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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기자] 와인과 육필시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3.11.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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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한 허리를 뚝 잘라내어 감행한 휴가의 어느 날.
서점을 배회하다가 ‘육필시집’ 앞에 멈춰 섰다.
어허, ‘시인들이 손글씨로 직접 쓴 시!’라니!


눈은 활자를 소비한다


마흔 권이 넘는 육필시집 앞에서 나는 마치 코란을 마주한 무슬림처럼 마음이 경건해져서 넙죽 절을 할 뻔했다. 한 권 한 권 꺼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은 조심스러웠고 육필을 접할 때의 감정은 마치 시인들의 생얼을 훔쳐보는 듯 짜릿했다. 실컷 훔쳐보기만 하고 그냥 돌아갈 수 없었기에 한 권을 집으로 모셔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아는 시인은 안다는 이유로, 모르는 시인은 모른다는 이유로,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천양희 시인의 <벌새가 사는 법>을 고른 이유는 그저 선생의 손글씨가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붓펜으로 다져 쓴 묵직함이 좋았고 줄을 바꿀 때마다 첫 글자가 오른쪽으로 조금씩 밀리면서 사선으로 전개되는 모양도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날 내가 소비한 것은 결국 ‘시’가 아니라 ‘활자’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글자가 내용(말 그대로 내용물, 혹은 콘텐츠)의 질을 증명하다고 믿어 버리는 것. 이것이 일종의 직업병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활자주의’는 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와인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집 근처 마트에 들러 와인을 고를 때 나는 선호하는 와인을 제쳐두고 미각이 아닌 전혀 다른 감각에 의존한다. 일단은 세일품목이어야 한다는 ‘현실감’이 먼저고, 그 다음은 ‘시각’이다. 그저 가장 마음에 드는 라벨로 손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컬러풀하고 세련된 와인 라벨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와인이라면 한 100년쯤 묵은 고서의 표지처럼 누런 바탕 종이에 금색 활자, 위아래로도 금띠 정도는 둘러줘야 마땅하다는 것이 와인 라벨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다. 그래서인지 손에 쥐게 되는 와인들은 칠레나 미국의 섹시한 활자들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샤토’ 출신들이 많다.


와인과 시집을 고르는 기준이 같아져 버린 것은 얄궂은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직업병인 것을. 나의 감각 중에서 시각은, 특히 활자에 대한 반응은 이 순간에도 ‘턱없이 민감해기’를 요구당하고 있다. 이제는 비례가 맞지 않는 활자들을 보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참신한 활자를 만나면 심신에 안정이 찾아온다. 인사동 쌈지길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안구정화를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그곳에 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순전히 당시 아트디렉터 이진경씨의 손글씨 간판 때문이었다. 페인트를 몇 번이나 덧바른 그녀의 촌스러운 듯 개성적인 활자는 내 눈의 비타민이었다.

 

육필의 거세를 거부한다


이쯤에서 활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육필은 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수십억 유일무이한 필체들의 창안자들은 이제 컴퓨터와 모바일의 전지전능함에 밀려 ‘육필’을 거세당하고 말았다는 생각. 자신만의 필체로 또박또박 글을 쓰던 그 시대는 우리 각자의 개성 또한 더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특정 타이포로 각인된 ‘브랜드’와 유행을 빌려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 나에게만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스스로 창안해 낼 수 있었던 그런 시대 말이다. 인터넷 세상의 언어가 날로 흉악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도 거세당한 자들의 분풀이일지 모르겠다. 고작 ‘이것은 궁서체임(인터넷 상에서 진지함을 강조하고 싶을 때 붙이는 부가설명)’ 정도의 활자 유희에 감정을 담는 세상이 됐다. 손가락 끝으로 자판기를 툭툭 두드려 만들어내는 전자적 활자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손으로 꾹꾹 눌려 쓴 활자와는 의미도, 책임의 무게도 다르다. 자신의 대표시 50편을 직접 골라 육필로 써 본 시인들의 증언이 줄줄 이어진다.


이하석 시인은 ‘육필이란 몸과 이어진, 또 다른 제 힘의 한 모습이리라…. 다시 육필을 써 보면서 잃어 버린 내 몸과 정신의 한 수공업적 각인을 새삼 느낀다’고 했고 나태주 시인은 ‘육필시집은 한 시인에 대한 철저한 기념물이다. 하기사 그 무엇치고 기념물 아닌 것이 있으랴만 이건 참 아뜩한 환희요, 행운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라고 했다. 꿈을 이뤘다는 봉두난발체 김태영 시인의 기쁜 마음은 한없이 진실한 ‘궁서체’로 읽혔다.


활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키보드의 누름쇠들이 새삼 낯설다. 쉬프트Shift 밑의 화살표는 누가 창안했을까. 백스페이스backspace와 엔터enter 밑의 화살표가 미묘하게 다르구나. 키보드 사용 20년 만에 새삼 자판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다가 아침식사로 오물거리던 곡물빵의 깨 부스러기를 흘리고 말았다. 누름쇠 사이로 들어간 깨 몇 알을 찾아 누름쇠 하나를 뜯어냈다가 발견한 먼지 덩어리들. 차마 다시 덮어둘 수준이 아니어서 급한 대로 먼지를 거둬들이며 곱씹는다. 역시 ‘활자의 이면’은 이다지도 중요한 것이구나! 손마디에 끼인 녹들도 닦아내야 하리.

 

글  천소현 기자   사진제공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이 지난해 초 출간한 44종의 시선집. 정현종, 신경림, 이생진, 정공채, 정진규, 나태주, 윤후명, 장석주, 이태수 등 43명의 시인들이 각자 엄선한 자신의 대표시를 육필로 써서 모아낸 개인별 시선집 43권과 각각의 표제시를 한 권으로 묶은 <시인이 시를 쓰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달에는 김주대, 김용범, 김태형, 김형수, 나해철, 박상률, 박철, 배창환, 윤제림, 이제무, 차옥혜, 최규승, 최종천, 황규관 시인 등 14인의 시선집이 추가로 출간되었고 올해 말까지 다시 14종이 더 출간될 예정이다. 평소 좋아하는 시인들의 육필본을 소장하는 기쁨이 멀지 않았다. 각권 1만5,000원. 일정 수량 이상 주문할 경우 할인을 받을 수 있다. www.zman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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