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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빛나는 모서리 광주 양림동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4.01.0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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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상징의 도시다. 쉽게 말하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면의 이면, 혹은 이면의 측면이 중요한 도시다. 그 여행을 위해 우리가 지금 돌아야 할 모서리는 양림동이다. 볼수록 눈이 부신 찬란한 모서리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창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트주 정헌기 대표와 광주 관광컨벤션뷰로의 최지선씨
유수만 선교사 사택의 붉은 벽돌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양림동 풍경 photos by 정헌기
 
 
광주의 속살 만지기

이제껏 광주 양림동은 기독교 역사 유적지로만 알려져 왔다. 선교사묘원,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간호대학,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광주기독병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1900년대 초 양림동을 통해 호남으로 전해졌던 기독교의 흔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양림동 읽기가 달라지고 있다. 80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시간이 멈추어 버린 광주. 이 도시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바로 양림동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사인> 고재열 기자는 양림동을 두고 ‘광주의 속살’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양림동은 불친절하다. 여행자를 확 끌어당기는 자력磁力이 약하다. 걸어서 여행하기 좋을 만큼 넓지 않은 동네지만 이방인에게 살뜰하게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를 기대하면 금물이다. 내부가 사뭇 궁금한 근대 건축물들도 대부분 굳게 잠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림동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던 이른바 ‘속살론’이다. 속살을 누가 쉬이 허락할까. 자력自力으로 양림동을 부드럽게 만져야 한다.

그 속살 만지기에 도움을 줄 두 사람을 다형다방 2층에서 만났다. 일터와 보금자리까지 광주로 옮겨 버린 젊은 문화기획자, 쥬스컴퍼니의 이한호 대표(아래사진 오른쪽)와 광주 출신으로 양림동 스토리 발굴에 앞장서고 있는 정헌기 대표(왼쪽)였다. 다형다방은 쥬스컴퍼니에서 운영하고 있는 무인카페로 양림동에 오래 거주했던 시인 다형 김현승 시인을 기념한 공간이자 2층 다락방은 과객들의 하룻밤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다형다방에 전시된 흑백 사진 속에는 다형 김현승 시인과 과거의 양림동이 살아 있었다. ‘절대 고독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그의 곁을 항상 지켰던 것은 선교사들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한 잔의 커피였다. 자연스레 동료 문인들은 그를 다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나 접했던 시인이 ‘형’으로 불렸던 곳. 양림동 산책은 이렇게 시작됐다.
 

 
 
100년 전, 양림동에서는… 

양림동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은 근대건축문화유적지로, 휑하니 남은 건물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알맹이를 품지 않는다면 껍데기는 결코 위대할 수 없다. 정헌기 대표는 100년 전 미국 남장로교파의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시 양림동의 경제적, 문화적 자양분이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문화가 강한 나주에서 거부당했던 선교사들은 광주 양림동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당시 양림동에는 아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두는 풍장 터가 있을 만큼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반면에 예부터 권세 있는 양반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죠. 사람들의 의식도 깨어 있는 편이었고, 후원자금을 모으기에도 유리했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착한 양림동의 선교사들이 보여준 삶의 모범은 대단했다. 그 증거물들이 바로 양림동의 아름다운 근대건축물로 꼽히는 선교사 사택, 교회, 학교들이다. 나병환자와 빈민, 과부, 고아들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고 청빈의 삶을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선교 간호사 서서평은 예수의 재림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1909년 오기원 선교사부터 22기의 무덤이 선교사묘원에 마련됐고 국내외에서 조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도 기독간호대 학생들은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의 전신)를 창립하고 11년간 회장으로 이끌었던 서서평의 묘지를 일년에 한 번씩 찾아온다.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우일선 선교사의 회색벽돌기와집은 지역 최초의 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그 의미만큼이나 외관도, 내부도, 정원도 아름다운 집이다.

양림동의 한옥도 뒤처지지 않는다. 500년이 넘게 살아온 팽나무가 아직도 힘차게 가지를 뻗고 있는 이장우 가옥은 원래 1899년 정병호가 건축한 곳으로, 민속자료로 보호되고 있다. 정 대표가 말을 이었다. “1905년에 양림동에서 최초의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렸어요. 당시 정병호 가옥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에 그랜드 피아노라는 걸. 그 아버지 정낙교는 만석꾼 정도가 아니라 24만석꾼이었다니 상상이 되나요? 이 집 마당에서 완창을 하지 못하면 명창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낙교의 외손주가 정추 선생이니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닌 거죠.”

