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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기자] 소설이란 이름의 진실 게임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4.01.02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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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일까
아니면 인생의 충실한 기록일까.
개개인이 간직하는 기억이란
진실에 과연 얼마나 근접할까.
 
 
6년째 이어오고 있는 북클럽에서 올가을 <사랑의 역사>를 읽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소설을 둘러싸고 피어날 이야기들이 기대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 힘겨웠던 먹먹함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휴가길 기내에서 이 소설과 마주했다. 그 구성이 난해해 빠져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종잡을 수 없이 오가는 화자를 따라가느라 좁은 기내에서 자꾸만 자세를 바꾸며 미간을 찌푸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할 수만 있다면 드라마의 등장인물 소개처럼 ‘인물 관계도’라도 그려 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나는 입국 심사를 위해 줄을 서기 어려울 만큼 눈이 부었고 가슴은 미어질 것 같았다.

플롯은 이러하다. 뉴욕 맨해튼에 살고 있는 80세의 레오 거스키 앞으로 한 권의 책이 배달된다. 아니 원고 뭉치라고 해야겠다. 누군가 곱게 출력해 가져다 놓은 원고 더미. 그런데 그건 오래 전 그가 아직 빛나는 꿈을 꾸던 스무 살 시절에 쓴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배경 장소가 바뀌었고, 그가 적었던 이디시어가 아닌 영어로 쓰여 있지만 이것은 분명 그가 쓴 소설이다. 그 한 문장을 쓰기 위해, 그가 사랑했던 한 소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진짜 <사랑의 역사>는 무엇일까

문학 평론가들의 말을 빌려오자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상호 텍스트성’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작품 <사랑의 역사>는 원작자 레오 거스키와 가공자 즈비 리트비노프라는 두 명의 다른 저자를 갖고 있고, 스페인어 번역자와 영어 번역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계의 독자는 각 나라 번역가의 손을 빌어 이 소설을 읽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 <사랑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인지 레오 거스키의 <사랑의 역사>인지 헛갈린다. 말 그대로 이중삼중의 텍스트 교란에 성공한 작품이다. 질문도 던진다. 복제와 표절, 리메이크와 샘플링이 혼재한 시대에 원작이란 대체 무얼까 하는 질문 말이다. 창작의 괴로움을 아는 이들 대개가 레오의 원고를 훔친 즈비의 행동에 분노하지만, 나는 감히 즈비를 향해 돌을 던지지는 못하겠다. 그의 ‘절도’가 아니었다면 다비드와 샬럿이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작이 친 아버지 레오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빛나는 원고를 옆에 두고 이를 옮겨 적다 그 글에 빠지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간 즈비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토록 아프고 아름다운 인생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를 눈이 퉁퉁 붓도록 먹먹하게 했을까.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인생이다. 유행가 가사보다 흔하고 일일 연속극보다 통속적이라고 비웃어도 할 수 없다. 다른 단어로 대체해 보고 싶지만 그건 천재 작가라 불리는 니콜 크라우스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거 같다.

스무 살에 헤어진 연인 알마를 향한 레오의 한결 같은 사랑은 지고지순 그 자체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그녀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아들을 놓지 못하고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혼란의 시대, 목숨을 부지하지 위해 숲에 숨어 있던 것처럼,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이 살아가는 방법인 양 버틴다. 레오가 말년에 읊조리듯이 그건 단순히 사랑을 넘어 그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이지만 그녀 자신의 목소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알마 메레민스키의 사랑도 아프다.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을 키우며 과거의 사랑을 덮고 현재를 지킨 알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레오의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 간직하고 아들에게 레오의 글을 읽어 주면서도 가정을 지킨 그녀 역시 무너지는 가슴을 달래며 살았을 것이다.

즈비 리트비노프를 향한 로사의 사랑도 있다. 즈비가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완성한 건 그녀의 사랑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원고를 돌려달라는 레오의 편지를 받아든 로사는 자신을 속인 남편에게 분노하지만, 그것을 덮는 것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라 믿는다. 모든 사실을 봉인하면서 예술가의 아내로 살아낸 그녀의 일기장은 어떤 단어들로 채워졌을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렇게 숱하게 엇갈리는 사랑의 순간들이 겹겹이 모여 쌓인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드라마틱한 내용이 아니냐고 색안경을 끼지는 않기를 바란다. 제 아무리 잠잠하고 평범해 보이는 인생이라도 돋보기를 가져가보면 그가 지나온 엄청난 인생이 묻어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말한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십여 명이나 되는 주요 인물은 물론이고, 엑스트라급 인물에도 과거와 오늘을 부여한 작가의 치밀한 디테일은 덤이다.
여든의 레오가 살고 있는 그 도시 뉴욕을 그려 본다. 차이나타운을 면한 그랜드스트리트 504번지에서 레오는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있을 것 같다. 한때 내 영혼이 서성였던 그 도시의 골목골목을 그와 함께 거닐고 싶다.
 
글  Travie wirter 김정은    사진제공  민음사 02-515-2000
 

사랑의 역사
폴란드 출신의 미국 이민자 레오가 썼던 원고 <사랑의 역사>가 어느날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의 이름으로 칠레에서 스페인어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소설에 감동한 한 번역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한 사람이 그 책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의뢰한다. 전혀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는 대체 어떤 사연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번역자 한은경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관점에 따라,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는 다면체 같은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뉴욕 문단에서 ‘문학신동’이라 불리는 저자 니콜 크라우스Nicole Krauss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복선과 실마리를 숨겨놓았다.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니콜 크라우스 지음┃한은경 번역┃민음사┃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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