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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책-도색서적의 도道

  • Editor. 김명상
  • 입력 2013.11.05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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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했던 취미는 ‘책 읽기’였다. 아마 다른 할 일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읽을 것이 없어서 나중에는 교실 뒤 반공서적도 외우다시피 했다. 북한주민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압록강을 건넜다는 둥의 ‘개뻥’을 믿고 있다는 내용이 아직 기억난다.

중학교 진학 후에도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나의 모든 성적 판타지를 완성시켜 준 문제의 책을 발견했다. 늘 다니던 서점에서 ‘19세 미만 구매 불가’라고 쓰여 있던 책을 본 것이다. 지금은 이런 종류의 책에 비닐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없었다.
 
주인 눈치를 보다 슬며시 책장을 넘겼을 때
등장하는 용어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책임을 알아차렸다.
무려 다섯 권짜리. 한 남자의
여성편력 일대기를 다룬 일본 소설이었다.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일단 서점을 나섰다.
 
목표가 생겼다. 지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야동들이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텍스트에 의존해 상상력 날개를 펼치던 시기였다. 고난 끝에 돈을 마련해 책을 구입했다. 중학생에게 19금 책을 팔던 서점주인 아저씨는 ‘안 되는데…’라는 말을 뇌까렸으나 돈의 유혹은 떨치지 못했다. 고마운 양반 같으니라고.

집에 돌아와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고 읽어 내려간 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수위가 높아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으나 주인공이 만나는 여성의 면면만 해도 여대생, 옆집 새댁, 기차에서 우연히 동석한 여자, 여관집 주인, 미망인, 지인의 딸 등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다. 실제 존재한다면 전 인류의 조상이 한 명으로 수렴되지 않았을까 싶은 주인공의 왕성한 활동력 덕분에 책 어느 곳을 펴도 정사가 벌어졌고, 줄듯 말듯 애간장을 끓게 하는 상대 여인들의 교태는 또 다른 묘미였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나 필치筆致는 다른 야설과는 격이 달랐고, 수많은 팬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친구가 빌려간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친구A가 B에게, B가 C에게, C는 또 D에게…. 뭐 그렇고 그런 경로로 분실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은 영상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곧 잊혀져 버렸다.

그 책을 다시 발견한 것은 몇년 전이었다.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권당 2,000원이라는 헐값에 판매되는 것을 보고 일말의 주저 없이 구매했다. 대체 얼마 만이냐. 나를 잠 못 들게 하던 수많은 누나들의 나신이 한꺼번에 책 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됐지만, 책을 접하고 나니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책을 방구석에 숨겨두고 주말까지 기다렸다. 여유롭게 추억을 음미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다시 책을 폈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누렇게 변질된 종이만큼이나 내용은 고루했다.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말라는 명언이 괜히 있지 않았다.

어떠한 격차가 클수록 깨달음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 같다. 1권도 채 읽지 못하고 책을 덮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내 뇌리에 박혀 있던 붉은 꽃은 이미 시들어 버렸다.
 
영원한 것은 없구나.
진정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몰래 도색서적을 읽던 쾌감,
박제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을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법.
아아, 찾아 헤매던 도道는
스무 해도 훨씬 전에 읽은
도색서적 안에 있었다.
 
글  김명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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