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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ARTH-‘동해’로 뜬 지구본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4.04.2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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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회사까지 3.5km. 걸어서 출퇴근을 하겠다는 결심을 세운 뒤 만보기 어플을 다운받고 보니 꽤 쓸 만하다. 생각해 보면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스마트폰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물품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내 여행꾸러미만 봐도 그렇다. 출장필수품이었던 카메라, 가이드북, 알람시계, 수첩, 지도, 녹음기 등은 물론이고 나침반과 GPS, 손전등, 만보기까지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되는 세상. 가끔은 별자리 어플을 켜고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별자리들을 헤아리기도 한다.

‘참 세상 좋아졌네!’라는 감탄이 절로 들지만 
어쩐지 아쉬움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여행기자를 시작하면서부터 모아왔던 
종이지도들은 ‘실용’을 잃고 폐품더미가 됐다.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현지 지도들이니 언젠가 다시 가게 되면 유용할 것 같고, 여행계획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모아둔 것이었다. 하지만 종이지도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해양시대의 개척자들이 목숨을 걸고 완성한 고지도 위의 그림과 글씨들은 명품 여행가방의 패브릭 패턴으로 더 인기를 끌게 된 지 오래다. 현재 위치를 ‘꼭’ 찍어 주는 구글이 손 안에 있고, 골목 골목을 실사로 보여주는 라이브 뷰가 있으니 말이다. 

지도가 이러할진대 지구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교육적인 용도보다는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앤티크한 장식품으로 용도가 바뀐 지 오래됐다. 세계 3대 지구본 제작사로 꼽히는 조폴리 지오그라피카Zoffoli Geographica의 수제 지구본들도 뚜껑을 열면 얼음을 채운 와인바가 나오기도 하고, 룰렛 게임판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가격도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그런데 지난 3월25일 서울도서관이 그 조폴리사의 지구본 2개를 기증받았다. 물론 와인도 없고, 게임판도 없는 진짜 지구본이었다. 

전에 이 지구본을 본 적이 있었다. 지구본을 기증한 티메카코리아의 김태진 대표의 사무실에서였다. 해외 명품 지구본으로는 유일하게 ‘동해’를 표기한 지구본이라고 했다. 조폴리사가 자체 조사팀을 가동해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한 결과였다고 했다. 깨알같이 쓰인 ‘east sea’라는 글씨를 애써 찾아내서 지구본을 기특하다며 쓰다듬는 마음 한 구석엔 씁쓸함도 없진 않았다. 왜 이런 일에 뭉클해져야만 하는가 말이다. 김태진 대표는 전에도 뉴욕공립도서관 맨해튼 본관에도 조폴리사의 지구본을 기증한 바 있다. 현재 그가 기증한 지구본 2개는 서울도서관 2층 로비와 4층 세계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지도는 여전히 여행의 필수품이다. 
다만 그 형태가 바뀔 뿐. 

종이지도에 대한 내 집착에는 사실, 방콕 가이드북을 제작하며 지도의 한 점, 한 점을 확인해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발로 지구를 누비며 새로운 세상을 기록해 준 익명의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도, 여행의 확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요즘 사회적기업을 중심으로 마을지도 그리기가 활발해지고, 그 지도 덕에 마을탐방이 활기를 띄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은 단위의 지도들을 그리면 그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작은 이름들이 있고, 그 어딘가에 속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엔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아무도 길을 잃지 않도록.  
 
글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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