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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opener-코르크 예찬

  • Editor. 차민경
  • 입력 2014.02.04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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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음악을 조용하게 틀어 놓는다. 방의 불을 끄고 작은 조명등을 켠다. 의자에 깊숙하게 몸을 파묻는다. 그리고 와인 한 모금.

자취를 하기 전 생각했던 ‘혼자 살면 해보고 싶은 일들’ 목록 중에는 ‘집에서 분위기 있게 와인 마시기’가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집에서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세련된 도시 사람들이 즐기는 고상한 여유처럼 느껴졌음은 물론이요, 자취생의 사소한 허영을 채워 주기에도 그만한 것이 없었다.

자취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여윳돈의 일부분을 와인에 할애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저렴하게. 만원이 채 되지 않는 와인을 사온 뒤 조명, 음악, 와인 잔까지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 문제는 와인 코르크였다. 오프너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것. 코르크를 따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 땀까지 뻘뻘 났다. 엉뚱하게 힘을 소진한 탓에 나의 첫 와인 음미는 운동 후 휴식시간에 가까웠다. 심지어 와인은 맛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맛있는 와인은 추천받으면 되고, 어려웠던 첫 대면을 통해 오프너 사용법도 제대로 익혔으니.
문제는 몇 달 뒤 터졌다. 새로 산 와인 코르크에 줄곧 써 왔던 오프너를 밀어 넣는 도중 손잡이 한 쪽이 부러졌다. 당황했지만 바로 주변 슈퍼에서 새 오프너를 사 와 다시 시도하기 시작했다.
 
꾹꾹 밀어 넣고 뽑아내려 힘을 주는 순간,
코르크에 박힌 스크루가 몸통과
‘댕강’ 분리됐다. 이렇게 황당할 데가.
완벽할 수 있었던 휴식시간을
불량 오프너가 망치고 있었다.
 
황당함은 뽑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이어졌다. 박힌 스크루 주변의 코르크를 칼로 조금씩 파내 플라이어(물체를 쥐거나 고정하는 공구)로 꽉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뽑아내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흔들고 있는 순간 와인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사라진 지 오래, 오직 이걸 뽑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코르크에 대한 분노였다. 왜 와인은 코르크로 막혀 있는가, 고릿적 전통을 왜 현대식으로 바꾸질 못하는가! 집념과 오기로 결국 코르크를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와인은 그대로 구석에 처박혔다가 버려졌다. 그후 몇 년 동안 와인은 쳐다도 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우연히 와인을 선물 받았다. 놀랍게도 코르크마개가 아닌 스크루 마개였다. 음료수 따듯 도르륵 돌려서 열면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스크루 마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사용됐고 뉴질랜드나 호주에서는 스크루 마개를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고. 점점 사용률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작은 조명을 켜고, 잔잔한 음악을 깔고,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와인 뚜껑을 단숨에 돌려서 깠다.
그래. 뭔가 허전했다. 와인이라는 술이 가진 특수성을 무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코르크로 막힌 병 입구,
나뭇결이 살아있는 코르크의 모양,
뽑아낸 코르크에서 나는 축축한 와인 향.
양철 꼭지가 비틀린 채로 떨어져 나온
스크루 마개에선 전혀 와인의 특수함이나
정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프너가 필요 없는 데다 시간도 절약되니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내가 그려 왔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와인이라는 술을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코르크를 뽑고, 와인에 맞는 잔을 사용하고, 향을 음미하는 그 모든 과정을 사랑했던 것이다. 비록 불량 오프너에 된통 당했을지라도. 그래서 다시 차근차근 도전하기로 했다. 시작은 튼튼하고 좋은 오프너를 사는 것부터.
 
글  차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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