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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트 유호상의 여행만상] 파리의 악몽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6.29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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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정기휴가가 왔다. 아테네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오랜만에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번 여행엔 이탈리아, 벨기에에 사는 두 친구 집도 방문할 예정이라 무척 들뜬 상태였다. 런던을 출발해 깔레를 거쳐 파리 북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무렵. 타임테이블을 펼쳐 보니 마침 토리노행 야간열차가 1시간 뒤에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일까, 전광판에는 열차 번호가 뜨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길 30여 분, 여전히 열차번호가 뜨질 않았다. ‘이상하다. 다시 볼까…, 헉!!’ 촘촘한 타임테이블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확인하던 나는 쓰러질 뻔했다. 기다리던 열차의 출발역은 한 칸 아래 표시된 리옹역이었다. 책자가 굴곡져서 잘 못 본 것이다. 프랑스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환전도 해 놓지 않아서 택시나 전철을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지도를 펼쳐 보니, 리옹역은 전에 가본 곳이라 나의 빠른 걸음걸이와 탁월한 방향 감각이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생각과 현실은 다른 법! 막상 걷다 보니 교차로에서 방향이 헛갈리기 시작했고 걸어도 걸어도 역은 나오지 않았다. 진땀이 났다. 막판에는 결국 숨이 멎을 만큼 뛰어야 했다. 그렇게 겨우 리옹역 플랫폼에 도착했건만, 역에는 휑한 정적만이….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타임테이블을 펼쳐 그 상황에서 탈 수 있는 야간열차를 찾아봤다. 다행히 암스테르담행 마지막 야간열차가 30분 후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출발역은 어이없게도 방금 전 있었던 파리 북역이었다! 더 이상 수수료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교통비 마련을 위해 환전 키오스크로 달려갔다. 불이 훤히 켜져 있는데 젊은 직원은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절박한 상황을 전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흥분할 시간조차 아까워 바로 택시 승강장 쪽으로 뛰었다. 기사에게 외쳤다. “북역 20달러, OK?” 얼떨결에 불렀는데 충분한 금액이었는지 두말 않고 출발했다. 역시 달러의 위력이란! 그런데, 5분 만에 날아갈 줄 알았던 택시가 복병을 만났다. 밤 시간에 이게 웬 교통체증이란 말인가. 길이 막히자 딴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이 가까운 거리에 20달러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마디 슬쩍 던져 봤다. “아깐 20달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15달러밖에 없는데…” 뻔한 수작에 기사 아저씨는 물론 단호했다. “No!”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접대용 담배 한 갑! 이미 개봉된 것이지만 가진 달러는 15달러밖에 없으니 나머진 이걸로 어떻게 좀 해보자고 하자, 아저씨는 한 개피 피워 보자고 했다. 기꺼이 불까지 붙여 드리자 맛을 보더니 흔쾌히 OK! 담배값이 금값인 나라인지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천원 돈으로 서로 기분 좋게 상황이 마무리됐고 택시는 다행히 기차 출발 5분 전에 도착했다. 
 
긴박하기만 했던 파리의 밤도 
마침내 다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Paris, France
 
▶tip
이 한 번의 에피소드로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유럽의 기차는 목적지마다 역이 다르니, 여행루트를 짤 때 주의할 것. 둘째, 대개 지도로는 가까워 보이는 거리가 실제로는 결코 만만치 않으므로 거리감각에 유의할 것. 셋째, 담배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요긴한 뇌물(?)이 될 수 있다는 것. 본인이 안 피우더라도 비상용으로 몇 갑 챙겨 놓을 만하다.
 
*글을 쓴 유호상은 낯선 곳, 낯선 문화에 던져지는 것을 즐기는 타고난 여행가다. 현재 여행 커뮤니티 ‘클럽 테라노바’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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