외삼촌 정병호의 집을 드나들며 피아노를 배웠던 정추는 러시아로 건너가 차이코프스키 음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궁상각치우의 우리 음계를 적용한 그의 오케스트라 선율은 러시아인들의 귀를 사로잡아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로도 불렸지만 개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치고자 했던 소망도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지난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정추(1923~2013년)의 바로 옆집에는 정율성이 살았다.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1914~1976년) 선생은 중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음악가다. 1992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연주됐던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바로 정율성 선생 작품. 광주를 찾는 중국인들은 그의 생가터를 꼭 방문한다. 광주에서는 그 명성이 뒤늦게 알려져 몇해 전부터 정율성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에서 폭발했던 시대정신의 뿌리도 양림동에서 찾을 수 있다. 광주 3·1만세 운동의 태동지가 바로 양림동에 있다. 치마를 뜯어 만든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던 23명의 교사와 학생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수피아여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에 반대하는 비밀결사조직(증표로 은가락지를 끼고 있었다)이 있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확고했던 소피아여고생들의 전통은 졸업생들에게도 깊은 자부심으로 새겨져 있다. 양림동을 관통하는 무형의 인적 유산은 이처럼 풍성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양림동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다. 광주천을 사이에 두고 고층빌딩들이 솟아오른 충장로에 비하면 양림동은 개발이 빗겨간 작은 동네일뿐이다. 최근 세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길이 닦이고 집값이 오르는 추세지만 그 속도가 가능한 늦어지면 좋겠단다. 공간의 디자인만 바꾸는 방식의 개발은 사양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림동은 이미 광주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된 것 같다. 예술가들이 돌아오고, 크고 작은 문화적 이벤트가 이어지며, 스토리 발굴도 활발하다. 손을 뻗어 만지고, 귀로 듣고,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근대의 시간들이 도도하게 양림동을 흐르고 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광주광역시 관광컨벤션뷰로 062-611-3631
 
 
1 양림교회. 양림동은 광주에 기독교 문화의 전파된 관문이었다 2 통기타 거리에는 라이브 연주를 하는 카페와 주점들이 모여 있다 3 수피아여고 안에 있는 커티스 메모리얼 홀 4 다형다방 앞에 서 있는 정율성선생 사진
 
5, 9 이장우 가옥의 장독대와 500년 수령의 팽나무 6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아름다운 회색 벽돌집이다. 한때 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7 선교사묘원으로 올라가는 양림길은 마을 주민들이 매일 걸어 다니는 산책길이자 순례의 길이다 8 오웬 의사를 기리기 위해 친지들이 1914년 건립한 오웬기념각 10 광주천

▶travie info 
양림동 산책자

교통편 | 광주역에서 버스 정거장까지 414m 걷기, 진월07번 버스 승차 후 충파(남) 정거장에서 하차.
주관적인 추천 루트 | 다형다방 → 피터슨 선교사 사택터, 유수만 선교사 사택, 원요한 선교사 사택 → 호랑가시 나무 → 수피아여자고등학교(수피아홀, 수피아 옛 강당, 광주 3·1 만세운동기념동상, 윈스보로우홀, 커티스 메모리얼 홀) →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선교사 묘원 → 다형 김현승 시비 → 충현원 → 양림미술관 → 선교기념비 → 이장우 가옥 → 최승효 가옥(비개방) → 광주정공엄지려(충견상) → 오웬기념각 → 정율성 가옥 → 광주 3·1 만세운동 태동지 → 정율성 기념상 → 광주천 → 뒹굴동굴 → 양파정 → 통기타 거리
문의 | 양림동 주민센터 062-650-7601
 
1박2일을 고려한다면
숙박 | 양림동의 북동쪽은 바로 광주천이다. 이 천을 경계로 시간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간다. 모텔과 식당이 현대 쪽에 즐비하므로 잠과 식사는 여기서 해결하면 된다.
타이밍 | 오전 시간을 추천한다. 아침에 순교자묘원에 다녀와서 무등산을 바라보며 모닝커피를 마실 수 있다. 길만 따라 걸으면 1~2시간에도 끝나지만 고택이나 미술관 등을 천천히 방문하려면 한나절이 걸린다.
카페 | 무인카페인 다형다방의 믹스커피가 싫다면 파우제나 어비슨 기념관 카페를 찾으면 된다. T브라운관 8층 카페에 올라가면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양림동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다형다방 자리에서 성업했던 양림떡볶이는 근처의 2층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문학·예술 테마 더하기
대남로변에 우뚝 선 주공휴먼시아 아파트는 <징소리>의 소설가 문순태의 거처, <첫사랑>의 극작가 조소혜의 거처, 소설가 황석영이 <장길산>을 집필했던 곳,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여사의 거처 등을 모두 삼켜 버렸다. 곽재구 시인의 대표작 <사평역에서>에 등장하던 사평역도 터로만 남았다. 다형 김현승 시인의 시비는 펜촉 모양인데, 원래 그 뾰족한 촉 사이로 무등산이 걸리도록 설치되었으나 학교 건물에 가로막혀 의미가 희석됐다. 서양화가 한희원, 미디어아티스트 정운학은 현재도 양림동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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