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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guide-권위의 원리

  • Editor. 김선주
  • 입력 2014.01.02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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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주제로 했을 뿐이지, 딱딱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해외 세미나나 포럼 현장에 종종 내던져진다. 달리는 영어를 책망하며 인터뷰에 취재메모에 사진촬영까지, 버거운 멀티 플레이어 노릇에 멀미나기 십상이다. 동행자 한 명 없이 홀로일 때는 더 심하다. 그때도 그랬다. 예닐곱 시간의 비행시간이 모래시계처럼 비워질수록 혼자라는 적막감만 커졌다.

가이드라도 공항에 제때 마중 나와 있어야 할 텐데, 괜한 걱정에 두리번거리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한글로 쓴 나의 이름과 그 푯말을 들고 있는 한국인 가이드였다. 영어 로컬가이드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한국인이기까지 했으니….
 
게다가 이성이었고 더욱이 엇비슷한 나이였다. 장난기 넘쳤고 농을 농으로
받아치는 센스도 고마웠다.
남편과 아내 흉보기까지 자투리 시간의
대화만 놓고 보자면 친구나 다름없었다.
 
일도 술술 풀렸다. 가이드는 세미나며 기자회견이며 파티며 나의 스케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겼고, 해박한 현지 지리정보를 통해 동선도 가장 효율적으로 짰다. 심지어 부여받은 업무가 아니었던 통역도 짬짬이 했으며, 어떤 때는 대신 취재메모와 녹음을 했다. 하루 이틀 만에 최적의 파트너가 됐다. 가이드는 성심을 다했고 여행자는 전적인 신뢰를 던졌다.

틈은 아주 사소한 데서 비롯됐다. 어제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만난 이 사람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나는 일언지하에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쏙 빼닮기는 했어도 분명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가이드의 반응은 당혹스러웠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휘둥그레진 눈은 매서웠다. 동일인이 맞는데 왜 자신을 믿지 않느냐는 원망 또는 책망 같았다. 어디 밀릴쏘냐, 서로 언성을 높여 티격태격했다. 급기야 ‘그’든, ‘이’든, ‘다른’이든 찾아내서 3자 대면으로 시비를 가르자는 국면으로까지 치달았다. 주위의 시선이 3자 대면 상황으로까지 가는 파국은 막았지만, 그후 가이드는 변했다. 기계적으로 외운 상투적 설명이 드문드문 정적을 깼지만 거기까지였고, 서로 격식은 차렸지만 멀고 어색했다.

일본어 가이드(관광통역안내사) A선생이 떠올랐다. 1970년대, 그러니까 일본인 관광객이 우리나라로 물밀듯 밀려왔을 때부터 30년 넘게 현장을 뛰었던 베테랑 가이드다. 자신이 보기에도 여자 가이드는 드세고, 남자 가이드는 냉정하단다. 만국 공통으로! 통솔력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곧 가이드의 권위다. 아무리 언어가 뛰어나고 지식이 풍부하더라도 일사분란하게 손님을 이끌지 못하면 무능한 가이드로 취급받는단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늘 가이드의 권위가 무력화됐을 때 터졌다고 했다. 도전받고 시험당하기 일쑤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을 곧추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란다.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 상대를 위하는 이타적 권위이니 인정해야 한다 했다.
 
가이드뿐이겠는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데 필요한 만큼의
권위를 갈망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남편과 아내로서, 선생과 제자로서,
상사와 부하로서…. 역할에 합당한
권위 확보는 어쩌면 의무다.
 
본인의 노력에 상대의 배려가 더해지는 게 권위의 원리이겠거니 싶었다. 날이 후텁지근해서 내가 착각했었던 것 같다, 넌지시 던지니 가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럴 수도 있지 냉큼 답하고 만면화색이었다. 박학다식 전지전능 가이드로 되돌아왔다.
그리운 나의 가이드 바이올렛, 지났으니 말이지만 분명히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소!
 
글  김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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