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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ch Point] 하와이와 여름 판타지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7.2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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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ch Point 특별한 여행을 만드는 결정적 한 수
 
한 번 본 책이나 영화는 웬만하면 다시 안 보는 성격이다. 왜 본 것을 또 봐야 하는가. 평생 잠을 안 자고 본다 해도 다 못 볼 게 책이고 영화인데. 여행도 마찬가지, 뭐 하러 갔던 곳을 또 갈까. 가진 돈을 다 털어 세계를 여행하더라도 죽기 전엔 미처 가보지 못한 1%를 아쉬워하며 한 줄기 회한이 스칠 텐데. 하지만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건 역시 나이 탓일까. 요즘엔 갔던 여행지에 다시 가 보고 싶다. 어차피 다 못 볼 거, 좋아하는 것 한 번 더 보자는 게 어설프게 나이 든 나의 타협이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면 바로 하와이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며칠 전 서랍에서 발견한 체크무늬 비키니 때문인 것 같다. 미취학 아동 시절을 제외하면 나라는 여자의 일생에서 비키니를 입어 본 것은 딱 한 번. 2010년 하와이 여행 때다. 부부 독자 그리고 애인이 있는 동료 기자 P가 함께한 취재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바다에 들어갈 생각이 없던 터라 아예 수영복도 챙겨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해변이 아닌 곳에서도 비키니와 맨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 위로는 적시지 않겠다는 나의 입수 저지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왜 저들처럼 자유롭지 못한가! 하와이에 왔으면 비키니의 법을 따라야 할 게 아닌가! 결국 나는 밤중에 일행 몰래 숍에 가서 한 10벌 정도 입어 본 후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조바심 내며 이 비키니를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운의 비키니는 하와이의 스노클링 명소인 하나우마 베이에서 아주 잠깐 물맛을 본 후 6년 동안 옷장에서 감옥신세를 졌다. ‘물 먹는 하마’ 옆 텁텁한 어둠 속에서 비키니양은 얼마나 바다가 그리웠을까. 나는 이 체크무늬가 유치해 보일 나이가 되기 전에 어서 빨리 하와이에 가야겠구나, 비키니양에게 제대로 물맛을 보여 줘야겠구나, 생각했다. 얼마 전 배우다가 그만둔 수영도 다시 시작하고, 운전 연수도 받아야겠다고. 렌터카를 빌려 내 스스로 ‘세상 모든 파랑’이라 표현했던 카일루아 해변으로 달려갈 것이며, 거기서 비키니 위에 덧입은 래시 가드는 벗어 던질 것이다. 

이쯤 되면 이달의 매치 포인트가 ‘하와이와 비키니’인가 황당해할 독자가 있을 텐데 어떤 책이든 영화든 여행기든 마지막 구절이 중요하다. 나의 두 번째 하와이 여행의 결정적 한수는 바로 배경 음악이다. 오아후의 72번 해안 국도를 달리는 동안 잭 존슨Jack Johnson을 들을 것이다. 잭 존슨은 하와이 태생의 서퍼 출신 싱어송라이터다. 종종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스치듯 지나간 카일루아 해변이 생각나곤 했다.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와 부드러운 허밍이 햇빛과 모래, 파도,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물장구를 눈앞에 그려댔다. 그의 음악은 우울하지도 지나치게 밝지도 않아서 하와이의 날씨를 고스란히 담은 것 같다. 햇살 가득 하다가도 여우비가 내리는 레인보우 시티를. 만약 비가 온다면 해변가에 잠깐 차를 세우고 ‘Better Together’나 ‘Cocoon’을 들을 것이고, 하늘이 새파랗게 맑다면 모래 위에 엎드려 ‘You and Your Heart’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 아름다운 두 번째 하와이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 글은 마른 장마 후에 닥쳐올 무더위와 여름 두 달 동안 꼬박 써야 할 원고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느 게으른 여행 작가의 여름 판타지다. 현실로 돌아오면 그녀는 쓰다 만 원고 파일 열기가 체크무늬 비키니 입은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겁나서 잭 존슨의 음악을 세 시간째 듣고 있다. 그렇다. 나는 여름 동안 마감의 노예다. 하와이는커녕 경포대도 갈 수 없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빛을 본 체크무늬 비키니양은 당분간 다시 옷장 신세다. ‘물 먹는 하마’양과 함께.  
 

 
*글을 쓴 도선미 작가는 또다시 여행 공수표를 날리고 글을 마무리하게 됐지만, 이 연재를 몇 회 챙겨 본 독자라면 이 연재의 유일한 일관성이 바로 그 공수표라는 걸 알 거라며 어쨌든 잭 존슨, 비키니와 함께한 그녀의 여름 판타지가 미지의 독자를 통해 실현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럼 이만 알로하!
 
에디터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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