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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PICTURE-15년 밀봉필름 개봉기

  • Editor. 김선주
  • 입력 2014.09.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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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요, 
다 타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예상했지만 막상 그렇다니 허탈했다. 15년은 족히 흘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개봉 상태였어도 본래 기능을 잃었을 시간이다. 하물며 이미 빛을 쬔 필름이었으니…. 피사체가 튕겨낸 빛의 결을 따라 필름은 한참 전에 화학작용을 마치고 굳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필름 현상액 대신 15년 시간이 스며들었다. 그 세월이 감광의 흔적을 말끔히 잠식했다. 

‘중2병’은 당시에도 걷잡을 수도, 종잡을 수도 없었다. 매일 격렬한 화학반응이 휘몰아치는 격랑 같은 나날이었다. 구식 반자동 카메라와 쌍둥이처럼 붙어 지냈던 친구가 그나마 버팀목이었다. 현상하지 않은 채 플라스틱 통에 필름을 밀봉해 버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하룻밤 집을 비운 날이었다. 투병에 지친 중2병 환자 둘은 어설픈 ‘어른놀이’를 감행했고, 반자동 카메라는 36컷짜리 필름에 두 피사체의 행적을 고스란히 담았다. 열려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인화되서는 안 되는 사진이었다. 훗날 어른이 된 뒤 뽑아 보기로 약속하고 밀봉했지만 도대체 언제쯤부터가 어른인지는 둘 다 알지 못했다. 

쌍둥이 같았던 친구와는 중2병에서 벗어난 뒤부터 급격히 소원해졌다. 삶의 궤적이 너무 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이 공유하는 영역은 줄어들었다. 어쩌다 만났지만 화제가 빈곤했다. 대화가 아니라 각자의 얘기만 오갔다. 어느 날 그가 한 말을 내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서글펐다. 그럴 정도로 간극은 벌어졌다. 그나마 중2병 환자 시절까지 함께 쌓아 온 추억이 매개체로 작용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졌다. 밀봉필름에 대한 애착은 그래서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둘은 서로를 자신만큼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까. 

밀봉필름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학에서 사진을 배우고 나서였다. 우발적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미 촬영한 필름은 가급적 빨리 현상해야만 한다는 게 진리였다. 일주일만 지나도 걱정스럽다는데 이미 여러 해가 흘렀으니…. 지금 현상하면 혹시 한두 컷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필름을 들고 암실을 들락거렸지만 거기까지였다. 현상액이 필름 위에 아무런 상도 맺지 못할까 두려웠다. 유년시절의 친구와 추억도 현상 불가 상태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좀더 기다리자고 타이르기를 반복했다. 

디지털은 2000년대 들어 거침없이 필름을 몰아냈다. 이러다가 필름 현상을 맡길 곳조차 없어지겠구나 싶었을 때 섬광처럼 무엇인가 스쳤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했다는 자각이었다. 15년 세월에도, 인터넷 혁명에도 시큰둥했건만 필름의 몰락에서 청년과 성년의 경계선을 봤다. 필름의 퇴장을 바라볼 정도로 꽤나 긴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나이도 30대로 접어들었다. 

니콘 F5 필름카메라를 처분했고 
밀봉했던 필름도 열었다. 
한 컷 한 컷 까맣기만 할 뿐 
아무런 자국이 없었다. 
혹시 몰라 몇 컷을 사진으로 인화했더니 
순백에 가까운 여백이었다. 

다시 채워야 할 공간이었다. 밀봉필름 개봉부터 우리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고씨야, 기억 나냐? 우리가 중2때 찍었던 사진, 오늘 사진관에 맡겼는데… 
 
글 김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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