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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령 기자의 Honeymoon Dream] 책을 사랑하는 너와 내가 ‘우리의 서재’를 채우는 시간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5.10.1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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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식이 필요하다면

앤 패디먼Ann Fadiman의 책 <서재 결혼시키기>에는 그녀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시인 남편과 서재를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두 사람이 서재를 합치는 일은 전쟁처럼 치열했다.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기준이 서로 너무 달랐고 겹치는 책도 많아 어느 것을 간직하고 어느 것을 버릴 지 결정해야 했는데, 각자의 방식을 한 치도 양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때만은 달랐다’는 말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재 결혼식’을 마친 뒤 앤 패디먼은 이렇게 썼다. “이렇게 나의 책과 그의 책은 우리의 책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영국 웨일스Wales ‘헤이온와이Hay-on-Wye’로의 허니문을 권한다. 옆으로 와이강River Wye이 흐르는 인구 1,500명 남짓의 이 작은 마을은 세계 최초의 책 마을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 마을이다. 반경 약 200m 내에 서점 30여 개가 북스토어 간판을 내걸고 있고, 마음껏 책을 골라 양심껏 값을 지불하는 야외 무인책방도 골목골목 자리해 있다. 서점뿐 아니라 가정집과 레스토랑, 카페, B&B들도 저마다 예쁜 표지의 헌책들로 유리창을 장식해 놓았다. 그야말로 책의, 책에 의한, 책을 위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헤이온와이는 원래 광부들이 모여 살던 탄광촌이었다. 1950년대 폐광이 된 후로 쇠락의 길을 걷던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20대 청년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였다. 책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고향에 헌책방을 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변변한 학교도 하나 없고 런던에서 4시간이나 떨어진 시골에 헌책방이 무슨 소용이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았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사 모은 헌책으로 1962년 헤이온와이에 첫 번째 헌책방을 열었고, 이후로도 낡은 성채와 버려진 건물들을 사들이며 헌책방을 늘려 갔다.

리처드 부스가 모은 책이 100만권에 이르고 희귀한 고서적들도 많이 갖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관광객들이 헤이온와이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에 그를 괴짜라고 칭했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헌책방을 열었다. 1977년 리처드 부스가 헤이온와이를 ‘헌책방 왕국’으로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관광지화하면서, 스러져 가던 폐광촌은 ‘책 애호가들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다. 오늘날 헤이온와이는 매년 25만명의 여행자들이 찾아오고 영국 최대의 책 축제가 열리는 곳이 되었다. 또 우리나라 파주 헤이리를 포함해 세계 각국 책 마을들의 모태가 되고 있다.
 
1982년 문을 연 어린이 동화책 전문서점 ‘로즈북스Rose’s Books’
 
헤이온와이의 유리창들은 저마다 예쁜 표지의 헌책들로 장식되어 있다
탐정·추리소설 전문서점 ‘머더 앤 메이험Murder and Mayhem’ 

해롱해롱, 헌책의 향기에 취해

독서광 커플이 헤이온와이를 찾는다면 앤 패디먼이 했던 것 같은 서재 결혼식을 곧장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나의 서재 혹은 너의 서재가 아닌 ‘우리의 서재’ 첫 번째 칸을 채울 책들을 헤이온와이에서 함께 골라 보는 것이다. 10년도 더 전에 출간되어 빛이 바랜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책을 발견할 수도 있고,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의 <해리포터> 시리즈 전집을 헐값에 구하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미래에 아이가 태어나면 읽어줄 첫 번째 영어 동화책으로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의 <피터래빗> 영문판을 사 오는 것도 좋겠다. 보물찾기 하듯 무인책방의 서가를 뒤적이는 일도, 진한 낙엽냄새 같은 헌책의 향기에 취해 작은 동네를 몇 바퀴씩 도는 일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그저 행복할 것 같다.

헤이온와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서점은 이 마을을 만든 주인공인 ‘리처드 부스의 서점Richard Booth’s Bookshop’이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싼 가격의 고전소설 원본부터 1~2유로짜리 가벼운 읽을거리, 신간까지 다양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꽂혀 있다. 이색적인 테마 서점도 많다. ‘머더 앤 메이험Murder and Mayhem·살인과 대혼란’이라는 이름의 서점은 탐정·추리소설만을 모아놓은 곳으로 독특한 인테리어 때문에 기념사진 촬영 배경으로도 인기다. ‘로즈북스Rose’s Books’는 1982년 문을 연 어린이 동화책 전문 서점인데, 희귀본과 절판된 책을 포함해 1만2,0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 서점에는 한 권에 1,400만원에 달하는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책 초판본도 있다고 한다. ‘헤이 시네마 북숍Hay Cinema Bookshop’은 영화책 전문 서점으로 20만권에 달하는 중고 책을 판매하고 있다. ‘더 포이트리 북숍The Poetry Bookshop’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시집만을 취급하는 서점이고, ‘모스틀리맵스닷컴Mostlymaps.com’은 세계의 앤티크 지도를 모아 판매하는 곳이다.

헤이온와이에선 매년 5월 마지막 주부터 6월 첫 주까지 ‘헤이페스티벌Hay Festival’이란 이름의 영국 최대 책 축제가 열린다. 저명한 저자들과 수많은 책 애호가들이 한데 모여 각종 전시와 강연을 열고 이곳저곳에 모여 책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거리는 야외 책장으로 가득 차고, 잔디밭마다 배를 깔고 엎드려 햇살 아래 책을 읽는 사람들로 붐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책이 그득한 구석방 같은 마을, 헤이온와이에서 책과 함께 빈둥빈둥 달콤한 휴식을 가져 보기를. 
 
영국 헤이온와이 가는 길
런던에서 헤이온와이까지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은 없다. 기차로 런던 패딩턴Paddington역에서 헤리퍼드Hereford까지 약 3시간 이동한 다음, 헤리퍼드에서 39번 버스로 갈아타고 약 1시간을 더 가야한다. 왕복에 총 8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당일치기보다는 헤이온와이에서 숙박하는 편이 좋다. 아름다운 저녁놀을 감상하고 영국 특유의 아기자기한 B&B에 묵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헤이온와이에선 매주 목요일마다 각종 식료품과 잡화를 파는 시장이 열린다. 매주 화요일은 반나절만 영업하는 상점이 많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헤이온와이 서점 미리보기
헤이온와이 홈페이지www.hay-on-wye.co.uk/bookshops에서 마을 내 서점별 소개와 주소, 연락처, 운영시간 등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매해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지도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헤이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www.hayfestival.com에서는 축제 일정과 프로그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글 고서령 기자  사진제공 샬레트래블앤라이프 www.chalettrave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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