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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분실물-진실보다 진심

  • Editor. 손고은
  • 입력 2014.02.27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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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그녀를 편의상 J라 하겠다. 이 글을 읽을 수도 있는 J가 또다시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것은 원치 않으므로. 
추운 겨울 어느 날, 방학이라고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청소나 해놓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아예 대청소를 해버렸다. 옷, 신발, 화장품 등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아침부터 시작한 대청소가 끝났을 때는 어슴푸레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 온 J로부터 술이나 한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종일 청소 때문에 지쳐 있던 나는 J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가 잠시 내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간단한 안주거리를 만들었다. 맥주 한 캔을 두고 쉴 새 없이 떠들던 우리는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10시 드라마가 방영되자 밤이 깊었음을 알았다. 집에 가겠다는 J를 골목 어귀까지 배웅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씻고 화장대 서랍을 여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그날 정리한 화장품의 배열이 티 나지 않게 흐트러져 있음을 감지했다. 석연치 않은 느낌에 자세히 살펴보니, 없어졌다. 파우치 안에 있던 화장품이 몽땅 사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수첩에 껴 놓은 비상금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디에 두었지 고민 할 법도 한데 이날은 달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내 손으로 정리해 놓은 것들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말이다. 용의자는 단 한 명, J였다. 집 안에 나를 제외한 타인은 그녀뿐이었으니. 그렇지만 섣불리 그녀를 추궁할 수도 없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자칫 J와의 관계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없어진 물건에 대한 충격은 잠시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만 늘어났다. ‘당장 전화해서 내놓으라고 말할까? 
아니면 은근슬쩍 갑자기 물건이 
사라졌다고 투덜대듯 말해 봐?’ 
 
무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때, 어릴 적 어머니가 했던 한마디가 생각났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무리 악질의 범죄라 할지라도 그 일이 일어난 것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J는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 온 친구가 아니던가. 그녀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 범인은 J가 확실했지만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대신 내 진심이 통하기를 바라며 SNS에 J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짧은 글을 올렸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때로는 진실보다 진심이 와 닿는 법. 
그러니 먼저 나에게 말해 주길 기다리겠다.’ 
 
글을 올리고 난 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J로부터 만나자는 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소주 두 병을 비워 나갈 때 즈음 J는 훌쩍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리도벽이었다. 그녀는 생리기간을 전후로 자신도 모르게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고 고백했다. 전에도 여러 번 이러한 일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그러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려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가져간 물건을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말을 아끼기로 한 내 선택은 옳았다. J는 그날 이후 심리 상담을 받으러 다녔고 이따금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며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 나갔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으로 다짜고짜 전화해 험한 말을 내뱉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J의 증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마음이 치료되었길 바랄 뿐.  
 
글  손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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