지 1일 60명에 한해 전문요원의 안내에 따라 참관할 수 있다.

하루종일 엄청난 비가 내렸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늘에 별이 가득 지상으로 내려앉은 밤, 해안에 도착했다. 사방에 불빛이라곤 전혀 없이 별들에게 의지한 그 풍경이 또 다른 황홀경이었다. 드디어 붉은바다거북 한 마리가 서서히 올라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탁구공만한 크기의 알을 1시간에 걸쳐 낳는 현장을 라이브로 본다는 것은 처음엔 심란한 기분이었다. 산고를 겪는 동안 거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친 거북이 흘리는 눈물은 사실 눈물이 아니고 몸속의 소금기를 조절하기 위해 내보내는 소금물이라고 한다. 

주변 인간들의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한 시간여 모성을 발산하는 사투를 벌인 암컷은 앞발과 뒷발을 이용해 알을 덮고 주변과 높이를 맞춰 적들의 침탈에 대비하는 영민한 마무리 후 바다로 되돌아갔다. 내가 그날 만난 거북은 몸 길이 85cm로 인식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야쿠시마 해안에 처음 올라온 초산이었다. 그놈은 ‘99787’이라는 인식표를 선물로 받았다. 알들은 암수가 정해지지 않은 채 산란터인 모래의 온도가 29도 이하면 수컷, 그 이상이면 암놈이 된다고 한다. 부화된 새끼거북은 같은 부화터의 다른 거북들이 부화하길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힘을 합쳐 모래를 빠져나와 바다로 향하는 장관을 선보인다고 한다.



3 붉은바다거북 암컷이 산고 속에 딱 탁구공만한 알을 낳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의 작은 랜턴 빛을 통해 이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4 임무를 완수한 거북이 바다를 향해 되돌아가고 있다. 특별히 허락된 경우가 아니면 실제로는 스마트폰 등 모든 촬영은 금지다 5 안보강을 따라 움직이는 소형 유람선 안에서 먹는 아침은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특별한 체험이다 6 해질녘, 해안과 연결된 안보강 주변을 이루는 마을과 산 그리고 저 멀리 수평선을 머금은 하늘까지 그대로 그림엽서가 된다

# 안보강 뱃놀이

산, 마을, 해안이 함께 어우러진 안보강. 강이 바라다보이는 절경에 위치한 야쿠시마 산장이 두 번째 숙소였다. 이름처럼 진짜 산장은 아니고 작은 호텔이다. 세월의 풍파로 낡았지만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가 몇달간 머물며 베스트셀러가 된 <우키쿠모浮雲>를 집필한 곳으로 일본인들에게 각광받는 명소다. 특이한 것은 등산화 건조실이 있다는 점이다. 워낙 많은 투숙객들이 조몬스기를 보러 오가며 빗속에서 신발이 젖다 보니 생겨난 편의시설이라고. 이 호텔의 또 다른 장점은 아침식사를 안보강 위를 서서히 흘러가는 배 안에서 할 수 있다는 것. 마침 배의 안주인은 부산에서 시집온 김씨 아줌마였다. 소박하지만 솜씨 좋은 가정식이 그녀의 푸근한 미소와 함께 준비돼 있었고 운치 넘치는 풍경을 담아 만끽할 수 있었다.

# 미야노우라항을 떠나며

떠나야 할 시간. 잘린 나무 위에서 새 나무가, 쓰러진 나무 위에서 이끼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야쿠섬. 나무가 좋은 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거다. 생명이 다해도 흔적이라도 바로 그곳에 그대로 있다는 것, 이별이 두렵지 않은 이유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임정현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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