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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사-이사의 맛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3.10.01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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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이삿날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짜장면 맛이 입가에 피어오른다. 짜장면은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으로 발음해 줘야 제맛이 나고, 특히 나는 이삿날에 고된 땀을 흘린 뒤 둘러앉아 먹는 짜장면을 좋아했다. 사주에 단단히 이삿수가 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닌 초등학교만도 총 여섯 군데. 서울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대전으로, 마치 트로트 가수가 이리저리 스텝을 밟듯이 우리 가족은 종횡무진, 전국을 누비며 살았다.
 
기억상으로 최초의 짜장면 값은 2,000원 남짓. 사실 굳은 마음을 먹지 않아도 아빠는 쉽게 짜장면을 사 주실 수도 있었겠지만 짜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니 졸업식과 이삿날밖에 먹을 수 없다는 그의 지조에 딴지를 걸고 싶지 않았다.
 
이삿날,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행여나 마음을 품었던 남학생과 떨어져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꽤나 쏟았던 눈물방울은 아빠의 옷소매로 훔쳐졌다.
맛있는 거 먹고 나면 잊혀진단다. 자, 이제 그만 가자. 결국 이삿짐 트럭에 올라타선 냉장고든 장롱이든 책상이든 번쩍번쩍 옮겨 나르던 아빠의 늠름한 팔에 기대 이번엔 어디로 가나, 탕수육은 시켜 주실까 따위의 생각을 했던 듯하다. 신기하게도 슬픔보다 허기가 앞섰다. 조금씩 커지는 꼬르륵 소리는 이삿짐 트럭의 덜컹거리는 리듬과 묘하게 합이 맞았다. 아빠 말처럼 맛있는 걸 먹으면 슬픔인지 배고픔인지 모를 게 채워질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동네,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지만 새집은 언제나 신이 났다.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텅 비었던 공간이 엄마 아빠의 야무진 손놀림으로 퉁탁퉁탁 착착 모양새를 갖춰 갔다. 소파며 식탁이며 큰 짐들이 먼저 중심을 잡고 한 쪽 벽면에 자리를 잡은 수납장 속으로 세간들이 빠르게 포개진다. 나는 조물조물 엄마가 빨아 준 걸레로 가구와 바닥에 뭍은 먼지를 지운다. 뽀득뽀득 창문을 닦다가 틈새로 동네의 부감을 살핀다. 겹겹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 빽빽하게 주차해 둔 차들 위로 오후 4시의 따뜻한 볕이 내린다. 내가 살게 될 동네. 우리 가족과 함께 이사 온 이곳.

뽁뽁이 포장지와 신문지로 곱게 쌌던 가족사진을 벽에 걸면 가족 모두가 박수를 치는 세리모니를 끝으로 우리들의 노동은 일단락됐다. 그리고 새집에서 처음 주문하는 짜장면. 중국집 배달 아저씨가 처음으로 갖다 주는 ‘50번 주문시 탕수육 한 개 스티커’를 부엌 싱크대 문 안 쪽에 붙이면서 그 공간에서의 일상과 추억은 공식적으로 개시된다.

물론 우리 가족은 빈 구멍이 뻥뻥 뚫린 중국집 스티커를 모두 채우지 못했다. 공짜 탕수육을 받을 만큼 진득하게 머무를 새 없이 바지런히 또 다른 이사를 준비해야 했으므로.
근데 이사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던 건 왜일까.
 
비록 익숙한 공간이 단절되고,
매번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했지만 이사는
우리의 작은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도전을 마주할 때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
함께라면 어떤 상황도 대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통과의례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사는 짜장면 맛이 나고 짜장면은 가족냄새가 나나 보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한데 모인 날 아무리 비싼 음식점에 가도 먼지 날리는 새집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먹었던 짜장면 생각에 아직도 나는 한가득, 침이 고인다.
 
글  양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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