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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opener-너 없어도 괜찮아

  • Editor. 양이슬
  • 입력 2014.02.04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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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시기의 해질녘쯤이었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 집 앞 대학교 잔디밭에 돗자리를 펼쳤다. 룸메이트였던 친구와 맥주 몇 병에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맥주를 딸 오프너가 없었다. 뇌리에 빠르게 스쳐 지나간 기억은 병과 병의 주둥이끼리 위아래로 부딪혀 한 병의 맥주를 따는 것이었다. 재빠르게 시도했다. 그리고 따졌다. 아마 그것이 나의 병뚜껑 따기 역사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오프너 없이 병뚜껑 따기는 남모르게 계속됐다. 일반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숟가락은 물론 젓가락, 라이터, 식탁 모서리까지 정복하는 순간이 왔다. 재미로 시작한 병뚜껑 따기는 ‘꼭 따고야 말겠어’라는 스스로와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고,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라도 한 양 나름의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흥에 겨우면 나도 모르게 한 손에는 숟가락,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병뚜껑을 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숟가락으로 병을 따는 내 모습을 본 그들은 “넌 참 별 걸 다 한다”거나 “한 번 더 해봐!”라며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정도로 그쳤다.
친구들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오랜만에 참석한 대학 선후배 모임에서 터졌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 넘쳐흐르는
흥을 이기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맥주병을 숟가락으로 단번에 따 버렸다.
일순간 경쾌하면서도 우렁차게 맥주병과
병뚜껑이 분리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나는 경직됐고, 상황 파악을 한 그들은 “대단하다”는 둥 “이런 것도 할 줄 아냐”, “술 좀 작작 마셔라” 등의 영혼 없는 리액션 만을 남긴 채 다시 각자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술 잘 못 마셔요”를 연발하던 나는 한순간에 거짓말쟁이 주당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술잔들은 끊이지 않고 내 앞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날의 기억은 다음날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걸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 장기 아닌 장기를 두 번 다시 공공의 장소에서 드러내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다고 나의 하나뿐인 장기를 묵혀 둘 수는 없었다. 가끔 처진 술자리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 한몫하기도 했고, 때로는 집중받고 싶은 자리에서 ‘나 여기 있소’라고 말하고 싶을 때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의 주둥이를
막고 있는 뚜껑을 편하게 따기 위해
오프너라는 도구를 사용할 때,
그들이 내놓은 도구를 스스로 버림으로써
그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오프너가 없다고 찾아 헤매는 그들 앞에서만큼은 어떤 상황이 와도 어깨 쫙 펴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자신감까지 솟았다.
아직도 종종 친구들과의 가벼운 술자리에서 흥에 취하면 맥주 뚜껑을 딸 때 오프너 대신 숟가락을 이용한다. 한번에 따지지 않아 휜 숟가락도 여러 개고, 숟가락을 받치고 있는 내 손이 시뻘겋게 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혹여나 힘이 부족해 내부의 가스만 살짝 빠지고 따지지 않을 때면 그 실망과 손의 아픔은 배가 된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그래도 이 소득 없는 장기는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다. 달인처럼 손에 닿는 모든 물건으로 병뚜껑을 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오프너가 없는 곳에서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킬 수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글  양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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