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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 우산 로맨스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4.06.30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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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차가워.’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 떨어진다. 사람들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우산을 꺼내 든다. 하필이면 이런 날 일기예보를 챙겨 보지 않다니. 우산이 없는 난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걷기 시작한다. 
 
비는 가랑비에서 더 이상 심해지지 않는다. ‘참, 여긴 서울이었지.’ 나는 혹여 탈모가 생길까 걱정돼 갖고 있던 신문으로 정수리를 가리지만 우산을 새로 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실은 오랜만에 비를 맞는 느낌이 꽤 마음에 든다. 그러나 곧 느껴지는 우산 쓴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
 
한국에서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사람은 우산을 깜빡 잊고 나온 사람(뛰는 경우)과 실연당한 사람(천천히 걷는 경우)으로 분류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내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지다가 결국 뛴다. 
‘실연을 당한 게 아니라고요!’ 
온몸으로 애써 증명한다.
 
서울에서 어느 비오는 날 종종 겪는 나의 이야기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냈던 1년여 동안 의아했던 점 중 하나는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웬만한 비엔 우산 없이도 태평하게 거리를 걸어 다녔다. 처음엔 꼬박꼬박 우산을 챙기던 나도 나중엔 보슬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니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비를 맞으며 길을 걷고 싶은 건 그때의 기분이 참 괜찮았기 때문이다. 

여행기자로 일하면서 캐나다 밴쿠버, 미국 시애틀처럼 일 년의 절반이 우기雨期인 도시의 사람들도 우산을 안 쓴다는 걸 알게 됐다. 심지어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도. 공기가 오염되지 않아 빗물이 깨끗하고, 폭우가 아닌 보슬비여서 그 정도는 맞고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시애틀관광청 직원의 말에 따르면 시애틀 사람들은 우산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른단다. 그 얘길 들었을 때 비오는 날 억지로 뛰어야 했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슬쩍 부러웠다. 
그런데 우산을 꼭 쓰는 문화 때문에 좋은 일은 없었을까? 내 인생의 모토인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곰곰 기억을 더듬었다.

교복을 입던 나이. 나는 자주 우연한 로맨스를 꿈꾸었다. 특히 갑자기 세찬 비가 내리고 내게 우산이 없는 날이면, 어떤 멋진 남자애가 우산을 같이 쓰자고 말을 걸어올 것 같다는 상상에 젖어들곤 했다. 아니면 <클래식>이란 영화에서 조인성이 손예진에게 해준 것처럼 자기 재킷을 벗어 내 머리 위를 가려줄 남자애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상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저 ‘꿈’으로 그쳤다.

대학 입학 후 어느 날, 대학로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만 타면 금방 집이었기 때문에 그냥 비를 맞고 서 있는데, 노란 우산 하나가 내 머리 위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드디어! 생애 처음으로! 내게 우산을 씌워 준 낯선 이가 나타난 거다. 그 짧은 순간 조인성을 닮은 온갖 얼굴을 상상하며 마구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아주 착하게 생긴 여자 분이 아주 착하게 웃고 계셨다.

그날, 기대했던 로맨스는 없었지만 나는 따뜻함을 경험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우산 한켠을 양보해 준 그분의 친절에 ‘세상이 아직 참 따뜻하구나’ 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런 우연한 친절 그리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로맨스. 두 가지면 우산 쓰기를 사랑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결론지었다. 
 
글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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